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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Jun 13. 2021

흔들리니까 양심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은 가장 많은 병역거부자를 수감한 나라였다. 2018년 6월 헌법재판소의 결정 뒤에 같은 해 11월에는 대법원에서 처음으로 병역거부자에 대한 무죄 선고가 이어졌다. 이후 2019년 초까지, 법무부는 병역거부 수감자들을 모두 가석방으로 내보냈다. 법에서는 형기의 1/3을 복역하면 가석방 대상자가 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형기의 80% 가까이 복역해야 가석방으로 나오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파격적인 조치였다. 현역 군인이 특정한 명령을 거부하는 것과 같은 특별한 케이스를 제외하곤 이제 더 이상 병역거부 수감자는 나오지 않을 줄 알았다. 전쟁없는세상은 해마다 평화수감자의 날(12월 1일)에 모여 감옥에 갇혀 있는 병역거부자들에게 편지를 썼는데, 이제 누구에게 편지를 써야 하냐며 걱정 아닌 걱정도 했다.     

 

역시 걱정은 사치였다.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후에도 병역거부자들은 감옥에 갔다. 물론 과거처럼 모든 병역거부자가 감옥에 가는 건 아니었다.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 입영통지서가 나온 사람들은 대체복무 심사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2018년 6월 전에 이미 기소되어 재판 중인 병역거부자들은 계속 재판을 받아야 했고, 재판을 받은 대다수의 평화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자들과 소수의 여호와의증인 병역거부자들은 유죄를 선고받고 감옥에 갇혔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문제의 완전한 해결이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한 방향의 제시였을 뿐이었다. 방향은 확실했지만 변화는 더뎠다.      


병역거부자들의 재판이 재개되면서 과거와 같은 문제들이 반복되었다. 특히 양심의 자유는 여전하게도 논쟁적인 주제였다. 검사들은 양심을 검증한다면서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질문을 병역거부자들에게 서슴없이 던졌다.


칼을 든 강도가 집에 침입해서 여동생을 강간하려고 하는데, 당신 옆에 총이 있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총을 들고 계엄군과 싸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위의 질문은 20년 전부터 지금까지 검사들이 병역거부자들에게 던져온 질문이고, 아래 질문은 최근 들어 특히 평화운동을 하는 병역거부자들에게 집중적으로 던지는 질문이다. 위의 질문이 더 노골적이고 아래 질문은 상당히 그럴싸해 보이지만 사실 이 두 가지는 똑같은 질문으로 봐도 무방하다. 궁금한 것을 묻는 게 아니라 병역거부자의 양심을 훼손해서 병역거부의 정당성을 공격하려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들은 병역거부자가 무어라 대답하든 검사의 논리는 정해져 있다. 병역거부자는 폭력을 인정하면서 비폭력주의라고 말하는 비양심적인 사람이 되거나(총으로 강도를 쏘겠다. 계엄군과 총을 들고 맞선 시민군을 긍정한다) 도덕적・정치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이 된다(강도에게 총을 쏘지 않겠다. 총을 들고 맞섰기 때문에 시민군은 긍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실제로 일상에서 마주하는 선택의 순간에는 이렇게 딱 두 가지의 선택지만이 제시되지 않는다. 우리는 무수한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기도 하고 때로는 여러 선택지를 해체하고 각각의 요소를 재구성해 새로운 선택지를 만들기도 한다. 이처럼 무수한 가능성을 의도적으로 삭제한 것은 병역거부자의 양심이 허위라는 것을 무리하게 입증하기 위해서다. 이것은 양심의 검증이 아니라 양심의 훼손이다.      


양심의 내용을 문제 삼는 경우도 있다.

      

피고인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이 존재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군사력에 불균형이 발생하여 일본군 위안부 피해가 발생한 것 아닌가요?

피고인이 주장하는 평화 방법으로 제2의 위안부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나요?     


대학 시절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의 수요집회에 참석한 경험을 이야기한 병역거부자에게 검사가 서면으로 질의한 질문들이다. 이 질문들도 역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게 아니다. 검사는 병역거부자의 양심이 가짜라고 말하는 대신 “틀렸다”라고 이야기한다. 너와 같은 생각은 네가 바라는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검사도 개인으로서 자신의 생각이나 사상, 정치적 견해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검사와 병역거부자가 한 명의 시민으로서 서로의 생각을 반대하거나 논쟁할 수 있다. 하지만 재판정의 검사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처벌할 수는 없다. 더욱이 헌법재판소는 병역거부에 대한 결정을 내리면서 국가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병역거부자가 스스로 말한 양심을 가지고 있고 진실되게 그 양심에 따라 살고 있는지의 여부이지, 양심의 내용을 따져서는 안 된다고 명확하게 이야기했다. 그것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FPS게임(총 쏘는 게임) 플레이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서 게임 회사의 접속 기록을 조회한다든지, 폭력적인 영화를 즐겨보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예매 사이트 거래 내역을 제출하라고 요구한다든지, 종교활동을 성실히 하는지 파악한다며 휴대폰 위치 추적을 신청하겠다고 나서는 모습을 보면 검찰은 헌법에 보장된 양심의 자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한 적이 없어 보인다.

      

양심은 한 인간의 근원에 맞닿아 있는 고도의 추상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양심이 어떻게 구성되고 발현되는지 깊은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삶의 맥락 속에서 양심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폭력은 나쁜 것이니 나는 그것을 거부합니다”와 같은 단순한 논리로써가 아니라 병역거부자가 살아온 삶의 궤적에서 폭력에 대한 감각을 어떤 방식으로 형성해왔는지, 그렇게 형성된 양심은 어떠한 상황에서 어떤 형태로 구체화되는지를 입체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것은 초중고 생활기록부와 각종 게임 기록과 P2P 사이트 다운로드 목록을 탈탈 털라는 의미가 아니다. 고등교육을 받지 못해서 고상하고 논리적인 언어로 자신의 양심을 표현하지 못하더라도 언어로 드러나지 않는 그의 양심을 읽어내고, 과거에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병역거부로 이어지는지 그 맥락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양심을 읽어내기 위한 문해력이 요구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검사들은 가장 게으른 방식으로 맥락을 싹둑 자른 뒤 병역거부자들의 살아온 연속적인 삶의 한 순간의 단면에서 흠집 하나 찾아내는 방식으로 양심을 심사한다. 이런 방식으로는 수백 번을 수사해도 헌법에서 보장하는 진지한 마음의 소리인 양심을 읽어낼 수 없다.

      

양심에 대해 누구보다도 고민이 깊어야 할 검사들이 양심을 납작하게 보는 것이 큰 문제이긴 하지만, 사실 검사들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가 양심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 않다. 병역거부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양심을 대체로 오해하곤 한다. 양심의 자유가 한국 사회 이슈로 떠오른 것이 크게 두 차례였는데 비전향 장기수에 대한 사상전향서를 국가가 강제했을 때, 그리고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가두는 것이 사회적 문제가 되었을 때다. 그러다 보니 한국사회에서 양심의 자유는 감옥에 갇히는 것을 불사할 정도로 아주 강력한 신념을 가진 특별한 존재들만이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이해되기도 했다. 흔들림 없고, 강력하며, 목숨과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신념으로 형상화되었다.

      

하지만 본디 양심은 굉장히 약하고 무른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양심의 자유를 보호하는 까닭은 개인의 양심이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요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가가 나서서 보호하지 않으면 너무나 쉽게 부서지고 무너지는 나약한 마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병역거부자들의 양심도 마찬가지다. 내 경우엔 흔들리지 않은 대단한 평화주의 신념이 있어서 병역거부를 한 것이 아니다. 병역거부를 하고 평화운동을 하면서 평화주의라는 신념이 양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던 거다. 병역거부자들은 감옥에 가기 전까지 수백 번을 수천 번을 흔들린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 맞는 길인지, 자신의 양심이 불이익을 무릅쓰고라도 지켜야 할 것인지, 이로 인해 인생에서 포기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떠올리면서 수백 번도 넘게 마음속으로 군입대를 했다가, 탈영을 했다가, 병역거부를 했다가 한다. 

     

양심은 결국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신념이 아니라 스스로 부끄럽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비추어보는 거울에 가깝다. 비전향 장기수나 병역거부자들처럼 굉장히 사회정치적인 상황에서만 발현되는 것도 아니다. 부당한 업무지시를 받고 이를 할지 말지 고민하는 회사원, 잘못한 게 없는데도 반성문을 강요당하는 학생, 원치 않는 거짓말을 해야 하는 모든 사람들의 흔들리는 마음이 바로 양심이다. 헌법에 보장된 양심의 자유는 바로 이런, 쉴 새 없이 흔들리는 나약한 마음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다. 양심은 원래 공기와도 같은 것이라 평소에는 그것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양심의 자유가 침해당했을 때 비로소 그 존재를 알아차리게 된다. 양심은 가책과 함께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소수자의 권리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다수에 속하는 사람들은 양심대로 하더라도 불이익이나 처벌을 당하지 않는 반면 소수의 양심은 늘 다수에 의해 부정당하기 때문이다.      


병역거부자들은 앞으로 대체역 심사위원회에서 심사를 받는다. 양심 심사 기관은 달라졌지만, 심사 절차와 심사 기준도 달라지겠지만, 양심을 심사한다는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대체복무제도를 운영해야 하는 정부 입장에서는 악용 사례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나는 여전히 양심을 심사하는 것이 가능한지 의구심이 든다. 과연 우리 사회는 병역거부자의 양심을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지도 걱정이다. 양심은 흔들림을 통해서 존재를 드러낸다. 양심의 자유를 보호하는 일은 이 흔들림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양심을 심사하는 어떤 방법도 결국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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