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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Jan 06. 2021

5.18 당시 시민들이 총을 든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병역거부자를 공격하기 위한 질문에 대답하기까지 


병역거부를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나는 평화운동이나 반군사주의 운동에 대해 전혀 몰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건 내 학생운동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우리는 아무 말이나 거침없이 했다. 징병제를 폐지하라는 주장과 대체복무제를 도입하라는 주장을 동시에 했다. 물론 두 가지 주장을 동시에 해서 안 될 것은 없지만, 정부가 혹 우리의 주장을 수용하더라도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는 없다. 대체복무제가 징병제를 전제로 한 제도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군대를 비판하는 말은 아무 말이나 했던 것이다. 깊은 고민 없이 거칠기만 한 것은 우리나 한국사회나 다를 바 없었다. 병역거부가 한국 사회 뜨거운 쟁점이 되었지만 아직 한국사회는 병역거부자들에게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양심도, 평화도 아직은 너무나 낯 설은 단어들이었다. 질문을 가장한 공격만 난무했고 우리는 뜬구름 잡는 대답만 늘어놓았다.   

   

당시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이런 거였다. “강도가 너의 집에 침입해 네 여동생을 강간하려고 한다. 네 옆에는 칼이 있다. 너는 그 칼을 강도에게 휘둘러 강도를 제압할 것인가?” 인터넷 게시판이나 저잣거리에서 저런 질문을 받는다면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넘어갔을 텐데, 재판정에서 판검사들도 이런 질문을 병역거부자들에게 해댔다. 이건 질문이 아니라 함정이고 공격이었다.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칼을 휘둘러 강도를 제압하겠다고 대답하면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이 어떻게 평화주의자냐고 반문하고, 반대로 그런 상황에서도 칼을 휘두르지 않겠다고 대답하면 여동생이 강간당하는 걸 무기력하게 방조한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재판 중에 이러한 질문을 받은 2000년대 초반 여호와의증인 병역거부자들은 분명 당황했을 것이다. 대한민국 재판부의 질문 수준이 이토록 처참하다는 것에 당황스러움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사실 이 질문은 대답할 필요가 없다.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을 일이기 때문이다. 하필 강도가 우리 집에 들어왔는데, 여동생을 강간까지 하려고 하고, 때마침 내 옆에는 강도를 제압할 수 있는 무기가 있는 상황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나는 한 번도 들어보질 못했다.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내 여동생이 사실은 유도 금메달리스트여서 강간을 시도하는 강도를 간단하게 제압해버리는 일만큼이나 현실성 없는 일이다. 이렇게 비현실적인 상황을 무리해서 짜낸 것은 병역거부자가 선택할 수 없는 결정만을 선택지에 남기기 위해서다. 그래야 병역거부자의 양심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검사와 판사들이 양심을 검증한다면서 양심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질문을 던진 것이다.      


병역거부에 대해, 양심에 대해, 비폭력과 평화에 대해 모르는 건 병역거부를 하겠다고 나선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내가 속한 학생운동 그룹은 방학 때마다 학번별로 꽤 긴 합숙 워크숍을 진행했는데, 내가 속한 학번에서 한 번은 병역거부에 대해 길게 토론한 적이 있었다. 우리가 우리에게 스스로 던진 질문은 이런 거였다. “만약 1980년 5월 광주에 있었다면 우리는 시민군에 참여해서 총을 들었을까? 아니면 병역거부자니까 총 들기를 거부했을까?” 우리 중 누구도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한 채 긴 침묵이 이어졌다. 누군가 침묵을 깨고 말을 이어갔지만 내 기억에 그 토론에서 만족할 만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던 거 같다. 


이 질문이 우리에게 난제였던 것은 당시 우리는 사회운동과 폭력이 뗄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혁명은 당연히 무장투쟁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혁명까지 가지 않더라도 투쟁에는 폭력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선배들은 “노동자들이 권력을 갖게 되는 순간에는 자본가들이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폭력을 행사할 텐데 그럼 우리도 노동자의 군대로 맞서 싸워 이겨야 하지 않겠어?”와 같은 말을 쉽게 했고, 후배들은 별다른 이견을 내지 않고 그대로 흡수했다. 한국 사회운동이 대체로 그랬다. 거리 집회에 나서면 마지막에는 전의경들과 충돌을 해야만 제대로 투쟁했다고 여겼고, 비폭력은 나약함이나 비겁함 혹은 무기력과 같은 단어와 함께 쓰였다. 나 또한 힘도 약하고 싸움도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정서적으로 폭력 혁명에 대해 낭만적인 환상을 갖고 있었다. 당시 즐겨 읽던 김수영의 시구처럼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혁명가로서 총을 들어야만 했고, 병역거부자로서 총을 거부해야만 했다. 총을 들지 않겠다고 하면 그동안의 생각이 통째로 부정당하는 것 같고, 총을 들고 시민군에 참여하겠다고 하면 병역거부자라고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재미있는 건 우리가 20여 년 전에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을 이제는 검사들이 병역거부자에게 던진다는 것이다. 병역거부자 오경택은 2019년 열린 항소심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5.18 당시 광주 시민들이 총을 들었던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피고인이 그 당시 광주에 갔다면 총을 들지 않았을까요?”와 같은 질문을 들어야만 했다. 병역거부자 시우는 2020년 진행된 항소심 재판에서 “군사력에 불균형이 발생하여 일본군 위안부 피해가 발생한 것 아닌가요” “피고인은 일본군이 성 노예를 삼기 위해 피고인의 지인 여성들을 데려갈 경우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요”와 같은 검사의 서면 질문지를 마주했다. 강도가 들어와서 여동생을 강간하는 질문보다는 한 발짝 진보했다고 볼 수도 있다. 어쨌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질문을 한 것이니까. 하지만 여전히 다양한 가능성을 배제한 채 병역거부자의 양심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양심의 부존재를 입증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똑같은, 질문을 가장한 공격일 뿐이다.      


병역거부 운동 20년 동안 양심에 대한 인식이 제자리에 머문 검사와 다르게 병역거부자들은 정말 많은 공부와 고민을 했다. 평화주의에 대해, 비폭력 운동에 대해, 반군사주의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공부했고, 실천했다. 평택 대추리에서, 제주 강정마을에서 군사기지가 들어서고 주민들이 쫓겨나는 것에 철저하게 비폭력을 원칙 삼아 맞서 싸웠다. 침략 전쟁에 한국군이 파병되는 것을 반대하고 한국산 무기가 다른 나라에서 사람들을 죽이는 일에 쓰이는 것을 막아섰다. 몸으로 머리로 공부를 한 셈이다. 그동안 우리에겐 평화의 언어가 생겼고, 비폭력의 철학이 생겼다. 그리고 이 길을 함께 걸어갈 동료들이 생겼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 힘이 되는 일이다. 덕분에 이제 나는 병역거부자의 양심을 훼손하기 위한 공격성 질문에도 당황하거나 난감하지 않다. 여유 있게, 때로는 농담도 섞어 가면서 답할 수 있다.   

       




검사의 질문에 대한 가상 답변(이 질문들은 실제로 병역거부자들이 재판에서 마주한 질문들 가운데서 뽑은 것입니다.)     


Q 피고인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이 존재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A 한국군 '위안부'가 존재하게 된 이유와 같은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전쟁과 군대가 여성을 착취하기 때문이죠.      

Q 군사력에 불균형이 발생하여 일본군 위안부 피해가 발생한 것 아닌가요

A 네 아닙니다. 군사력이 강한 군대든, 약한 군대든 다양한 형태의 '위안소'를 운영합니다. 나치 독일도, 독일과 맞서 싸운 미국과 영국 연합군도 '위안소'를 상시적으로 운영하거나, 점령지의 여성을 강간하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여성들을 성적으로 착취했습니다. 군사력이 약해서 '위안부'가 발생하는 게 아니라 군사력을 국가 통제하지 않거나 통제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Q 피고인은 일본군이 성 노예를 삼기 위해 피고인의 지인 여성들을 데려갈 경우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요

A 우선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평화운동을 열심히 할 겁니다. 그런데도 우리 힘이 부족해 전쟁을 막지 못했고, 어느 나라든지 간에 군대가 쳐들어와서 지인을 강제로 끌고 가려한다면 제 목숨을 걸고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저항할 겁니다.  

    

Q 군대는 누군가를 침략하기 위해 필요한 것뿐만 아니라 그 침략으로부터 나와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닌가요

A 침략과 방어는 같은 말입니다. 조지 부시는 미국민을 방어하기 위해 이라크를 침략했습니다. 누군가의 방어가 다른 이에게 침략이 된다면 우리는 침략과 방어의 이분법으로 전쟁을 바라봐서는 평화에 다다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Q 피고인이 주장하는 평화 방법으로 제2의 위안부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나요

A 발생하겠죠. 병역거부만으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정도로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병역거부자를 처벌하는 사회와 더 많은 사람들이 병역거부를 하는 사회는 '위안부'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굉장히 다를 것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Q 칼을 든 강도가 집에 침입해서 여동생을 강간하려고 하는데, 당신 옆에 총이 있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A1 한국은 총기 소지가 허용된 국가가 아닙니다.

A2 검사님은 강도 막자고 집에다 사드 배치할 건가요? 어벤저스 고용할 건가요?

A3 강간범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 강간문화가 만연한 사회를 만든 책임을 묻겠습니다. 특히 그동안 온갖 강간범들에게 솜방망이 처벌로 일관해온 법원에 먼저 묻고 싶습니다. 병역거부자한테 1년 6개월 구형하고 선고하면서 강간범은 초범이라고 반성한다고 벌금 고작 몇 백 구형하고 선고한 사법부가 큰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총을 들고 계엄군과 싸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A 맨부커상을 받은 한강이 쓴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소설 『소년이 온다』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답하겠습니다.     


아니요, 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소년이 온다』 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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