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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Mar 31. 2021

아무튼, 후드티

짧은 리뷰


책을 왜 읽을까? 일 때문에 읽는 책들은 필요한 정보를 얻거나 사유의 고리를 발견하려고 읽는다. 그나마 책 읽기를 좋아하니 견딜만하지만 이런 책 읽기는 솔직히 지치고 힘들다. 다 읽고 나면 그만큼 뿌듯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다. 이런 독서는 내게 참고 견디는 일이다.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 편하게 읽는 책들은 주로 내게 재미를 주는 책들이다. 재미의 종류는 너무 다양해 하나로 말할 순 없다. 다양한 재미 중에 하나를 꼽아보자면, 나는 책을 통해 타인의 삶을 엿보는 것이 무척 재밌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고 사는지 그 일은 어떻게 하는지, 삶에서 일과 일 아닌 것은 어떻게 구분되고 연결되는지, 힘들 때는 어떻게 견디며 누구와 견디는지, 세상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이런 것들이 알고 싶고, 이런 이야기들이 재밌다.


그래서인지 직업인들이 자신의 일에 대해 쓴 에세이를 좋아한다. 음악가 김목인이 쓴  <직업으로서의 음악가>를 재밌게 읽었고, 법의학자 유성호가 쓴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는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나 앉은자리에서 후다닥 읽어 내려갔다. 미술보존가 김은희가 쓴 <예술가의 손끝에서 과학자의 손길로>는 읽고 싶어서 찜 해놓았다.


어떤 에세이들은 '일과 삶'보다는 '삶과 사유'를 보여주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서경식의 묵직한 에세이들은 서경식이 하는 일보다는 시대를 살아가는 경계인의 경험과 고뇌를 보여준다. 뭐 어느 쪽이든 삶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나는 에세이가 좋다.  


<아무튼, 후드티>는 기본적으로 '일과 삶'을 보여주는 것에 무게를 실은 채로 '삶과 사유'도 간간히 보여주는 에세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짜는 개발자가 하는 일은 무엇이며 이들의 일터는 어떤지, 사회 변화를 위한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캠페이너의 경험은 또 어떠한지, 한 아이의 엄마가 아이와 함께 사는 모습과 만화와 게임 덕후들은 어떻게 취미를 향유하는지 보여준다. 후드티는 개발자(이자 노동자), 캠페이너, 엄마, 페미니스트, 덕후와 같은 각각의 정체성을 교차하며 연결해 조경숙의 삶을 보여주는 일종의 만화경 같은 역할을 한다. 후드티라는 만화경을 눈에 대고 저자의 삶을 보면 그 안의 여러 가지 정체성들이 따로 또 같이 보이는 셈이다. 퍽 재밌는 만화경이다.


좀 더 근본적인 질문. 타인의 삶이 왜 궁금할까?


결국엔 타인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기 때문이 아닐까. 좋은 에세이일수록 자신의 삶을 더 깊게 들여다보게 해 준다고 생각한다. 조지 오웰이나 박완서처럼 유명하고 탁월한 작가들의 에세이는 말할 것도 없고, 좀 덜 유명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쓴 에세이 가운데도 내 삶을 깊고 웅숭하게 돌아보게 하는 보석 같은 책들이 많다. <아무튼, 후드티>도 그렇다.


게임과 만화 속에서만 한 세계의 일원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청소년 시절, IT회사 여성 노동자의 경험, 주로 어딘가에 속하지 않은 채 사회 변화를 도모한 페미니스트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몸과 젠더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에 비추어 내 삶을 돌아본다. 여러모로 나와는 다른 결이다.


나는 청소년 때도, 대학생 때도, 사회생활을 할 때도 늘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었고, 그 집단에서 잘 드러나는 존재였다. 대학 때는 학생회 활동과 온갖 소모임, 학생 운동으로 아르바이트할 시간조차 없었고,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는 줄곧 전쟁없는세상의 멤버였다. 사회 변화는 내게는 늘 뜻 맞는 동료들과 함께 도모하는 일이었다. 그나마 가장 소외된 채 존재했던 첫 출판사 시절에도 나는 노동조합에 속해 있었고, 분회장까지 했으니 꽤나 잘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꽤 오랫동안 나는 나의 이런 궤적이 그저 나의 개인적인 성향과 노력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노력하지 않는 이들을 좋게 보지 않았다. 전학 온 나도 이렇게 잘 어울리는데 친구들과 어울리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채 게임에만 몰두하던 같은 반 급우를, 과 행사에 도통 참여하지 않으려 드는 동기나 후배를 이해하지 못했다. 때로는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늘 조직의 중심부에 속해 있는 내 위치를 자랑스러워하거나 대단한 성취라고 여겼다.


물론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며 외향적인 개인적인 내 성향도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성향 뒤에서 작동하던 사회 구조를 감지하지 못했다.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모든 사람이 늘 어딘가에 속하는 건 아니다. 외향적인 사람이라도 조직과 사회에서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늘 어딘가에 적극적으로 속해 있고, 그 안에서 잘 드러나는 존재일 수 있던 것은 내 성격에 더해서 내가 남성이기 때문에, 이성애자기 때문에, 비장애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성인 것, 이성애지인 것, 비장애인인 것은 내 노력으로 된 것은 아니다. 나는 내 노력이 아닌 것으로 얻은 것을 성취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세상은 조직에 잘 속하는 사람, 잘 드러나는 사람에게 유리하다. 하지만 조직에 잘 속하는 것이, 잘 드러나는 것이 성취는 아니고, 그런 것들이 성취가 되는 사회는 곤란하다. 나는 성취가 아닌 것을 성취라고 여겼고, 그마저도 내 노력이 아닌 것을 내가 일궈낸 것이라고 여겼다.


아마도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저자 조경숙을 내가 어설프게 알기 때문인 거 같다. 한 번도 만나본 적은 없지만 페이스북에서 그의 글을 봐왔고, 한 번은 전쟁없는세상 블로그 글을 청탁해서 글을 받은 적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무척 좋았던 글이다.)  자세히는 몰라도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삶이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대충은 알고 있다고 여겼고 그 방향이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들여다보면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지향이 다르다는 게 아니라(그것도 다를 수도 있지만) 지향을 형성해온 삶의 궤적이 이토록 다를 줄이야. 역시 이런 건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 감각으로 겪는 게 다르다.


아무튼 나 나름으로는 동질성을 느꼈던 사람과 나 사이의 차이를 크게 발견한 거여서 무척 흥미롭게, 빠져들어서 책을 읽었다. 그리고 이 독서는 더 강렬하게 내 삶을 돌아보게 한 것 같다.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나와 같은 사람은 없다. 그것이 때로는 외로움의 근원이 되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또 누군가의 삶이 담긴 에세이를 읽는 것이 재밌을 수 있다. <아무튼, 후드티> 덕분에 며칠을 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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