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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Jun 13. 2021

그것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순간

짧은 리뷰

20대 때는 주로 문학을 많이 읽었다면, 30대 이후로는 문학보다 과학이나 수학 분야 책을 많이 읽는다. 읽다 보니 그 안에서도 내가 더 재미있게 읽는 분야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나는 과학사나 기술사처럼, 과학기술과 인간 사회가 맺은 연관성을 보여주는 책을 좋아한다. 사실, 순수하게 과학적인 연구나 이론이 어디 있겠나. 과학은 순수하더라도 과학자는 그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맥락 속에서 먹고 마시고 연구하고 생각하니 말이다. <그것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순간>은 과학기술사 책이다. 통사적인 서술 방식으로 역사를 정리하진 않는다. 이 책의 전체적인 구성에서 역사적 흐름을 찾을 수는 없다. 


이 책은 전체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과학기술이 어떻게 발달해왔는지를 정리하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일상에 아주 밀접하게 접하는 사물과 테크놀로지의 기원을 추적해가는 책이라고 보는 게 맞다. 멀리서 전체를 조망하는 게 아니라, 아주 근접해 있는 것들에서 전체의 모습을 짐작해보는 책이라고 하면 되겠다. 사실 나는 이렇게 각각의 사물들에 대해서 설명하는 책을 좋아한다. 현실문화 출판사 다닐 때 출간된 큐레이터 현시원 선생님이 쓴 <사물 유람>, 역사학자 주경철 선생님이 쓴 <히스토리아> 같은 책을 무척 재밌게 읽었다. 각각 일상과 그리 동떨어져 있지 않은 사물에 대해 이미지를 다루는 큐레이터의 시선으로 해설한 에세이와 역사학자가 바라본 각 사물의 역사적 기원을 설명한 에세이다. 이런 책들을 뒤적거리다 운 좋게도 같은 사물에 대해 각각의 전문가들이 다르게 설명한 글을 발견하면, 비교하며 읽는 것도 재밌는 일이다. 한 편 한 편이 완결된 형태라 자기 전에 한두 꼭지씩 읽고 자기도 좋다. 


과학기술사 연구자가 쓴 책이라서 아무래도 목차를 보면 반도체, 스마트폰, 인공지능 같은 최신 기술을 기반으로 한 사물이나 개념이 많다. 또한 다른 과학자에 비해 과학기술사 연구자가 갖는 특징인지는 모르겠으나 성수대교 폭발, 원자폭탄 개발, 후쿠시마 원전 사고, 세월호 침몰과 같은 사회적 비극도 다룬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재밌는 챕터들은 70년대 중반에 태어난 저자가 자라며 겪어온 일상적인 테크놀로지들이다. 라면, 전기밥솥, 에어컨, 아파트, 터널, 지하철 같은 것들을 다루는 장들은 저자가 살아온 시대를 함께 살아온 독자들에게 묘한 향수와 함께 새로운 정보를 전해준다. 너무나 일상적인 이 사물들을 테크놀로지라는 키워드로 읽어내면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가 숨어있구나, 감탄하게 된다. 





맛보기로 하나만 추천하자면 '우유'다. 우유가 무슨 테크놀로지냐고 반문할 수도 있는데 저자는 친절하게도 그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한다. '인간이 자연에 개입해 인공적인 편의를 만들어내는 것'이 테크놀로지라고 한다면 우유는 아주 정확하게 이 의미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우유를 마시면 배가 아프고 소화가 잘 되지 않는 유당불내증 인구가 80퍼센트에 해당하는 한국에서 우유가 전 국민의 식탁에 보급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뒤늦은 발전으로 인한 '서구식 근대화'의 정치적 열망과, 도시화의 물결에 따라 일손이 부족해진 가난한 농촌에 대한 대안으로 권장된 낙농업, 그리고 낙농업으로 늘어난 우유 생산량을 소모하기 위한 방책으로 우유 급식 시행 덕분이었다. 또한 젖소는 한국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잡종우를 만들어낸 유전학의 발달, 공장에서 가공한 우유를 전국 각급 학교에 신속하게 배달할 수 있도록 고속도로 등 교통 인프라 확충과 우유가 빨리 상하지 않도록 포장하는 식품공학의 발달이 함께 이루어진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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