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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Feb 25. 2021

일희는 하더라도 일비는 하지 않겠다

마음의 굳은살

(사진 출저는 전쟁없는세상 홈페이지)


발레리나와 마라토너의 울퉁불퉁한 발

기타리스트의 딱딱한 손끝

목수와 농부의 두툼한 손바닥



굳은살은 반복적인 훈련과 경험의 흔적이며 세월이 담긴 노동의 훈장이다. 


그렇다면 활동가들의 굳은살은 어디에 박일까. 내 생각에 활동가들의 굳은살은 마음에 박인다. 차별받는 이들의 곁에 서있는 인권활동가의 마음에, 죽고 다치고 쫓겨나는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노동운동가들의 마음에 두툼하고 투박한 굳은살이 박여있을 것이다. 우리들에게 굳은살은 노동의 훈장인 동시에 반복되는 경험에서 체득한, 마음을 다치지 않기 위한 갑옷일지도 모르겠다. 


병역거부 운동의 경우, 병역거부자들을 감옥에 보내는 일을 반복하면서 마음에 굳은살이 박인다. 무뎌지지 않으면 못 버틸 거다. 속상해서 어떻게 버티나.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주 속상한 일만은 아니다. 내 생각에, 그리고 내가 일하는 전쟁없는세상이 생각하는 병역거부는 시민불복종이다. 일부러 법을 어겨 처벌받으면서 법과 제도의 모순과 폭력을 드러내는 방식이 시민불복종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병역거부를 하고 감옥에 가는 일은 운동의 실패가 아니라 과정이다. 전쟁과 징병제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병역거부자들이 감옥에 가는 일이 꼭 속상하기만 한 일이 아니다. 감옥에 가면서도 군대와 전쟁의 폭력성을 드러내지 못했다면 그것이 속상한 일이어야 한다. 


그렇더라도 감옥에 가야 하는 당사자를 생각하면 막상 마음이 좋진 않다. 오늘(2월 25일) 대법원에서 병역거부자 홍정훈, 오경택에게 사실상 유죄를 선고하는 판결을 내렸다. 둘은 조만간 감옥에 가야 한다. 차라리 예전이었다면, 모든 병역거부자들이 감옥에 가던 시절이었다면, 유죄 선고받고 감옥에 갈지언정 진정한 양심이 없다느니, 병역거부의 사유가 되지 못한다느니와 같은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었다면 덜 속상했을 것이다. 갑작스레, 일상을 정리하고 감옥에 가야 하는 일이란, 결코 누구에게도 유쾌할 수가 없다. 


어제는 대체역심사위원회에서 비종교적 병역거부자가 처음으로 심사를 통과한 일이 기사회 되었다. 엄청나게 의미 있는 일이다. 그리고 오늘은 평화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자 두 명에게 대법원이 유죄를 선고했다. 반대로 엄청나게 퇴행적인 의미를 가진 일이다. 좋은 일로도 좋지 않은 일로도 기자들에게 정말 많은 전화를 받았고, 나는 했던 말을 수차례 반복했다. 한 번은 기뻐서, 한 번은 짜증이 난 채로. 


기자들과 통화가 끝난 뒤에는 논평을 썼다. 법원 판결에 대해 논평을 쓰는 일은 급하게 이루어진다. 법원의 판결이 어떻게 나올지를 확실하게 예측할 수 없으니 미리 준비할 수 없고, 판결이 나오고 최단 시간에 나와야 그나마 주목받을 수 있다. 시간이 촉박할 때 특히 이런 일로 논평을 쓰는 일은 참 어렵다. 마음에는 화가 가득한데 화에 잠식당하지 않은 글을 써야만 한다. 단체의 논평이 화를 내고 있으면 그 논평을 읽는 사람들은 오히려 화를 내기 어렵다. 내가 얼마나 화났는지를 뽐낼 게 아니라, 이 상황을 보고 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화가 일도록 하는 논평을 써야 한다. 감정의 자리를 비워두지만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글을 쓰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렇지만 잘쓰고 싶다. 


어제오늘 수십건의 기사가 쏟아져나왔다. 이제 좀 더 깊게 이 문제를 들여다보는 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판결에 대한 심도 깊은 취재 기사를 써줄 언론사도 컨택했다. 좋은 일들의 영향력을 유지해가는 것도, 안 좋은 일에서 좋은 결과를 도출해내는 기획을 하는 것 모두 활동가의 역할이다. 


나는 일희는 하더라도 일비는 하지 않을 거다. 내 마음에도 굳은살이 박여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굳은살이 노동의 훈장이어서 때로는 자랑스럽고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해주는 보호막이어서 때로는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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