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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Jul 14. 2021

운동은 이렇게

짧은 리뷰

2009년부터 2015년까지 나는 출판사 편집자로 일했다. 물론 그 기간 동안에도 전쟁없는세상에 한발 걸쳐있긴 했지만 내 본업은 출판노동자였으니, 그 시간이 내겐 사회운동의 바깥에서 사회운동을 바라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특히 출판노동자로서의 경험은 평화운동의 말과 글을 돌아보게 해 주었는데,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독자들이 기꺼이 책을 사게 만들지를 고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평화운동의 말과 글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잘 다가갈 수 있을지를 고민할 수 있었다. 


그즈음 전쟁없는세상 동료들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했다. 우리는 어떻게 효과적으로, 효율적으로 활동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람들을 설득하고, 행동을 조직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사회변화를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보수정부가 들어서면서 한국사회 전반에서 당분간은 진보적인 변화가 불가능할 것만 같아서 많은 활동가들이 우울해하던 시기였고, 특히 이전 정부가 약속한 대체복무제가 엎어지면서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들은 더욱 큰 상심과 무기력을 겪던 시기였다. 


전쟁없는세상은 당시 위기를 극복하고자 외국에서 비폭력 트레이너를 초청해 워크숍을 했다. 우리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진단해보고, 병역거부 캠페인의 성공이 무엇인지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목표를 함께 설정했으며,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고 각자의 역할은 무엇인지 함께 찾아보는 워크숍이었다. 워크숍의 결과로 우리는 다시 힘을 낼 수 있는 에너지를 채웠는데, 돌이켜보면 정말 중요한 것은 사회운동이 사회'과학'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심과 신심으로 무장하고 기꺼이 희생하는 활동가의 성품이 아니라, 명확한 목표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효과적인 전략 수립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훈련과 연습이 활동가에게 필요한 덕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의 어떠한 변화도 저절로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성공한 사회운동은 우연처럼 찾아오는 순간을 잘 포착한 경우가 많지만 그마저도 평소의 연습과 훈련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1950년대 미국 민권운동의 시작을 알린 로자 파크스의 행동은 우발적인 돌출행동이 아니었다. 로자 파크스와 그녀의 동료들은 미국 사회에서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는 제도를 없애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치밀하게 토론하고 오랫동안 준비해온 끝에 직접행동에 나섰고, 그랬기 때문에 결국에는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한국의 시민사회운동 활동가들 또한 열심히, 헌신적으로, 꾸준히 활동하는 것을 넘어서서 좀 더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캠페인을 기획하고,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실행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서도 사회운동을 민주적인 방식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노력과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도. 하지만 한국에는 사회운동의 방법론을 분석하고 논증한 연구가 거의 없었다. 전쟁없는세상의 활동가들은 외국의 비폭력 트레이닝 자료를 번역하고, 그를 바탕으로 한국 상황과 맥락에 맞게 변형해 자료를 만들고 직접 트레이너가 되어 트레이닝을 해오고 있다. '비폭력 트레이닝'이라는 이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비폭력'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하지만 실은 사회운동의 캠페인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트레이닝'이 필요하다는 게 주된 문제의식이었다. 


《운동은 이렇게》는 전쟁없는세상의 활동가들이 그렇게나 바라던 사회운동을 어떻게 기획하고, 준비하고, 실행할 것인지에 대한 매뉴얼이다. 어떤 이슈를 선택할지, 지지층을 어떻게 조직할지, 모금은 어떻게 해야 하고, 리더와 사무국의 역할은 무엇인지, 언론은 어떻게 대하고, 급진적 전투적인 분파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등등 사회운동의 A부터 Z까지를 아주 실용적인 관점에서 다룬다. 캠페인을 시작하려는데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신입 활동가부터, 오랜 경험이 있지만 매너리즘에 빠졌거나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다시금 처음의 마음 가짐을 되새겨야 할 중견 활동가까지 모든 활동가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내용이 가득하다. 


아쉬운 점도 있는데 마이클 왈저가 미국의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쓴 책인 만큼 한국의 상황과는 다른 점도 분명히 보인다. 예를 들면 광대한 땅을 가진 연방국가 미국과 전국이 1일 생활권인 한국에서의 정치적 공간과 시간에 대한 감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 책이 제안하는 어떤 내용들- 캠페인 전술로 제안하는 호별방문 같은 것들은 한국적인 상황에는 안 어울린다. 하지만 전술은 절대불변의 진리가 아니고 맥락과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적용하는 게 중요한데 그때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호별 방문 시 주민들과 논쟁을 벌이는 것은 위험하고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점, 한 번의 짧은 만남에서는 설득이 아니라 홍보를 해야 한다는 점은 한국의 활동가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 또한 길거리에서 만난 시민들에게 우리의 주장을 설명하기보다는 설득하려고 달려들어 결국 실패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니까.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에 딱 들어맞는 한국판 《운동은 이렇게》가 언젠가는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사실 이 책의 진짜 아쉬운 점은 번역이다. 마이클 왈저가 정치학자여서 그런지 정치학자가 번역을 했는데, 번역 자체가 의미가 달라지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한국의 시민사회운동 활동가들이 잘 쓰지 않는 단어나 표현으로 번역한 곳이 많은 점은 무척 아쉬웠다. 의미 전달에는 문제가 없겠지만, 좀 더 자연스럽고 친숙한 표현을 썼다면 활동가들의 접근성이 더 높아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주옥같은 점들을 짚어주고 있는데, 나를 포함해서 많은 활동가들이 늘 염두에 두고 몸에 익히는 연습을 해야 할 내용들이다. 어떤 내용은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논쟁과 토론은 늘 사회운동을 풍성하게 만드니까. 다만 이 책은 활동가의 도덕에 대한 책이 아니라 아주 실용적인 관점에서 활동가들이 어떻게 해야 운동이 성공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이야기하는 책이라는 걸 잊지 말자. 마이클 왈저도 그리고 나도 옳은 이야기만 주구장창 하는, 사회변화에는 큰 관심 없이 자신의 올바름만을 증명하고 싶어하는 자기만족적인 방식은 이제 반복하고 싶지 않으니까. 내가 책을 읽으며 밑줄 그은 문장들을 나누며, 활동가들에게 이 책을 통째로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운동의 초점은 확실하게 하나의 중요한 이슈에 맞춰야 하며, 투표나 전쟁, 폭격처럼 쉽고 단순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운동의 대변인들과 활동가들은 그 이슈의 중요성과 단순함을 과장해도 좋다. 단일 이슈에 초점을 맞춰 승리한 후에, 그 이슈를 둘러싼 문제의 복잡성을 깨닫고 실망해도 늦지 않다. (67쪽)


활동가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 자기 같은 사람들이 더 많이 있으리라 생각하며 운동을 시작할 때, 최선을 다할 수 있다. 자신의 결의와 열정적인 활동에 자부심을 갖는 것은 좋지만 자신을 예외적인 사람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정말이지 활동가들이 남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면 효과적으로 활동하기는 어렵다. 당신이 발 딛고 선 곳에서 시작하라. (71쪽)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면, 시민 활동가들은 자신이 지켜 온 윤리적 태도를 과시하지 말아야 한다. 통상적인 부패나 기회주의와 마주할 때도 의견 차이 정도로 치부해 처리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는 편이 낫다. 여기서 유일한 문제는 어떤 상황에서 그렇게 할 것인가이다. (82쪽)


연설을 할 때는 지적 탁월함이나 그에 필요한 말재주가 아닌 소박한 말하기, 즉 단순한 언어, 조용한 어조, 차분한 분위기, 느린 속도가 좋다. 이런 태도는 듣는 사람들의 용기를 북돋우며 분노와도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다. 지나치게 흥분하는 연설은 최악이다. 이런 방식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정치적 위기에 대한 가장 진솔한 반응일 수 있지만, 중립적 입장을 가진 청중에게는 불안과 공포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152쪽)


활동가들은 계속 보통 사람들의 언어로 말해야 하는데, 예를 들면 함께 운동에 참여한 이들을 낯선 이데올로기적 용어들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통상적 구호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정교하게 구성하면서도 보통 사람들의 말로 표현해야 한다. (152쪽)


한 번에 하나의 통념에만 도전하고, 여러 통념들과 맞서 싸워야 하는 경우에도 주어진 기간에는 가능한 한 그 수를 줄여야 한다. 무엇보다 목표들에 우선순위를 부여하고 그것을 따라야 한다. (152쪽)


운동의 밑거름이 되는 불만은 분명하고 정확하게 규정해야 하며, 행동은 구체적인 내용으로, 너무 많지 않게 항목을 정리해서 제안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위기에 대한 개인적 설명이나 기성 체제에의 붕괴가 임박했다는 등의 막연한 이야기는 그것이 아무리 정직한 것이라 해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154쪽)


일부러 적을 찾으려 하지 않아도 운동은 기존의 도덕적·정치적 기준이나 사회의 기득 집단들과 근본적으로 불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중략) 운동이 하는 모든 활동이 다수의 일반 시민들에게는 위협이나 무례로 느껴지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는 활동의 종류는 제한적이다. 이럴 때, 활동가들은 운동을 위협이나 무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중략) 활동가들 또한 시민들이 아니라 그들의 리더를 공격해야 한다. 리더를 제외한 시민들에게는 교육적인 관점에서 다가가는 것이, 고립되기 쉬운 활동가 집단의 과제이다. 즉, 관심을 쓰는 데 필요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면서 자기 입장을 설명해야지, 자기 의견에 동의하지 않고 외면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비난해서는 절대 안 된다. 운동은 언제나 실제보다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해야 한다. (189쪽)


어떤 경우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야만, 운동은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고 실제로도 승리한다. 작은 패배는 견딜 만하다. 하지만 계속되는 작은 패배들을 견디는 것이 늘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분파적 고립이 유일한 대안이 된다면, 아마도 운동을 해산하는 게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 (204쪽)





이 글은 전쟁없는세상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전쟁없는세상에서 펴낸 '활동가를 위한 효과적 운동전략 수립 가이드북 <어떻게 세상을 바꿀까?>'도 함께 보면 더욱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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