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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Mar 16. 2021

양심의 증거 자료를 수집하는 중입니다

요새 이상하게 피로감이 가시질 않는다. 어제는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바로 잠이 들었다. 새벽 3시에 깨서 책을 볼까 하다가 또 잤다. 결국 8시가 다 되어 일어났고 아침 수영은 쨌다. 푹 잤는데도 몸이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일을 하는데도 집중이 잘 안 된다. 이럴 땐 사무실에 다른 사람들이 있어야 그나마 일을 하게 되는데 오늘은 나 혼자 있는 날이라서 더더욱 일이 손에 안 잡힌다. 일하기 싫은 땐 혹은 일이 잘 안 되는 컨디션일 때는 나는 과감하게 딴짓을 한다. 책을 보거나, 인터넷에서 좋은 글을 찾아 읽거나, 블로그에 글을 쓴다. (물론 당장 해결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아무리 싫어도 그 일을 하지만 갑작스러운 일이 자주 발생하지는 않으니) 


방금 전까지 한 일은 전쟁없는세상 운영위원(이자 서류상 대표) 김형수의 활동 사진과 영상을 찾아서 정리하는 일. 형수씨는 지금 예비군 훈련 거부로 재판을 받고 있는데, 변호사가 형수씨의 활동 내용 정리해달라고 요청했고 정리해서 보낸 게 지난 주다. 오늘 갑자기 '기왕 보내는 거 사진과 영상 자료도 보내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변호사와 상의하여 시각 자료를 모으는 중이다. 


생각해보면 전쟁없는세상이 병역거부자들을 지원하는 일도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왔다. 처음에는 병역거부를 고민하기 전 상담을 해주는 일, 구속되기 전까지 경찰 조사와 재판 과정을 지원하는 일, 구속되고 나면 수감자 지원하는 일이 병역거부자 지원 업무였다. 그러던 것이 경찰 조사와 재판 과정을 지원하는 일은 점차 줄어들었다. 경찰과 재판부에서도 병역거부자들이 확신범이라 도주도, 증거인멸도 안 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는 것이 기본값이 되었고 변호사의 조력이 없어도 1년 6개월 실형 선고가 거의 확실했기 때문이다. 2010년대 중반 이후로는 무죄 선고를 하는 법원이 늘어나고, 더 많게는 재판 자체가 연기되면서 수감자 지원 업무도 많이 줄어들었다. 최근에도 수감자는 있지만 과거와 비교하면 수감자 지원 업무가 병역거부 캠페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확 줄어든 게 사실이다. 상담은 지속적으로 해왔지만 병역거부에 대한 정보를 찾기 쉬워지면서 전쟁없는세상을 찾아오는 비율이 줄어들었고, 병역거부를 고민하는 결이 달라지면서 상담의 내용도 조금은 달라졌다. 


그리고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 새로운 업무가 생겼다. 병역거부의 양심은 이제 법에서 보장하는 정당한 사유다. 다만 법원도 대체복무 심사위원회도 과연 병역거부자가 스스로 말하는 양심을 지녔는지는 판단한다.(어떤 경우에는 양심의 여부가 아니라 내용을 판단하려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명백히 잘못이다. 헌법재판소에서도 양심의 내용에 대한 가치판단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 바 있다) 내면의 소리인 양심을 정말로 가지고 있는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국가 기관들에서는 그 양심이 표출된 증거를 제출하라고 요구한다. 평화주의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했다면, 그 양심을 표출한 증거 내역을 제출하라는 것이다. 개인의 일기장이나 SNS에 쓴 글이든, 평화 이슈 관련한 집회나 기자회견에 참석한 사진이나 동영상이든 뭐든. 


그런 연유로 병역거부자들이 법원이나 심사위원회 제출용으로 전쟁없는세상에서 주최한 다양한 행사들에 참여한 증명서를 발급해달라는 요청을 해온다. 몇 장의 사진과 동영상으로 복잡하고 맥락적인 양심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리고 재판부에 따라서는 이런 증거자료를 잘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얼마 전에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유죄가 확정되어 구속된 홍정훈이나 오경택의 경우 평화활동 자료가 적어서 유죄가 된 것이 아니다. 김형수도 예비군 훈련 거부로 받은 여러 건의 재판에서 모두 유죄를 선고받았었다. 전쟁없는세상에서 병역거부 활동에 가장 열심히 참여하는 사람조차도 '평화주의 양심'을 증명하는 자료로는 부족하다는데,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병역거부자들의 요청이니 군말 않고 자료를 찾아 정리해서 보내준다. 게다가 형수씨는 전쟁없는세상 운영위원을 함께 하는 동료가 아닌가. 기자회견이나 행사에서 사회를 보거나, 발언을 하거나, 퍼포먼스를 하는 사진이나 영상이 제법 많다. 이렇게까지 증거 자료 모아서 냈는데, 이번에는 변호사도 선임해서 적극적으로 피고인의 권리를 행사하는데, 그런데도 이번에도 유죄가 선고된다면 좀 화가 날 것 같다. 


니들이 뭔데 우리의 양심을 판단해!   

아니, 전쟁없는세상 활동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도 병역거부자 아니라고 하면 대체 누가 병역거부자야!


이런 말을 서부지법 앞에 가서 적절한 욕과 함께 쏟아낼 것이다. 


(정리 중인 사진 자료 중 극히 일부를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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