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수감자의 날 행사 후기
난 어지간해서는 일이 많다고 스트레스 받거나 짜증이 나지는 않는다. 완벽주의자 스타일도 아니고, 전쟁없는세상이 그렇게 스트레스 받을 정도로 일을 많이 기획하는 단체가 아니다. 그런데 지난주는 좀 짜증이 차올랐다.
평화수감자의 날 행사가 금요일날 잡혀있었고, 수요일에는 다양성연구소와 함께 기획한 영상 촬영이 예정되어 있었다. 화요일에 <병역거부 교안>을 발행하기로 했고, 그러기 위해 월요일엔 교안 마지막 검토를 해야 했다. 그러다 이사 날짜가 12월 1일로 잡히면서 월요일은 이삿짐 싸고, 화요일은 이사를 하게 되었다. 마침 그 전 주에 병역거부자 무죄판결이 나면서 월요일부터 기자들에게 인터뷰 요청 전화와 메일이 오기 시작했다. 오마이뉴스에서는 무죄 판결의 의미에 대해 기사를 써달라고 요청이 왔고, 미련하게도 난 그걸 알겠다고 대답해버렸다. 아 맞다, 11월 통장을 정리해서 회계사무소에 보내야 하는 일도 서둘러야 했다. 일의 양도 양이지만 너무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해야 하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결국 가장 늦은 금요일 저녁 행사인 평화수감자의 날 행사 준비가 뒤로 밀렸다.
믿는 구석은 있었다. 믿는 구석이 없었다면 사람들 불러 모아 하는 행사를 시작 몇 시간 전까지 프로그램도 확정하지 않고 있을 순 없었을 것이다. 평화수감자의 날 행사는 2003년부터 해마다 꾸준히 해온 행사이고, 참가 신청자들 또한 대부분 평화수감자의 날 행사를 여러 차례 참여해본 경험자들이었다. 게다가 몇 년 전부터는 평화수감자들에게 편지 쓰면서 약간은 송년회처럼 진행하는 콘셉트를 반복했기 때문에 진행팀이나 참가자들 모두 익숙한 행사였다.
하지만 코로나로 오프라인 행사를 못하게 되면서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오프라인 장소 예약한 곳을 취소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기껏 준비한 프로그램을 온라인용으로 다시 짜야만 했다. 한 명이 강의를 하는 방식이면 준비가 오히려 쉬웠겠지만 평화수감자의 날의 성격상 참여형 프로그램으로 기획해야 했다. 평화수감자들을 소개하고, 미리 부탁해서 받은 평화수감자들의 편지를 낭독하고, 평화수감자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 메인 프로그램인데, 앞의 두 개는 온라인에서 구현하는 게 어렵진 않다. 하지만 온라인 모임으로 진행했을 때 과연 어떻게 참가자들이 편지를 쓰게 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손편지를 쓰라고 하면 직접 보내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온라인 서신은 분량이 제법 되는데 개인적인 친분이 없는 수감자들에게 긴 편지를 쓰긴 부담스럽지 않을까?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전쟁없는세상 운영위원들, 병역거부팀원들, 사무국원들과 의견을 나누면서 하나씩 프로그램 표를 채워갔다. 아이디어를 내고, 아디이어에 대한 의견과 조언을 취합해서 수정하고, 수정안에 대한 의견을 받아 또 수정하기를 반복했다. 각자가 자신의 경험에 기반해서 부족한 점을 찾고, 대안을 제시했다. 그렇게 해서 다음과 같은 프로그램이 세팅되었다.
참가자들끼리 인사나누기(소그룹)
평화수감자의 날 소개
수감자(송상윤, 송강호) 편지 낭독
삼행시 짓기(소그룹)
삼행시 발표
편지 쓰기
프로그램에 따라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들이 역할을 나눠 맡았다.
전체 사회는 김형수(이하 모두 존칭 생략)가 맡았다. 어쩐지 전쟁없는세상 대표를 맡고 나서 더욱 열심이다. 전없세 대표는 아무런 권한도 없고 그저 서류상 대표일 뿐인데도 말이다. 이제 전쟁없는세상 행사에서 김형수가 사회를 보는 장면은 아주 익숙한 장면이 되었고, 그만큼 사회 실력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빡빡한 느낌 없이 편안하게 진행하면서도 오디오 공백을 용납하지 않았다. 비록 온라인이라서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모두들 편안한 마음으로 행사에 몰입할 수는 따스한 진행 솜씨를 뽐냈다.
평화수감자의 날 소개는 여옥이 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여옥에게 맡긴 걸 후회했다. 너무나 정성스레 준비한 PPT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발표를 위해 여옥이 또 지난밤을 지새울 거라는 걸, 행사 당일날 점심을 거를 거라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한 나를 스스로 질책했다. 물론 퀄리티 높은 발표가 참가자들에게 만족감을 선사했겠지만, 중요성을 따지면 안 그래도 요즘 과로에 시달리는 여옥의 건강을 해치면서 준비해야 할 내용은 아니었다. 여옥의 성격을 알면서 여옥한테 부탁한 내 무심함을 또 한 번 반성했다. 여옥이 만든 PPT는 두고두고 해마다 평화수감자의 날 때 써먹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편지 낭독은 시우와 아침이 해주었다. 시우는 병역거부 수감자 송상윤의 편지를, 아침은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철조망을 끊고 구럼비에 들어간 죄로 구속된 송강호의 편지를 읽었다. 편지 낭독 때 내 컴퓨터 유튜브를 전체공유 하는 방식으로 배경음악을 깔았는데, 낭독자들이 낭독할 때마다 음악이 끊겨서 그냥 음악을 끄고 낭독했다. 소리는 공간의 울림으로 전달되는 바, 아무래도 편지 낭독은 오프라인에서 참가자들에 전해지는 감정선이 온라인에서는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라이브 공연의 감동을 CD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처럼.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이번 편지 낭독은 무언가 마음을 울리는 지점이 있었다. 내용이 특별할 건 없었는데, 그게 뭘까.
자기소개와 삼행시 짓기는 전쟁없는세상의 운영위원(오리, 쭈야, 뭉치, 가람, 열쭝)과 병역거부팀원(조은, 악희, 우공)이 맡아줬다. 나는 옵저버로 여러 소그룹들을 돌아다니면서 상황을 체크했다. 전쟁없는세상 행사 참가자는 대체로 80% 정도는 전없세를 잘 알고 오랫동안 함께 해온 이들, 그리고 20%는 처음 왔거나 아직은 어색한 이들로 구성된다. 이럴 경우 진행자는 좀 애매해지는데 80%에 맞춰 진행하면 20%는 소외되고, 20%에 맞춰 진행하면 80%는 재미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미 십수 년을 알아온 사이에 자기소개하고 있으면 뻘쭘하고, 그렇다고 소개를 뛰어넘고 다른 이야기를 하면 처음 온 사람들은 말할 수 있는 게 없다. 이런 우려를 진행자들은 그저 우려로 만들어주었다. 소그룹으로 나뉘었다 다시 전체로 모이면서도 집중력이 흩어지지 않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지속할 수 있었던 데 소그룹 진행자들의 역할이 컸다.
편지 쓰기는 가장 걱정했던 프로그램인데 무사히(?) 마쳤다. 손편지 쓰기, 법무부 홈페이지에서 온라인 서신 쓰기, 그리고 패들릿이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해 즉석에서 실시간으로 메시지를 남기면 전쟁없는세상이 출력해서 보내주기. 이렇게 세 가지 방법을 안내하고 편지 쓰는 시간을 가졌다. 손편지와 온라인 서신은 꼭 행사 당일이 아니어도 가능한 일이라서, 아무래도 패들릿 게시판에 글을 남긴 사람이 많았다. 패들릿의 장점은 실시간으로 여러 명이 의견이나 메시지를 남기기 쉽다는 데 있다. 커다란 벽에 포스트잇을 써서 붙이는 걸 상상하면 된다. 게다가 온라인이라서 익명으로도 글을 남길 수 있는 게 정말 큰 장점이다. 송강호, 송상윤, 전쟁없는세상, 외국 평화수감자의 이름을 각각 적어놓으면 참여자들이 알아서 메시지를 남겨주었다.
온라인 행사에 과연 몇 명이나 올까 걱정했었는데, 높은 참가율을 보여주었다. 26명이 참가신청을 했는데 25명이 참여했다. 1시간 40분가량 진행됐는데, 참가자들 모두가 끝까지 열성적으로 참여했으면서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오프라인에서 서로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온라인으로 여러 행사를 해보는데, 과연 전쟁없는세상의 행사만큼 잘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비결이 무엇일까? 참가자들의 능동성과 프로그램 내에서 각자 역할을 맡은 이들이 자신이 맡은 바를 잘 수행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한 것은 두 가지 이유인데, 전쟁없는세상에서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활동하면서 쌓아온 서로에 대한 신뢰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높은 신뢰가 형성되어 있는 집단은 소통에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아도 된다. 또 하나는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들의 역량이다. 전쟁없는세상은 대부분의 프로그램을 참여형으로 기획한다. 한 명이 강연하거나 주도하는 방식보다는 소그룹으로 나눠서 토론하는 걸 좋아하고, 직접행동을 기획할 때도 참여하는 모두가 각자의 역할을 가질 수 있게 구성하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없는세상의 활동가들은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자신의 역할을 이해하고 수행하는 데 익숙하다. 그동안 꾸준히 활동하며 쌓아온 것이 코로나와 같은 특별한 상황에서 빛을 발하는 게 아닐까.
평화수감자의 날 행사를 치르면서, 새삼 함께 활동하는 동료들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이 평범하면서도 대단한 활동가들 덕분에 내가 좀 부족할 수 있고, 힘들 때는 게으름도 피울 수 있다.
편지 쓰기 할 때 들은 음악(여옥 추천곡) 같이 들어요. 서울시향이 코로나로 힘든 국민들을 위해 진행한 이벤트라고 합니다. 종현의 '하루의 끝'을 클래식으로 연주한 곡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