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검찰 개혁이 어떠해야 한다고 논할 깜냥이 되지 못한다. 병역거부운동을 하면서 보통의 한국 시민들보다야 재판도 많이 겪어봤고 검사들과도 마주할 일이 많았지만, 나는 사법체계를 잘 모른다. 법정에서 쓰는 용어는 프로그래머나 의사들의 용어처럼 여전히 낯설고 법의 논리와 문법이 때로는 수긍이 가지 않기도 한다. 그러니 이 글은 검찰개혁에 대한 정밀한 비평은 아니다. 다만 내가 직간접적으로 겪은 검찰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글이고, 검찰개혁이라는 게 이런 방향은 포함할 수 없는 건가 싶은 생각을 정리해본 것이다.
정부와 여당이 제기하는 검찰의 문제는 이를테면 검찰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수사권을 남용한다는 것이다. 조국 전 장관에 대한 판단과 별개로 확실히 먼지가 날 때까지 개인을 탈탈 터는 검찰의 모습에 대해서는 나 또한 비판적이다. 하지만 이런 정치검찰의 모습은 분명 문제지만, 보통의 사람들이 직접 겪는 문제는 아니다. 조국이나 검사들이나 우리에게는 저 세계의 사람들이다. 그런 면에서 정부 여당이 부르짖는 검찰 개혁이 사람들에게 자기들끼리의 권력다툼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정부와 여당은 보통 사람들이 피부로 체감하는 검찰의 문제를 검찰 개혁에서 잘 다루지 않는다. 검찰개혁이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이유 중에는 이런 것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이건 나의 가설이고, 사실 다른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검찰 개혁이 대대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예비군 훈련 거부자이자 전쟁없는세상 운영위원 김형수의 재판에서 마주한 검사의 질문과 대체복무 심사를 통과하고 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병역거부자 오수환의 사건에 대해 검사가 항소를 했다는 소식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병역거부자 재판에서 마주하는 검사들의 문제점들이 꼭 병역거부자들만 겪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체복무제가 도입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병역거부자가 재판을 받는 것이 의아할 수도 있다. 2018년 헌법재판소의 결정 전에 병역거부를 해서 기소가 된 사람들은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에도 재판을 받고 있는데 김형수와 오수환도 그런 케이스다.
정치인이나 재계의 거물 인사가 아니라 보통의 사람들이 재판에서 느끼는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판검사들이 재판받는 시민들의 고충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이는 꼭 검찰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고 판사들도 마찬가지다. 오늘 김형수는 예비군 훈련 거부의 어려움에 대해서 토로했는데, 경찰 조사와 검찰 조사 재판이 너무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일상생활이 어렵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물론 예비군 병역거부는 다른 형사사건에 비해 재판에 출석할 일이 훨씬 많다. 쟁점이 복잡해서가 아니라, 예비군 훈련이 일 년에 수 차례 있는데 그 그걸 거부하면 각각의 훈련 거부가 별개의 사건으로 기소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실형을 선고받아도 해당 훈련은 사라지지 않고 반복해서 훈련이 소집되고, 거부하면 또 재판을 받게 된다.
예비군 훈련 거부와 같은 예외적인 사건을 제외하더라도, 재판부는 재판에 출석해야 하는 시민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 재판을 참석하기 위해 없는 회사에 눈치 보며 부족한 휴가를 무리해서 내야 하는 노동자들, 하루 매출을 포기해야 하는 자영업자들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재판에 출석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을까 봐 노심초사하는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다. 그러니 피고인을 헛걸음하게 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홍성에 사는 김형수는 지난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홍성에서 애오개역에 위치한 서울 서부지법에 왔지만 재판부가 그날 한 일은 재판 일정을 연기하겠다는 통보였다. 그런 통보는 피고인을 재판정에 출석시키지 않고도 할 수 있다. 재판을 받다 보면 이런 어이없는 일이 생각보다 자주 일어난다. 앞 재판이 길어졌다고 피고인과 변호인에게 다시 한번 출석하라고 요청(사실상의 강요)을 하는 경우는 어떠한가.
왜 그럴까? 정확히는 모르지만, 심증은 있다. 검사들은 재판, 더 나아가서 구속 수사를 하나의 형벌처럼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재판을 받거나 검찰 수사를 받아본 사람들은 많이들 체감하는 바이다. 하지만 이는 무죄추정의 원칙에도 어긋난다. 보통 사람들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검사(와 판사)들의 특권 의식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검찰개혁 혹은 사법개혁이 이루어진다면 이런 특권의식이 사라지는 방향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피고인을 자기들 편의대로 오라 가라 할 수 없도록, 필요하지도 않은데 오게 한 뒤 기일만 변경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보완되기를 바란다.
정치 검사는 어쩌면 지나치게 열심인 검사들일지도 모른다. 영화 <더 킹>은 조인성이 연기한 박태수를 통해 권력지향적인 소수의 정치검사와 달리 대다수의 검사는 과도한 업무를 묵묵히 수행하는 공무원이라고 이야기한다. 내가 병역거부 재판에서 직간접적으로 겪은 대부분의 검사들은 대단한 야욕을 가진 정치검사는 아니었지만 묵묵하다못해 지나치게 사유하지 않는 이들이었다. 피고인의 삶을 적극적으로 읽어내려는 노력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격무에 시달리면 그런 건 가능하지 않겠지. 정의롭고 따듯한 검사는 그냥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만나도 이해한다. 하지만 병역거부 형사 재판의 핵심인 '양심'의 개념에 대해서도 사유하지 않는 검사들은 조금 세게 말하면 공무원의 직무유기처럼 느껴진다. 그나마 오늘 김형수를 심문한 검사의 경우 김형수가 제출한 자료는 무척 꼼꼼하게 읽었으나, 역시나 양심의 자유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사유하지 않는 검사였다.
내가 이렇게 판단하는 까닭은 검사들이 병역거부자들의 양심을 판별하겠다고 던지는 질문은 판에 박혀있기 때문이다. 병역거부자들이 처한 상황은 크게 다르고 병역거부자의 양심 또한 각각이 천차만별인데도 질문은 일관된다.
계엄군에 맞서 총을 든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의 행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
외국 군대가 쳐들어와서 우리 국민을 죽인대도 총을 들지 않을 것이냐?
강도가 너의 가족을 공격해도 반격하지 않을 것이냐?
대략 이런 질문이 조금씩 형태를 바꿔가며 등장한다. 가끔씩 창의적이고 문제적인 질문도 등장한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집회에 참석했다는 병역거부자에게) 우리나라 군사력이 약해서 위안부 문제가 생긴 게 아니냐?
일본군이 쳐들어와 너의 친구를 위안부로 잡아가도 저항하지 않을 것이냐?
(오늘 김형수 재판에서 검사가 던진 질문) 기독교 신앙이 병역거부 바탕이 되었다고 했는데, 강정마을에서 108배를 함께 했다고도 했는데, 그건 불교 의례 아닌가?
이런 질문들은 병역거부자들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양심의 부존재(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려는 시도로 사실상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반헌법적인 방식이다. 사실 내가 문제라고 느끼는 것은 이 질문들이 가진 악의적인 공격성 때문이 아니다. 이 검사들은 비상하게 악랄한 느낌보다는 생각이 없는 무능한 느낌에 가깝다. 이들의 질문에는 '양심'에 대한 이해가 없고, '양심'에 대한 사유의 흔적이 없다. 이들이 과연 헌법상의 양심의 자유에 대해 한 번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싶은 의구심도 든다.
헌법재판소에서도 밝힌 바, 양심은 일상생활에서는 공기처럼 너무 당연해서 느끼지 못하다가 그것이 침해당하는 순간 인지하기 마련인데, 사회의 보편적인 통념에서 어긋나지 않는 경우 양심은 침해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의 자유는 그 성격상 소수자의 권리이고, 양심이라는 것도 상황과 맥락의 구체성에 따라 발현되는 가변적인 것이다. 결국 병역거부자들의 양심을 들여다보려면 각각의 병역거부자들의 삶이라는 맥락에서 이를 읽어내야 하는데, 검사들은 그런 의지도 노력도 없다. 그저 구시대의 기계처럼 똑같은 질문만 반복할 뿐이다. 심지어 FPS 게임의 플레이 여부는 거의 모든 재판부에서 병역거부자의 양심을 판단하는 적절한 수단이 아니라고 밝히는 상황에서도 검사들은 병역거부자들에게 게임 내역을 제출할 것을 반복적으로 요구한다. 만약 그 검사들이 생각하는 존재였다면, 병역거부자를 처벌하기 위해 다른 논리를 개발했을 것이다.
무죄 선고를 받은 오수환 사건을 항소한 검사는 어떠한가? 아직 검사의 항소이유서(검사가 내는 것도 항소이유서라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를 보지 못해서 어떤 이유로 항소를 했는지는 모르겠다. 물론 검사 또한 항소할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이 검사는 과연 이 사건의 항소의 타당성에 대해서 심각하고 진지하게 고민해봤을까? 대체역 심사위원회와 법원, 두 국가기관의 판단이 현저히 잘못되었다고 판단할 만한 확실한 근거가 있었을까? 나는 이 검사가 오수환을 괴롭히겠다는 그런 악의를 가지고 항소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무 생각없이 습관적으로 항소를 했을 거라고 추측한다. 검사들은 자신의 구형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대체로 습관적으로 항소하는 경향이 있다. 피고인의 항소와 상고와 검사의 항소와 상고는 다르다. 피고인의 그것은 방어권의 행사지만 검사는 자신을 방어하는 게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습관적 항소는 실질적으로는 피고인을 괴롭히는 일이고, 불필요한 재판으로 세금을 축내는 일이다.
생각하지 않고, 사유하지 않는 검사들의 폐해는 고스란히 시민들에게 전가된다. 꼭 양심의 자유를 다루는 재판이 아니더라도, 생각하지 않고 사유하지 않는 검사들이 시민들의 삶의 맥락을 읽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법 앞에서 만 명만 평등한 일이 버젓이 반복되는 게 아닐까. 검찰개혁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검사들이 시민들의 삶의 맥락을 읽어낼 수 있는 사유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일이면 좋겠다. 브레히트의 시 <민주적인 판사>에 등장하는 법조인을 바란다면 너무나 큰 기대일까?
민주적인 판사
베르톨트 브레히트 시 (1943년)
미합중국의 시민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심사하는 로스엔젤레스의 판사 앞에
이탈리아 식당주인도 왔다. 진지하게 준비해 왔지만
유감스럽게도 새 언어를 모르는 장애 때문에 시험에서
수정헌법 제8조의 의미를 묻는 질문을 받고
머뭇거리다가 1492년이라고 대답했다.
시민권신청자에게는 국어에 대한 지식이 법으로 규정되어 있으므로
그의 신청은 기각되었다. 3개월 뒤에
더 공부를 해가지고 다시 왔으나
물론 새 언어를 모르는 장애는 여전했다.
이번에는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은 누구였는가 하는
질문이 주어졌는데, (큰 소리로 상냥하게 나온) 그의 대답은
1492년이었다. 다시 각하되어
세 번째로 다시 왔을 때, 대통령은 몇 년마다 뽑느냐는
세 번째 질문에 대하여 그는
또 1492년이라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판사도 그가 마음에 들었고 그가 새 언어를
배울 수 없음을 알아차렸다.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조회해 본 결과
노동을 하면서 어렵게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가 네 번째로 나타났을 때 판사는 그에게
언제
아메리카가 발견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리하여. 1492년이라는 그의 정확한 대답을 근거로 하여
그는 마침내 시민권을 획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