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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Jun 27. 2021

병역거부운동은 어떻게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나


세상은 어떻게 더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는가? 나는 아주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할 수 있다.


“사회운동의 성공이 세상의 변화를 이끈다.”


물론 사회운동은 성공할 때보다 실패할 때가  많다. 사회운동이 다루는 이슈들이 애초에 성공하기 어려운 이슈들이기 때문이다. 쉽게 달성 가능한 이슈들이라면 굳이 사회운동이 다루지 않아도, 정당들이 주도하는 의회정치에서 이를 해결해나갈  있다. 반면   민감하거나 아직 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슈를 보편적인 이슈로 만들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제도를 변화시키는 것은 사회운동의 몫이다. 그러다 보니 성공보다 실패가 많고, 성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된다.  과정이 지난하고 힘들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중간에 포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회운동은 결국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찾아내고야 만다는 것이다. 투표권이 여성들에게까지 확장된 것도, 흑인을 차별하는  조항이 사라진 것도, 호주제가 철폐된 것도, 장애인들이 쉽게 이용할  있는 저상버스가 도입된 것도, 한국에서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선거로 뽑을  있게  것도 모두 사회운동이 일궈낸 변화다.

      

대체복무제 도입 또한 마찬가지다. 다른 변화들처럼 이 변화 또한 정치인들의 선의 혹은 몇몇 법률 엘리트들의 시대를 앞서간 혜안으로 만들어낸 변화가 아니다. 물론 국회에서 대체복무 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정치인들, 국제법과 헌법을 파고들어 병역거부자들이 무죄 선고를 받도록 애쓴 법조인들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병역거부 운동을 이끌어온 전쟁없는세상의 평화활동가들과 꾸준히 등장한 병역거부자들이 아니었다면, 대체복무제 도입은 훨씬 더 늦은 시기에나 가능했을 것이다. 이는 당연하게도 저절로 이루어진 변화는 아니다. 다른 많은 사회운동처럼 병역거부운동도 거듭된 실패를 쌓아가면서 성공으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식민지를 겪고 전쟁을 치른 지 백 년도 안 지난 나라에서, 사회 전반에 강한 군사주의 문화가 팽배하고 여전히 북한과 군사적 대치를 이어가고 있는 나라에서 전쟁없는세상처럼 조그만 단체가 주도하는 한국 병역거부 운동이 대체복무제 도입이라는 커다란 사회 변화를 만들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크게 세 가지의 이유가 가장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병역거부운동은 시작부터 국제연대를 바탕으로 했다. 한국에서 병역거부의 역사는 여호와의증인들이 일제시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전부 구속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공개적인 방식으로 병역거부를 선언하고 대체복무 도입을 주장한 병역거부 운동은 2000년 이후였다. 평화주의 기독교 교파인 퀘이커에서 만든 시민단체 친우봉사회의 활동가가 국제회의에서 만난 한국의 평화활동가에게 대체복무제를 도입한 대만 소식을 알려주면서 한국에서도 병역거부 운동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고, 제안을 받은 활동가가 다른 인권활동가들과 평화활동가들과 함께 병역거부운동을 조직한 것이 시작이다. 그렇게 시작되었지만 한국에서는 워낙 처음 시작하는 캠페인이었기 때문에 참고할만한 자료도, 경험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당시의 활동가들은 국제연대 속에서 부족한 것을 채워갔다. 특히 오랫동안 병역거부운동을 펼쳐온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War Resisters’ international, 이하 WRI)은 한국 병역거부운동 초기부터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고 기꺼이 캠페인을 함께 기획하면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의 공식적인 규약이나 권고 등도 적극 활용했다. 병역거부권을 명시한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과 같은 국제적인 조약들은 병역거부자들의 재판에서 무죄 판결의 주요한 논거로 쓰였고, 병역거부를 인정하고 대체복무제를 도입하라는 유엔 자유권위원회나 인권이사회의 한국 정부에 대한 권고를 이끌어내며 행정부와 입법부를 압박했다.      


국제연대는 한편으로는 한국 평화활동가들과 병역거부자들의 시야를 크게 확장해 병역거부운동이 평화운동으로 발돋움하게 해 주었다. 다양한 대륙, 다양한 인종의 평화활동가들의 경험을 마주하면서 우리는 병역거부의 문제가 대체복무제를 도입함으로써 병역거부자를 감옥에 보내지 않고 그들의 양심의 자유를 보호하는 인권적인 문제인 동시에, 병역거부가 전쟁에 저항하는 직접행동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특히 평화의 문제를 우리는 한반도 혹은 동북아시아의 질서 속에서만 생각하기 쉬운데, 더 넓은 세계적인 구조 속에서 전쟁이 어떻게 일어나고 진행되며, 평화운동은 이것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때마침 한국 병역거부운동이 꿈틀거리고 있던 시기는 이라크 전쟁과 맞물린다. 세계적으로 반전운동이 크게 일어났고, 한국에서도 전쟁반대와 파병반대를 외치는 여론이 드셌다. 이런 국면에서 병역거부운동은 평화주의적인 성격을 강화하였고 이라크 전쟁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젊은이들 중 일부는 기꺼이 전쟁에 대한 저항의 방식으로 병역거부를 선택했다. 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보호하는 인권적인 면에 더해 전쟁에 저항하는 평화주의적인 실천으로 병역거부가 자리매김하면서, 병역거부운동은 병역거부자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국가 공권력에 의해 양심의 자유를 침해당하는 피해자와 피해자를 돕는 활동가들, 이런 구도에서 탈피해서 전쟁에 저항하는 다양한 방식 중 하나인 병역거부를 실천하는 병역거부자와 다른 방식으로 전쟁에 저항하는 활동가들로 서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특정인(병역거부 당사자)에게 병역거부운동의 정보나 상징이 과도하게 쏠리는 것을 막을 수 있었고 병역거부운동은 건강하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활동을 이어올 수 있었다.     


병역거부운동이 대체복무제 도입이라는 변화를 만들 수 있었던 마지막 중요한 요인은 바로 여성 리더십이다. 평화운동이 페미니즘과 교차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래서 일부러 여성활동가들을 병역거부운동의 리더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 병역거부운동을 제안했던 미국 친우봉사회의 활동가도 여성이었고, 그 제안을 받은 한국의 최정민 활동가(현재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당시에는 평화인권연대 활동가)도 여성이었다. 이것이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친우봉사회의 활동가가 일부러 여성활동가에게 이 제안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최정민의 뒤를 이어 오랫동안 병역거부운동을 이끌어온 전쟁없는세상 여옥 활동가도 여성인 것은 우연한 결과만은 아니다. 남성 활동가들은 병역거부를 하고 감옥에 다녀오면서 자연스럽게 공백이 생겼다. 반면 여성활동가들은 꾸준하게 제자리를 지키며 병역거부운동을 이끌었다. 페미니즘에 대한 고민으로 여성 리더십을 세운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여성 리더십이었기 때문에 한국 병역거부운동은 내부의 민주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긴장을 이어가며 오랜 세월 활동을 일굴 수 있었고, 운동의 상징으로 병역거부자 개인을 소환하지 않음으로써 병역거부운동이 평화주의에 기반 한 평화운동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대체복무제 도입이 병역거부운동의 완전한 성공은 아니다. 대체복무제 도입은 분명 병역거부운동이 일군 소중한 성과이고, 한국사회에서 커다란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다. 대체복무제 도입은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군사주의 문화에 낸 자그만 균열이다. 군사주의는 군대에 적합한 비장애인 헤테로섹슈얼 남성을 ‘정상적인 사람’으로, 군대에 적합하지 않은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을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나누는 방식으로 작동해왔는데, 이런 구분은 대체복무제의 도입과 확대를 통해 약해질 수 있다. 또한 대체복무제의 성공적인 사회 안착은 강한 군사력만이 국민의 평화와 안전을 지킨다는 군사안보 이데올로기를 대체하는 새로운 안보 개념으로 이어지거나 독일의 사례처럼 병역거부자들이 대체복무로 돌봄노동을 수행한다면 성별화 된 노동에 대한 사회적 성찰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러한 변화는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변화지만 대체복무제가 도입되었다고 저절로 일어나는 변화는 아니다.        


법과 제도를 바꾸는 일은 그 자체로 명확한 목적지이고, 사회운동은 때로는 이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병역거부운동이 대체복무제도를 만들기 위해 애썼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는 사회운동의 바라는 근본적인 성공이나 최종 목표가 아니라 근본적인 성공이나 최종 목표로 가기 위해 놓는 디딤돌에 가깝다. 대체복무제 도입도 마찬가지다. 병역거부운동은 대체복무제 도입으로 목표를 달성한 것이 아니라, 대체복무제 도입을 디딤돌 삼아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그다음 단계에는 무엇이든 놓일 수 있다. 안보 개념의 변화, 정상적인 사람과 비정상적인 사람을 나누는 군사주의의 약화, 사회적 노동에 대한 성별 고정관념 타파,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군사적 긴장관계 완화, 어떤 것이든 가능하다. 중요한 건 어떤 변화도 그저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것, 사회운동의 성공이 사회의 변화를 만든다는 것이다. 대체복무제 도입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병역거부운동 또한 대체복무제라는 디딤돌을 딛고 다음 도전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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