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리뷰
김원영의 책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은 아직 읽지 않았지만 좋다는 이야기를 귀가 아프게 들었고 그가 쓴 신문 칼럼들을 감탄하면서 본 기억이 있다. 김초엽의 책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2019년에 읽은 책 중 단연 최고였다. 이후 젊은 여성 작가가 쓴 SF 소설을 몇 권 더 읽어봤지만 그런 감동을 느끼진 못했다. 그냥 명불허전, 김초엽이 발군이었다. 그런 두 작가가 함께 쓴 책이니 큰 기대를 하면서도, 대체로 이렇게 두 명의 작가가 서로 주고받은 이야기로 엮은 책이 늘 기대를 배반했던지라 이번에도 그럴까 봐 두려워하며 읽었다.
그래서 기대를 충족했는지 혹은 배반했는지 말하자면, 그렇게 말하면 안 될 거 같다. 이 책에 대해서는. 왜 그런지는 차차 이야기하기로 하고, 우선은 좋았던 점과 인상 깊은 지점을 정리해보고 싶다.
이 책이 가장 좋았던 것은 저자들이 자신의 '장애를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장애에서 길어 올린 사유를 보여주는 책'이라는 점이다. 장애 당사자들이 쓴 책은 보통은 자신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물론 그 이야기도 아주 중요한 이야기다. 그렇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기록으로서는 중요한 기록일 수 있어도 독자의 입장에서는 사유가 깊어지지 않으면서 경험만 반복되는 이야기는 좀 지루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이 책은 경험에 방범을 찍기보다는 '장애'에 대한 사유가 이야기의 큰 줄기다.
사유라고 하면 또 너무 큰 범위인데 이 책은 장애인의 몸과 보조기구(과학기술)가 맺는 관계와, 그 관계의 사회적인 의미와 맥락, 해석에 대한 두 저자의 생각을 보여준다. 두 사람의 나이, 젠더, 장애 차이를 본문에서는 크게 느끼지 못하다가 마지막 대담을 읽고 나니 두 사람의 차이가 보인다. 생각의 차이라기보다는 관심 분야의 차이. 김원영 작가는 존재론 혹은 사이보그의 미학적인 지점에 대해, 김초엽 작가는 장애학과 과학기술학이 만나는 지점에 대해 관심을 보인다. 물론 공통점도 있다. 두 사람 다 장애를 극복해야만 하는 무언가 혹은 치료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또한 반대로 의학과 과학이 장애와 맺는 사회적 관계의 중요성을 얕잡아 보지도 않는다.
특히 두 저자는 장애를 매끈하게 이어진 정상성의 세계의 틈새로 이해하고 있다. 정상과 비정상, 쓸모와 무쓸모 이렇게 둘로 나뉜 세상이 정상이라고 불리는 것도 이상하지만 아무튼 두 저자는 이분법으로 나뉜 세계에서 비정상과 무쓸모라는 낙인에 맞서면서도 장애인도 정상인이라고 주장하거나 쓸모있는 존재라고 역설하지 않는다. 대신 장애라는 틈새에서 새로운 세계를 디자인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앞서 이 책이 기대를 충족했는지 배반했는지, 그런 식으로 바라볼 수 없다고 한 이야기는 이 맥락에서다. 이분법의 세계의 매끈한 이음새(이 매끈함이 바로 폭력의 모양이다)에서 틈새를 모색하는 저자들인 만큼 그들의 작업에 대해서도 이분법으로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
가장 좋았던 점은 작가들의 태도다. 당사자 정체성은 사유에 고유성을 부여하고 적극적인 실천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당사자의 경험에 갇힌 나머지 교조적인 사고를 하거나 폐쇄성이 강화될 수도 있다. 그런데 두 작가는 자신의 고유한 경험에서 시작하지만 갇힌 사고를 하지 않는다. 어떤 하나의 사건을 대할 때도 옳고 그름으로 문제에 접근하려 하지 않고, 다양한 맥락과 서로 자른 존재들이 그 사건과 어떤 고유한 관계를 맺는지를 최대한 살핀다. 작가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이들의 태도와 사유 방식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큰 공부가 될 것이다.
그리고 가장 흥미로웠던 내용은 '크립crip'에 대한 이야기였다. 성소수자들이 '이상한'이라는 뜻의 '퀴어queer'라는 단어를 전유해 정상성 규범에 저항하는 퀴어 운동의 언어로 재탄생시킨 것처럼 많은 장애인들이 '불구자cripple' 혹은 '불구crip'이라는 단어를 기꺼이 선택해 비장애중심주의와 정상성 규범에 저항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병역거부자와 '겁쟁이'에 대해서 떠올렸다. 병역거부를 비난하는 여러 입장들 중에 병역거부자를 남성성이 결여된 자로 보는 이들은 병역거부자들을 겁쟁이라고 비난한다. 군대 대신 감옥을 택하는 이들을 겁쟁이라고 부르는 건 어림없는 짓이라고 대응하던 초창기 병역거부 운동을 지나, 겁쟁이인 것이 뭐가 나쁘냐고 묻는 병역거부자들이 등장했다. "그래 우리 겁쟁이야. 겁쟁이인 게 왜? 겁쟁이가 왜 나빠? 사람 죽이는 훈련 무서워서 못 받는 게 나쁜 거야?"라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초엽 작가는 '크립 테크노사이언스'라는 개념을 소개하는데, "기존의 주류 장애 기술이 주로 비장애인 전문가들에 의해서, 장애인을 '위해' 만들어진 기술"(186쪽)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등장한 개념이다. 햄라이와 프리츠가 제안하는 크립 테크노사이언스는 네 가지 원칙을 가진다.
1) 장애인을 지식인이자 제작자로서 중심에 둔다.
2) 통합이 아닌 정치적 마찰과 논쟁의 장소로서 '접근성'을 드러낸다.
3) 정치적 기술로서의 상호 의존성을 중시한다.
4) 장애 정의 실현에 초점을 맞춘다.
테크노사이언스는 아니지만, 겁쟁이의 입장에서 평화와 안보에 대한 원칙을 다시 세워봐도 재밌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1) 겁쟁이는 안보를 실현하는 행위자다. 안보의 객체(보호받는 대상)가 아니다. 누가 행위자로 나서는지에 따라 어떤 안보인지가 결정된다.
2) 갈등이 없는 상태(약자의 욕구가 억눌린 상태)가 아니라 갈등을 정의롭게 마주하는 방식으로서 평화를 드러낸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