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용석 Dec 18. 2020

다행히도 입영 통지서보다 병역거부를 먼저 만났다


사무실에 출근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두 가지다. 메일을 확인하고 기사를 검색한다. 검색창에 '병역거부'나 ‘전쟁없는세상’을 입력해본다. 기사가 없는 날이 더 많다. 요즘처럼 유승준 관련 기사가 몇 페이지를 도배하지만 않아도 다행이다. 오늘(12월 17일)도 다른 날들처럼 출근하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검색을 해본다. 수많은 유승준들 사이로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어느 언론사에서 '역사 속의 오늘'이라는 제목으로 12월 17일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을 정리해 놨다. 1963년 오늘에는 제3공화국이 탄생하여 박정희가 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1992년 오늘에는 김영삼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2011년 오늘에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세상을 떠났다. 내 눈길은 2001년에 머물렀다.     


2001년 12월 17일 오태양 씨 비폭력적 삶과 사회 발전을 위해 양심적 병역거부 선언.     


2001년. 그 겨울을 떠올리기 위해 기억을 거슬러 올라본다. 마치 영화 필름을 뒤로 감는 것처럼 장면 장면이 거꾸로 감긴다. 2001년 12월, 당시 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한 학생운동 그룹에서 활동하는 학생운동가였고, 이제 막 끝난 단과대 학생회장 선거에서 당선된 상태였다. 그리고 21세기는 전쟁의 그림자와 함께 시작되었다. 2001년 9월 11일 뉴욕 한복판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테러로 쓰러진 뒤 미국은 테러의 배후로 테러 단체 알카에다를 이끄는 오사마 빈 라덴을 지목했고 빈 라덴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며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다음 타깃이 이라크라는 것은 꼭 예언자가 아니라도 알 수 있었다. 사실 알카에다의 핵심 인물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이었지만, 미국은 자신의 우방인 사우디아라비아 대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했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이 일으킨 전쟁이 정당하지 않다고 여겼고 세계적으로 반전운동도 거세게 일어났다. 한국의 사회운동 그룹들도 저마다 반전운동에 동참했다. 존 레넌, 우드스탁, 존 바에즈와 밥 딜런, 호 아저씨가 떠오르는 역사상 가장 폭발적이고 대중적이었던 베트남전 반전운동을 우리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도 일었다.      


오태양의 병역거부 소식을 정확히 언제 들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학생운동을 같이 한 동료들과 병역거부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속해있던 학생운동 그룹이 병역거부운동에 조직적으로 동참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반전 운동 중에서도 병역거부 운동에 주목한 특별히 진지한 이유가 있었던 거 같진 않다. 우리 조직은 학생운동 내부에서 소수파였기 때문에 남들이 안 하는 것을 선점하여 주목받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을 것이다. 병역거부 운동과의 첫 만남은 그렇게 우연의 결과였다. 그렇지만 그 우연은 내겐 행운이었다. 훗날 병역거부자 오정록이 말한 것처럼 “입영영장보다 병역거부를 먼저 만났기 때문”이다. 비폭력도, 반군사주의도, 시민불복종도 모른 채 병역거부 운동을 시작했다. 나는 평화주의자여서 병역거부를 한 게 아니었다. 병역거부 운동을 하다 보니 평화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체복무제 도입을 위한 거리 캠페인을 하는 오태양. 출처: 전쟁없는세상 


병역거부라는 단어도, 병역거부의 역사도 모든 게 새로웠다. 고등학교에서 김좌진과 안창호, 윤봉길의 독립운동을 배웠고,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하면서는 박헌영과 이재유의 혁명에 대해서 배웠다. 하지만 어디서도 여호와의 증인이 일제시대에 모조리 감옥에 갇혀갔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극심한 고문에 못 이겨 전향을 하는 와중에도 단 한 명도 전향하지 않고 더러는 옥사하면서도 끝내 감옥에서 해방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었다. 수업을 열심히 들어가진 않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사학과 학생이었는데 부끄럽게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사실 병역거부를 입영영장 거부로 협소하게 해석하면 일제시대 여호와의 증인들은 병역거부가 아닐 수도 있다. 조선 반도와 일본 열도의 여호와의 증인 모두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잡혀간 등대사 사건이 1939년의 일이다. 일본이 조선인을 대상으로 징병제를 실시한 것은 5년 뒤인 1944년이다. 천황의 신민이 될 자격이 2등 국민인 조선인에게는 없다고 생각한 일본은 조선인을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일에는 강제로 끌고 갔지만 군 입대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 태평양 전쟁이 지속되며 군인 숫자가 부족해지자 1944년에는 조선인까지도 징집을 한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징병제가 시행되기 전에 구속되었지만 1939년에 잡혀간 이유도 넓게 보자면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일본의 군국주의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때의 신앙이 징병제를 거부하는 신앙과 같은 맥락이기 때문에 일제시대 여호와의 증인들을 병역거부자라고 부른다. 아마 감옥 밖에서 징병제를 맞이했다면 이들은 모두 병역을 거부해 어차피 감옥에 갔을 거였다.      


하지만 여호와의 증인은 국기에 대한 맹세도 안 하고 수혈도 안 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조금 이상하고 기이한 종교집단쯤으로 여겨졌다. 그러니 여호와의 증인이 군대를 거부한다고 한들 세상은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런 채로 해방 이후 50년이 넘게 흘렀다. 오태양이 병역거부 선언을 했을 당시 여호와의 증인 1600명이 병역거부로 감옥에 갇혀 있었고 해방 후 감옥에 갇힌 사람을 모두 합치면 1만 명이 넘는 숫자였는데, 이는 당시 인권활동가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의 숫자였다. 편견에 맞서 인권을 옹호하며 차별과 싸우는 인권활동가들이 가장 먼저 병역거부 문제에 반응하였다.      


2012년에 만든 병역거부 역사 자료 전시 도록을 보면 병역거부의 역사를 알 수 있다. http://www.withoutwar.org/?p=10621


오태양은 당시 불교에 기반을 둔 인권평화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오태양의 선언으로 병역거부는 비로소 특정 종교인의 예외적인 행동이 아니라, 헌법에 보장된 양심의 자유가 침해당한 인권 문제로 우리 사회에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와 같은 당시 입영 대상자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군대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야 가득했지만 군대를 거부할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고 그게 가능한 줄도 몰랐다. 눈이 나쁜데도 군대에 “꼭 가고 싶습니다”라고 외치는 청년이 나오는 광고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시절이었다.    

  

내가 속한 학생운동 그룹은 열성적으로 병역거부 운동을 시작했다. 대학마다 병역거부자를 초청해서 강연을 열었고, 2002년 2학기에는 국회에 대체복무 입법을 촉구하는 서명을 받는다고 수업도 들어가지 않았다. 요즘은 국민 청원 20만 명이 쉽게 넘는 시절이지만, 아직 온라인 서명이 익숙한 시절이 아니어서 우리는 서명판을 들고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강의실에서 교문과 학생회관 앞에서 서명을 받았고, 지하철에서, 여의도 광장과 서울역 광장, 종묘 공원에서도 서명을 받았다. 종묘에서 서명을 받을 때 내 친구는 지나가던 할아버지에게 머리를 잡혔고, 민중대회나 노동자대회처럼 큰 집회에서 서명판을 들고 다니면 나이 지긋한 노동자 아저씨들이 핀잔을 주듯 우리의 뒤통수에 대고 “그래도 남자라면 군대는 가야지”라고 외쳤다.      


병역거부는 뜨거운 감자였다. 텔레비전 시사 토론 프로그램에서는 앞다투어 병역거부를 주제로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사법시험이나 대학 입시 논술 시험에서도 병역거부 이슈는 꼭 살펴봐야 할 기출 예상문제가 되었다. 소수의 인권활동가들과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병역거부자들의 권리를 옹호했지만 훨씬 많은 사람들이 병역거부자를 비난했다. 안보에 무임승차하는 비겁한 사람이라고, 남자답지 못한 겁쟁이라고 비난했다. 더러는 일부러 병역비리를 저지르는 권력층의 문제와 양심적 병역거부를 뒤섞어 병역거부에 대한 비난에 더욱 부채질을 해댔다. 하지만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먹구름이 다시 하늘을 가려도 한 번 본 푸른 하늘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오태양을 통해서 군대를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청년들 중에는 군대에 입대하는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들이 있었다. 유호근, 나동혁, 임치윤, 하나둘씩 오태양을 뒤이어 병역거부자들이 등장했다.      


처음 오태양을 만나고 병역거부 운동에 동참했을 때만 해도 내가 병역거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직접 만나본 오태양이라는 젊은이가 양심 때문에 감옥에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볼테르의 유명한 말처럼 누군가 자신의 양심 때문에 고초를 겪는다면 그의 편에서 같이 싸우겠다는 정도의 심정이었다. 병역거부를 하면 감옥에 갈 텐데 부모님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군대에 입대할 생각이나 계획 또한 없었다. 더 솔직하게는 군대 문제는 마냥 미뤄두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면서도 군대와 감옥 중에 선택하라면, 감옥을 선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생각을 할 때마다 군대에 가야 할 이유가 하나씩 줄어들었고 그렇게 천천히 조금씩 나는 병역거부를 하기로 마음먹어 갔다.           


평화활동가들, 병역거부자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나는 병역거부자가 되어 갔다. 2004년 병역거부자의 날 캠페인 사진.





《장애학의 도전》《밀양을 살다》《다시, 쓰는, 세계》를 낸 오월의봄 출판사에서 병역거부를 주제로 에세이 형식의 책을 내기로 했습니다. 《성서와 동성애》《임신중단의 권리》가 포함되어 있는 오봄문고 시리즈로 나올 예정입니다. 이 매거진에서는 오월의봄에서 출간할 《병역거부의 질문들(가제)》에 들어갈 글을 미리 써보려고 합니다. 물론 책으로 나올 때는 사뭇 달라지겠지만, 한번 써봐야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와 할 수 없는 이야기, 부족한 이야기와 넘치는 이야기를 알아챌 수 있을 테니까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