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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Jun 06. 2021

다시 그런 순간이 온다면, 나도 펑펑 울고 싶다

병역거부 운동이 일궈낸 작지만 대단한 승리

 

아침 일찍 미용실에 들러서 머리를 했다. 깔끔하고 단정한 스타일이 필요했다. 안국역에서 내려 헌법재판소로 향하는데, 비가 살짝 올 것 같은 하늘이었다. 일기예보에선 비가 온다는 이야기가 없었다. 구름은 금방 지나갈 것처럼 보였지만, 사소한 것 하나까지 신경이 쓰였다. 헌법재판소 앞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기자회견 시간보다 일찍 온 기자들, 기자회견에 함께 하기 위해 온 평화활동가들과 오랜만에 보는 병역거부자들, 그리고 헌법재판소가 병역법에 대한 합헌 결정을 내리고 병역거부자들이 계속 감옥에 가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서로서로 무리를 지어 있었다. 병역거부를 반대하는 분들 중에서는 우리 쪽으로 와서 일부러 시비를 거는 분들도 있었다. “북한으로 가”를 연신 외치는 분들에게 따로 할 말은 없었다. 우리는 차분하게 기자회견을 준비했다.      


헌법재판소에서 병역법에 대한 위헌 여부를 결정한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불과 기자회견 며칠 전이었다. 물론 조만간 헌법재판소가 병역거부 이슈에 대해 결론을 내릴 것이라는 예측이 팽배해있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병역거부권을 인정하는 방향이지 않겠냐고 예상했다. 병역법이 헌법에 합치한다는 결정을, 다시 말해 병역거부는 여전히 불법이며 병역거부자들은 예외 없이 감옥에 가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기는 헌법재판소도 부담일 테니, 그런 결정이 날 거 같으면 아예 결정 자체를 아예 미루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막상 헌법재판소에서 결정이 난다고 하니 긴장이 됐다. 백번을 생각해도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았지만 불안감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다.      


정말 많은 취재진이 기자회견에 왔다. 병역거부 운동을 하면서 이렇게 많은 기자들이 온 기자회견은 2008년 촛불집회 당시 현역 의경의 병역거부 기자회견 말곤 없었다. 


그렇게 모두가 약간의 흥분과 긴장을 안은 채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렸다. 헌법재판소 안에 들어가 있던 동료들과 기자들이 이따금 재판정의 분위기를 문자로 알려주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까 우리에게 시비를 걸었던 분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도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뭐지? 설마?’ 불안감이 엄습해왔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재판정에 들어가 있는 기자에게 발표가 났는지 물어보니 지금 발표를 하는 중인데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 헷갈린다는 답장이 왔다. 법률용어는 원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기로 악명이 높은 데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 봤듯이 가장 중요한 결론을 보통 마지막에 말하는 경향이 크다. 아마도 병역거부를 반대하는 분들이 지른 환호성은 오해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며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윽고 정리된 결론이 재판정 바깥에도 전달되었다. “헌법재판관 6명의 찬성으로 병역법 헌법불합치 결정” 예상대로였다. 우리는 모두 기쁨으로 웅성거렸고, 아까 환호성을 지른 분들은 혼란 속에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자들이 순식간에 우리를 둘러싸고 카메라 셔터를 둘러대기 시작했다.      

병역법 헌법불합치 결정이 난 한 해 뒤 헌법재판소는 낙태죄에 대해서도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왔다. (4명의 재판관이 헌법불합치, 3명의 재판관이 단순 위헌 의견을 냈다) 뉴스에서 본 낙태죄 폐지운동 활동가들은 그 소식을 듣고선 부둥켜안고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반면 한 해 전 헌법재판소 정문 앞에서 똑같이 헌법불합치 결정을 이끌어낸 우리는 분명 기뻤는데 아무도 울지 않았다. 병역거부 운동이 한국사회에서 시작된 지 18년 만에, 전쟁없는세상 활동이 시작된 지 16년 만에 오롯이 평화운동의 노력으로 일궈낸 성과였는데, 그 결과를 듣는 순간 감정이 벅차오르기보다는 도리어 차분해졌다. 그 자리에 있던 전쟁없는세상의 동료들과 병역거부자들 또한 그랬는지 우리 중 누구도 환호성을 지르거나, 감격에 겨워 울거나 그러지 않았다. 보다 못한 사진 기자들이 우리에게 만세를 부르든 포옹을 하든 포즈를 취해달라고 요청했고, 우리는 기자들을 위해 있는 힘껏 기쁜 표정을 지으며 서로 포옹을 했다. 표정은 연기였을지 몰라도 이 기나긴 고난의 세월을 함께 지나온 것을 감사하고 축하하는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기자들의 요청에 따라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포옹하는 나와 여옥이. 일종의 퍼포먼스처럼 되었지만 우리의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그날 우리는 기쁨을 표출하는데 왜 그리 인색했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다만 애써 의미를 부여해보자면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후에도 병역거부 운동에 남겨져 있는 과제들이 엄청나고 쉽지 않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분명 병역거부 운동의 커다란 성과고 중요하고 역사적인 사건이지만, 세상만사가 늘 그렇듯 변화는 하나의 거대한 이벤트로 별안간 오지 않는다. 지나고 나서 보면 어느 순간 변화한 세상을 느끼지만, 뒤돌아보면 변화가 이루어진 경계는 희미하고, 그 경계의 단면은 잘라본다면 켜켜이 쌓인 세월과 노력이 뒤죽박죽으로 엉켜 있을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병역법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에도 우리는 무수한 세월과 노력을 켜켜이 쌓아가야만 진정으로 원하는 변화를 얻을 수 있다는 걸, 나와 내 동료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신중함은 틀리지 않았다. 애초에 헌법재판소의 결정 자체가 병역거부운동의 앞길이 아직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동안 문제가 되었던 병역법의 조항은 병역법 88조의 1항이었다.      


병역법 88조 1항 

현역입영 또는 소집 통지서(모집에 의한 입영 통지서를 포함한다)를 받은 사람이 정당한 사유 없이 입영일이나 소집일부터 다음 각 호의 기간이 지나도 입영하지 아니하거나 소집에 응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병역거부자들은 이 조항에 따라 정당한 사유 없이 입영하지 아니하여 고발당하고 처벌받았기 때문이다. 병역거부자에게 무죄를 선고한 판사들의 경우 병역거부를 ‘정당한 사유’로 인정하면서 이 법 조항을 비껴갔다. 그런데 헌법재판소에서 헌법불합치 결정이 난 병역법 조항은 88조가 아니라 5조였다. 병역법 5조는 병역의 종류를 규정하는 조항이다. 현역, 예비역, 보충역 등 다양한 병역의 형태가 이 조항을 통해 구체화된다. 병역법 5조에서 ‘대체복무’를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병역거부자들이 대체역을 수행할 수 없었고, 그 결과 병역거부자들이 병역법을 위반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이것이 양심의 자유 침해한다는 논리였다.      


헌법재판소가 88조 1항이 아니라 5조에 대해 판단한 것은, 헌법재판관 다섯 명 이상이 찬성해야 해당 법률의 위헌성을 확정할 수 있는 제도적 절차 때문이다. 처벌조항이 없다면 이를 악용하는 사람들이 생길 것을 우려한 재판관들은 88조 1항을 손대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88조 1항을 손대는 것을 반대하지만 병역거부자를 처벌하는 것 또한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재판관들을 설득하기 위해 일부 재판관들이 새롭게 아이디어를 낸 것이 병역법 5조의 병역의 종류를 문제 삼는 것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적중했고, 헌법재판관 6명의 찬성으로 병역거부자를 처벌해온 병역법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오게 되었다. 단순 위헌으로 결정이 나지 않은 까닭은 당장 위헌 결정을 내리면 사회적 혼란이 예상된다고 헌법재판소가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19년 12월 31일까지는 한시적으로 당시의 병역법이 유지하고 그 기간 동안 국회가 대체복무를 규정한 병역법을 새로 만들거나 개정해서 대체복무제를 시행하라는 것이 헌법재판소 결정의 결론이었다. 그렇게 해방 후 70여 년 동안 1만 9천여 명의 젊은이를 감옥으로 보냈던 병역법이 바뀌게 되었다.  

   

병역거부자들이 1년에 수백 명씩 감옥에 가는 상황을 즉각 개선하기 위해서 헌법재판관들이 짜낸 고육지책의 판단이었지만, 처벌조항이 그대로 유지된 것은 무척 아쉬운 점이다. 그동안 양심의 자유를 처벌한 책임에 대해 논할 수 있는 기회는 뒤로 밀렸기 때문이다, 과거 병역거부자를 강제로 징집하고 강압적으로 군사훈련을 강요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죽고 다쳤는데, 그에 대한 그 결과 국방부나 병무청의 책임 있는 반성 혹은 사과 또한 사회적으로 논의되지 못했다. 평화활동가들과 병역거부자들은 이 문제를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이것을 의제화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질 않았고, 그런 상황에서 우리의 역량을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쏟기보다는 미래에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국방부의 태도, 이 이슈에 대한 국회의원들의 이해도를 고려한다면 대체복무제가 징벌적인 모습으로 도입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2018년 6월 28일, 기자회견 때 우리는 아무도 울지 않았고, 기쁨을 표출하기에는 너무나 정신없는 상황이었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여러 언론의 추가적인 인터뷰가 한바탕 몰아치고 난 뒤 우리는 참여연대 2층 강당을 빌려 조촐한 파티를 했다. 병역거부자들과, 평화활동가들 그리고 그동안 함께 해온 여러 변호사분들과 선생님들이 작지만 거대한 병역거부 운동의 승리를 축하했다. 우리 모두는 진심으로 기뻐했고, 밤새도록 기뻐했다. 그렇지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한 것은 조금 아쉬운 생각도 든다. 낙태죄 폐지 운동 활동가들의 눈물을 보면서 부러운 마음도 들었다. ‘다시 이런 기회가 생긴다면, 나도 그때는 꼭 울어야지.’ 마음먹어 본다.



*2018년 6월 28일, 헌법재판소 앞 풍경이 궁금하신 분들은 전쟁없는세상 홈페이지에서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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