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멤버 홍콩》서평
20세기 동아시아의 도시들 가운데 사연이 없는 도시가 있을까. 제국의 병참기지였다가 핵폭탄으로 폐허가 된 히로시마, 오랫동안 지역 차별의 대명사였으며 군사독재에 맞선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된 광주, 한국인들이 최근 가장 사랑하는 관광지면서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청룡부대가 학살한 퐁니 퐁넛 마을에 접한 다낭까지, 20세기 전쟁과 폭력이 남긴 상처에 아픈 이야기 한 자락 가지지 않은 동아시아의 도시를 찾긴 어렵다.
슬픈 이야기로는 홍콩을 능가하는 도시들이 많이 있을지 모르지만 홍콩만큼이나 독특한 이야기를 품은 도시는 아마 또 없을 것이다. 동아시아를 지배했던 정통왕조 청나라의 치하에서, 세계를 휩쓴 제국주의 국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이제 다시 세계의 초강대국 중국의 지배를 겪는, 그야말로 20세기 세계의 권력 지도를 압축해놓은 것만 같은 도시가 바로 홍콩이다. 중국이지만 중국이 아니고, 영국이었지만 영국이 아니었던, 그래서 홍콩으로만 존재했던 도시에 대한 기록이 바로 《리멤버 홍콩》이다.
여행 작가가 쓴 책이지만 이 책은 여행서가 아니다. 홍콩을 주인공 삼아 20세기 중국의 현대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책이고, 중국 반환 이후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홍콩인들의 사회운동을 정리하고 분석하고 기록한 사회학 책이고, 이제 다시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과거의 홍콩을 기억하기 위해 직접 취재한 홍콩인들의 모습을 담은 르포 문학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홍콩을 너무나도 사랑한 사람이 홍콩에 보내는 사랑 고백 편지다.
홍콩을 너무 사랑하지만 작가는 홍콩을 무작정 찬양하지는 않는다. 홍콩이 왜 홍콩이 되었는지, 홍콩인이 왜 홍콩인이 되었는지, 이 독특한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의 정체성에 20세기의 중국과 영국 사이에 낀 역사와 정치와 문화가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정확히 바라보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 시선의 기원이 사랑일 뿐, 시선의 각도는 예리하고 날카롭다. 그렇기 때문에 홍콩인의 존재 방식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는 중국과 맞서는 홍콩인들에 응원을 보내면서도 시위가 중국 혐오나 여성 혐오로 흐르는 지점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견해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홍콩에 대한 작가의 사랑은 매우 뜨거운 동시에 아주 냉철한 사랑이다.
홍콩 시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고 수준의 시민적 자유가 보장되지만 정치적 자유는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홍콩의 정치적 상황과 독특한 홍콩의 선거 제도, 홍콩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홍콩인들의 정체성을 알아야 한다. 특히 1997년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된 이후부터 우산혁명 이전까지 중국 정부와 홍콩인들의 여러 갈등 국면들(2003년 국가보안법 제정 시도, 2004년 홍콩기본법 해석 사태, 2012년 국민윤리 및 국가관 교육 과목 신설)을 둘러싼 갈등의 양상과 중국이 홍콩에 보장한 ‘일국양제, 고도자치, 항인치항’의 원칙이 흔들리는 과정과 그 과정을 바라보는 홍콩인들의 사회적 역사적 심리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이런 것들은 이 글에서는 자세히 쓰지 않을 것이다. 《리멤버 홍콩》에 아주 잘 정리가 되어 있으니 꼭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나는 활동가로서 2014년 우산혁명에서 2016년 피시볼 레볼루션을 거쳐 2019년 송환법 반대로 이어지는 홍콩 시민들의 사회운동 방식과 구호의 변화에 주목해서 이 책을 읽었다. 각각은 시위가 촉발된 계기가 홍콩을 통제하고 싶은 중국 정부와 중국 정부에 통제당하기를 거부하는 홍콩 시민들 사이의 충돌이라는 점에서는 궤를 같이한다.
우산 혁명 당시 가장 대표적인 투쟁 방식은 ‘상징적인 장소 점령’이었다. 2011년 뉴욕의 오큐파이 운동(Occupy Wall Street)에서 영감을 얻은 방식이었다. 지식인들이 시작한 운동에 조슈아 웡과 학민사조, 대학생 조직인 홍콩전상학생연회가 결합하면서 대중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우산 혁명은 비폭력 투쟁을 원칙으로 했다.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진압을 하는데도 비폭력의 기조를 유지했다. 물론 대규모 시위에 다양한 그룹이 모이면 서로 의견이 갈리기도 한다. 우산혁명도 그랬다. 특히 이처럼 특정 거점을 점령하는 방식은 참여하는 사람들이 일상을 중단해야 하기 때문에 오래 끌기 힘들다. 시위가 구체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길어지면 시위대의 결집력이 약해지고 견해 차이가 갈등으로 번지기도 한다. 결국 센트럴 점령을 주장했던 지식인 그룹은 경찰에 자수를 한 반면, 몽콕을 점령한 시위대는 끈질기게 저항했다. 지식인 그룹은 “소란은 홍콩 정부에게만 좋은 일”이라며 몽콕의 시위대를 비판했고, 몽콕의 시위대는 “지성을 운운하며 나약하게 저항하니 정부가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결국 모두의 예상을 깨고 78일이라는 긴 기간 이어진 우산혁명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마무리되었다.
2016년 2월, 홍콩 정부의 노점 단속에 대한 저항이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로 이어져 61명이 경찰에 연행되는 일이 발생했다. 우산혁명 당시에는 시위대가 철저하게 비폭력 원칙을 고수했는데, 폭력 시위 방식 자체가 홍콩 사회에서는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고려한 전략적 판단이었다. 반면 2016년 피시볼 레볼루션 때 시위대는 폭력 시위를 기획하거나 준비한 것은 아니었지만 경찰의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경찰이 행사한 폭력이 SNS를 통해 전파되면서 시위대의 분노를 자극한 탓이었다. 이날 시위에서 처음으로 “광복홍콩 시대혁명(光復香港 時代革命)”이라는 구호가 외쳐졌다. 우산혁명이 ‘행정장관 직선제’라는 명확한 정치적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78일간 지속된 반면 피시볼 레볼루션은 단속 과정에서 벌어진 폭력이 도화선이 되었을 뿐 시위대의 목표가 명확하게 존재하지는 않았다. 대신 피시볼 레볼루션은 같은 해에 치러진 홍콩 의회 선거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로 이어졌다. 투표율이 직전 선거에 비해 5% 높아졌고 이는 민주파의 약진(실제로는 직전 선거보다 3석이 늘었지만 이 정도도 홍콩 반환 이후 민주 세력이 거둔 최대의 성과라고 한다)으로 이어졌다. 단순히 의석 숫자가 늘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청년들이 의회에 진입한 것이 정치적으로는 큰 성과였다.
2019년 송환법 반대 투쟁은 지도부가 없는 시위, 그리고 평화시위로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하는 용무파가 전면에 등장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시위와는 방식과 양상이 달라졌다. 우산혁명 당시 지도부가 잡혀가면서 시위가 사그라들었다는 점에서 지도부 없는 시위를 지향했고, 우산혁명이 비폭력이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며 평화시위를 거부한 것이었다. 그들은 폭력시위로 의사당을 점거했고, 본회의장에 난입해 기물을 파괴하고 현 체제를 조롱하는 낙서를 했다. 《리멤버 홍콩》의 저자를 비롯한 외신기자들은 시위대의 폭력성이 결국 중국 정부에 빌미를 주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홍콩 행정부는 시위대의 폭력을 비난하며 여론전에 나섰다. 하지만 홍콩 시민들 다수는 오히려 시위대에 지지를 보내며 사태를 키워온 정부를 비난했다. 실제로 용무파는 물리력을 행사하긴 했지만 굉장히 전략적으로 행동했다. 홍콩의 작가 둥카이청의 말을 빌리자면 시위대는 “질서정연하게 통제된 방식으로 기물을 파괴했다. 이 파괴는 상징적 행위이자 의사표시이고, 분노의 표출이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단 한 사람에게도 상처를 입치지 않았다.” 이후 이어진 시위에서 시위대는 한층 영리하게 시위를 전개해간다. 우산혁명의 실패를 교훈 삼아 무리하게 점령을 이어가지 않고 치고 빠지는 방식으로, 각자의 일상생활을 유지하면서 시위를 이어갔다. 물리력을 행사했지만 제한적으로 명확한 타깃(정부 기관과 중국의 국영 및 민영 기업 등)에 집중했다. 이런 방식이었기 때문에 폭력 행사를 싫어하는 홍콩시민들에게조차 지지를 받았던 게 아닐까 싶다. 2019년의 시위는 그해 11월 지방의회 선거의 거대한 승리로 이어진다. 4년 전 친중파가 18개 선거구를 싹쓸이한 선거에서 17개 선거구를 가져오는(친중파는 1개) 성과를 거둔다.
하지만 2020년 코로나가 전 세계를 덮쳤고, 시작은 중국이었다. 홍콩 시위도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로 시위가 불가능해진 틈을 타 중국 정부는 홍콩에서 국가보안법을 발효했고 홍콩 정부는 코로나 방역을 핑계로 2020년 9월로 예정되어 있던 총선거를 연기해버렸다. 격렬하게 타올랐던 정치적 열망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꺾여버린 셈이다.
중국이라는 초강대국, 게다가 국제 사회가 쌓아온 민주주의에 대한 보편적인 원칙들을 깡그리 무시해버리는 절대권력에 맞서는 일은 과연 얼마나 참담할까? 희망을 발견하지 못할 때 정치나 사회운동이 가능할 수 있을까? 한국은 아무리 크고 작은 문제가 많다고 하지만, 훨씬 더 역동적인 시민사회를 가지고 있고, 어느 쪽으로는 크게 변화할 여지가 많은 사회다. 권력층은 부패했을지 몰라도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가 중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수준으로 보장되어 있다. 한국에서 사회운동은 물론 굉장히 어려운 미션에 도전하는 일이지만, 불가능한 미션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내가 맞서는 게 한국 정부가 아니라 중국 정부였다면?’이란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몰입할수록 절망감도 함께 커져갔다.
절망만 하고 있는 것은 성격에도 맞지 않고, 활동가의 일과도 거리가 멀다. 섣부른 희망을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홍콩 시민들이 중국 정부와 맞서면서 스스로 경험하고, 깨닫고, 변화해온 양상이 정말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하면 늘 비폭력 행동이 폭력 시위보다 사회변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는 평화활동가로서 홍콩 시위대가 폭력 시위를 채택하고 시민들이 이를 지지했다는 사실은 좀 혼란스럽긴 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역시 맥락 아닐까. 폭력과 비폭력의 경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비폭력이 무기력해지는 것, 폭력이 폭력만 남는 것은 맥락을 살피지 않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다면 결국 홍콩 시위대가 이전의 실패를 살피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한 것의 의미를 우리는 홍콩 시위에서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홍콩 시위 때 이름 없는 한 조직이 만든 「홍콩 19 매뉴얼」이라는 자료집이 현재 미얀마어로 번역되어 미얀마 시위대의 매뉴얼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사회운동 활동가의 역할은 이런 게 아닐까. 절망에 지치지 않고 희망에 현혹되지 않으며 사회 변화를 위해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해내는 것. 동료 활동가들과 시민들이 함께 자신들의 몫을 마찬가지로 묵묵히 해나갈 거라고 믿으면서 내 몫의 일을 묵묵하게 해나가다 보면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발견할지도 모를 테니.
* 이 글은 전쟁없는세상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