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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Jul 09. 2021

별것 아닌 선의

짧은 리뷰


《평화는 처음이라》 초고를 써서 출판사에 보냈을 때, 빨간소금 출판사 대표님은 내 글을 보고는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강하게 주장하는 글일 줄 알았는데 굉장히 자분자분 설명하는 글이었다고. 아마도 보리출판사 다니면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모습으로 나를 처음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셨으리라.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을 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경영진과 싸우느라 나 또한 날이 서 있던 나날들이었다. 부당함을 참을 수 없어 맞서긴 했지만 내 본래 성정은 갈등이나 다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사람들은 때로는 내가 싸움을 좋아하는 줄 안다. 맨날 데모하고 잘못된 것을 목소리 높여 따지는 것이 내 일이다 보니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나는 잘 분노하지 않고, 분노라는 감정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다. 


나를 움직인 것은 분노보다는 슬픔이었다. 예컨대 철거촌에서 나를 움직인 건 분노보다는 슬픔이었다. 용역깡패들이 웃통 까고 들어와 철거민들을 마구잡이로 폭행할 때도, 그런 용역을 잡아가기는커녕 그에 항의하는 우리 학생들을 경찰들이 연행할 때도, 나는 분노하기보다는 슬픔에 휩싸였다. 용역깡패들에게 던지려고 준비한 똥폭탄을 뒤집어쓴 우리의 모습이 서글펐고, 무자비한 폭력에 속절없던 철거민들의 처지가 슬펐다. 무너진 동네를 함께 돌아다니면서 "여기는 미용실이 있었고, 저기는 슈퍼가 있었어"라고 천진난만하게 설명하는 어린아이를 마주할 때의 슬픔이 내 힘의 원동력이었다. 


내가 어떤 감정에 반응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학시절에 나는 슬픔이 사회운동의 동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못했다. 남들 앞에서 "마르크스가 이랬대, 레닌이 이랬대"라며 지식을 뽐내거나, 집회 때 쇠파이프 들고 용감하게도 앞장서서 전경들과 싸우는 사람이, 혹은 후배들을 집회에 많이 데려올 수 있는 사람이 훌륭한 활동가라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마음속에 날이 서 있어야만 하는 줄 알았던 그 시기에 나는 나와 조금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조차도 인정하지 못했다. 그래야 올곧은 활동가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성정을 숨길 수는 없었나 보다. 내가 속한 학생운동 그룹에서는 학번별로 세미나 팀을 운영했는데, 다른 학번은 정치경제학이니 철학이니 이런 책을 볼 때 우리는 시와 소설을 읽었다. 내가 강력하게 문학을 보자고 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슬픔을 마주하고 이야기 나누기엔 문학이 정치경제학이나 철학보다 더 나은 텍스트여서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당시의 나는 나름 진지하게 혁명가를 꿈꿨고 주로 찾아 읽는 문학작품도 혁명가들이 쓴 시와 소설이거나, 사회운동을 다룬 이야기들이었다. 특히 김남주와 브레히트의 시를 좋아했다. 



임시 야간 숙소                                                                  - 베르톨트 브레히트


듣건대 뉴욕
26번가와 브로드웨이 교차로 한 귀퉁이에

겨울 저녁마다 한 남자가 서서

모여드는 무숙자들을 위하여

행인들로부터 돈을 거두어 임시 야간 숙소를 마련해 준다고 한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책을 읽는 친구여, 이 책을 내려놓지 마라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김남주처럼 혁명의 무기로 시를 쓰고 싶었고, 브레히트처럼 임시 야간 숙소를 짓는 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고, 어쩌면 임시 야간 숙소는 착취의 시대가 얼마나 야만적인지를 가려주는 가림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별것 아닌 선의는 정말로 별것이 아닌 것으로 생각했고, 투철한 계급의식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에 《별것 아닌 선의》를 읽었다면, 나약한 개량주의자의 변명으로 치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전히 임시 야간 숙소를 짓는 일만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사회운동의 역할을 임시 야간 숙소를 짓는 것에서 멈추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임시 야간 숙소를 짓는 일도 착취의 시대를 줄이는 일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착취의 시대가 하룻밤에 짧아지지는 않을 터, 그 시기까지 사람들이 버티기 위해서는 임시 야간 숙소의 온기가 필수적이다. 선의는 혁명만큼이나 별것이고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특출 난 재능 없이 매일의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사람의 일상이 가진 힘 즉 '삶이라는 투쟁담(212쪽)'이 가진 무게를 허투루 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우연히 만난 이름 모를 누군가가 건넨 귤 몇 개와 그에 대한 답례로 건넨 치즈빵(48쪽)의 온기가 혁명의 열기만큼이나 사람들의 마음에는 꼭 필요한 불씨라고 생각한다. 


나이를 먹으면서 둥글둥글해진 탓도 있겠지만, 사람들의 선의가 바로 세상을 바꾸는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병역거부운동을 예로 들자면, 나서서 병역거부를 하고 감옥에 간 병역거부자들이 없었다거나 꾸준히 병역거부운동을 이끌어온 활동가들이 없었다면 대체복무라는 사회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단한 신념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늘 떨리고 흔들리는 양심을 가진 병역거부자들이 꾹 참고 감옥 생활을 견딜 수 있는 것은 바깥의 온기가 묻어 있는 보통 사람들의 편지 덕분이었다. 전쟁없는세상이 운영되고 내가 월급을 받아 살 수 있는 것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평상시에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신경 쓰기 버거우면서도 마음을 내어 전쟁없는세상에 후원금을 보내주는 사람들 덕분이다. 어쩌면 선의라고 말할 것도 없이, 그냥 서로의 역할이 다를 뿐이다. 직업활동가로서 내 일이 별것이라면, 병역거부자들의 감옥살이가 별것이라면,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준 사람들의 선의 또한 별것이다.


그래서 이제 나는 타인에 대해, 특히 그 사람이 직업활동가가 아니라면, 그의 잘못한 행동을 비판하더라도 그 사람의 삶을 욕하고 싶지 않다. 내 삶 또한 별것 아니라는 자각 때문이기도 하지만, 별것 아닌 사람들 때로는 별나게 나쁘면도 있는 사람들이 가끔씩 만들어내는 별것의 선의가 있어야만 사회변화가 가능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 같은 직업활동가들의 역할은 별것 아닌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계몽한답시고 가르치려 드는 게 아니라, 그들이 때때로 만들어 내는 별것의 선의가 흩어져 사라져 버리지 않게 한데 모아 세상을 변화시키는 에너지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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