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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Jul 31. 2021

선동열 야구학

짧은 리뷰


예상하지 못한 감동을 받았다. 난 기본적으로 업계의 최정상에 오른 엘리트들의 성공담을 즐기지 않는다. 타고난 재능과 운과 노력으로 일군 그들의 성과를 존중하고 존경하지만 그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일 테니.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 따라서 살아가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들이다.


심지어 선동열이라니. 한국 프로야구에서 선동열의 존재감을 수식할 수 있는 적절한 관용구가 없다는 게 유감이다.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국내 리그에서는 적수가 없었다. 보통은 누가 홈런을 치면 다음 날 스포츠신문 기사 제목에 "OOO 시즌 20호 홈런 작렬!" 이런 식으로 홈런 친 타자의 이름이 나오는데 선동열이 홈런 맞으면 "충격! 선동열 홈런 맞다!" 이런 식으로 제목이 나올 정도였다.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 종목에서 이 정도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냈던 선수가 누가 있을까? 내 기억으로는 NBA 리그에서 마이클 조던의 지배력 정도가 겨우 KBO 리그에서 선동열의 지배력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다. 메시, 호날두, 르브론 제임스, 스테픈 커리, 마이크 트라웃 세계 구기종목의 슈퍼스타들조차 선동열만큼 리그의 압살적인 지배자로 군림하지는 못했다.


그래서였는지, 감독 시절 선동열은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면서 뚱한 표정을 짓는 장면이 중계 카메라에 여러 번 잡혔다. 자신이라면 쉽게 스트라이크 아웃을 잡을 상황에서 연신 볼만 던지는 투수를 보면서 "아니 왜 스트라이크를 못 던지는 거야. 그 쉬운 것을'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걸 모르는 천재들 특유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많은 야구팬들은 기억한다. 또 하나, 감독 선동열은 야구 이론에 있어서 김성근 전 감독과 더불어 대표적인 '올드 스쿨' 스타일이었다. 어깨는 소모품이라는 현대 야구의 상식과는 다르게, 시즌을 준비하는 스프링캠프에서 투수들이 공을 3000개를 던져야 한다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3000개의 투구 수는 보통의 선발투수들이 한 시즌 동안 던진 투구 수와 비슷한 정도다. (이 책에서 선동열은 3000개 발언이 왜곡되었다며 그 맥락을 설명한다. 하지만 어쨌든 스스로도 올드 스쿨이었음을 인정한다.)


최고의 자리에서만 존재했고, 이미 이룩한 성과만으로도 굳이 새로운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될 거 같던 사람, 실패를 몰랐으니 확신에 가득 차 있을 거 같았던 전설과 같은 존재가 최신 야구 이론을 배우면 쓴 책이라고 하니 관심이 갔다. 옛날이야기만 지루하게 늘어놓더라도, 적어도 시대를 풍미한 거인의 발자취에 대한 사료로서의 값어치는 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나는 충격과 감동을 동시에 받았다.



야구팬이 읽은 《선동열 야구학》의 충격


유명인들이 쓴 책은 저자의 유명세만 있을 뿐 알맹이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유명인들의 책은 꼭 믿을만한 리뷰들을 찾아보고 난 뒤에 사서 읽는 편이다. 《선동열 야구학》은 일간스포츠에 연재될 때 몇몇 기사를 접한 터라 단행본이 출간된 걸 알고 난 뒤 의심 없이 바로 샀다.


나는 물리학이나 통계학에 남다른 조예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요즘 날고 기는 재야의 고수 야구팬들에 비하면 세이버매트릭스에 대한 이해도도 낮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야구를 좋아하고 특히 야구 기록 보는 걸 좋아했던 팬이다. WAR이나 WRC+를 구하는 수식은 모르지만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안다. 대중적인 야구책을 판단할만한 깜냥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아주 훌륭한 야구책이다.


선진 야구라 할 수 있는 메이저리그의 최신 야구 이론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 빅데이터의 등장과 선수들의 동작을 미세한 부분까지 나눠서 잡아낼 수 있는 촬영기술의 발달로 야구 최신 이론은 지나치게 전문화되어버렸다. 물리학과 통계학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으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 책은 어려운 이야기를 일반 야구팬에게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친절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선동열이 수학자나 과학자가 아닌 것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한 거 같다. 오랜 세월 쌓아온 경험이 어려운 물리학 통계학 이론을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을 제공했고, 수학 과학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대중의 시선에서 이를 설명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최신 이론을 설명하면서 탁월했던 점은, 각각의 이론이 뜻하는 바를 설명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런 이론이 등장한 배경을 하나의 이야기로 잘 엮은 것이다. 예컨대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유행처럼 번진 플라이볼 혁명에 대해서도, 플라이볼 혁명이 무엇인지 뿐만 아니라 왜 등장했는지를 설명한다. 한국의 야구 해설자들은 앞뒤 맥락은 삭제한 채 플라이볼 혁명이 어떤 내용인지만 설명하는 것과 사뭇 다르다. 이 배경 설명이 야구라는 스포츠의 기본적인 구성과 매우 부합한다. 야구는 기본적으로 공격과 수비, 즉 타자와 투수의 싸움이다. 투수들은 타자를 압도하려고 노력하고, 타자들은 투수를 이겨내려고 애쓴다. 새로운 투구 이론과 수비 이론이 나오면 그것을 깨기 위한 타격 이론이 나오고, 그러면 또다시 새로운 투구 이론을 개발하고. 이 과정이 야구의 발전인데, 《선동열 야구학》은 이 발전 과정을 아주 정확하게 보여준다.


기술의 발달로 투수들이 과거보다 빠른 강속구를 던지게 되고, 빅데이터 연산 능력의 발달로 수비 시프트 전술이 보편화되면서 타자들이 불리한 시대가 되었다. 이에 타자들의 생존 전략이 바로 플라이볼 혁명이었다. 수비 시프트에 안 걸리도록, 그리고 강속구를 대처하기 위해 개발한 방법이다. 홈런과 함께 삼진이 늘어났기 때문에 모 아니면 도인데, 어쨌든 기대 득점은 늘어났으니 성공적인 전략이다.


이처럼 《선동열 야구학》은 야구라는 스포츠의 가장 본질적인 매력을 보여주면서 그 안에서 최신 이론의 발전 방향을 알기 쉽게 설명한다. 근래 읽은 야구책 중에서 가장 탁월한 구성이다.



활동가가 읽은 《선동열 야구학》의 감동


야구책으로도 손색없지만, 이 책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 것은 선동열의 태도 때문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최고도 보통의 최고가 아닌 존재가 바로 선동열이었다. 리그가 발전하면서 선수들 간의 격차가 줄어든 현대 야구에서는 아마도 선동열이 거둔 업적을 넘어서는 선수가 나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감독 선동열 또한 선수 선동열만큼은 아니지만, 그리고 올드 스쿨을 비롯한 논란은 있지만 어쨌거나 삼성 왕조의 불펜 야구를 만들고 우승도 여러 차례 한 명장이었다. 그런 그가 쓴  반성문이 《선동열 야구학》이다. 그것도, 한국 스포츠 스타 특유의 겸손함의 표현으로서 반성이 아니라 아주 처절한 반성이고, 반성에 그치지 않고 그를 바탕으로 새롭게 배우고 공부한 과정과 결과를 보여주는 적극적인 반성문이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는 감옥에 가 있는 전직 대통령만의 화법이 아니다. 성공을 거둔 사람은 자신의 경험에 갇히기 쉽다. 성공으로 증명했으니 그의 경험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선동열은 안온한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 새로운 공부를 이어간다. 선동열의 공부는 단순히 최신 이론을 장착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최신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흡수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하며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메이저리그와 한국 프로야구를 비교하고 선수들의 특징을 파악하면서 최신 이론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유연하게 변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메이저리그에선 강속구 시대에 맞선 타자들의 생존전략이었던 발사각 혁명이, 투수들의 속구 스피드가 그다지 늘어나지 않은 한국 프로야구 리그에선 효과적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배움에 대한 편견 없는 열정만이 선동열이 주는 놀라움이 아니다. 어쩌면 최신 이론 습득보다도 더 크게 달라진 것은 야구를 바라보는 선동열의 시선이 아닐까. 그는 과거에서는 감독이나 코치가 선수를 지도하는 것을 군대식 표현인 '조련'이라고 불렀는데 요즘은 '육성'이라는 말을 쓴다고 하면서, 조련도 육성도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 일본이나 미국보다 학생야구 육성 시스템이 부족한 한국에서는 프로야구에서도 어느 정도 육성이 필요하지만 프로선수들을 학생처럼 보는 것은 잘못이라면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또 하나 인사 깊었던 점은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현재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다시 말해 세계 최고의 투수)인 제이콥 디그롬의 예를 들면서, 재능과 훈련뿐만 아니라 연구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제이콤 디그롬이 최고의 투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남들 다 하는 훈련과 더불어, 연구와 공부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디그롬은 나이를 먹고 나서도 계속 발전했는데 효과적인 훈련법에 대한 연구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보통 성공한 선수들은 재능과 훈련 운이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고, 운 또한 선수들이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모두들 훈련의 중요성을 말한다. 그런데 선동열은 더 나아가 공부의 중요성을 말했다. 듣고 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스포츠 선수에게 공부를 강조한 사람들, 그것도 무작정 주장만 하는 게 아니라 그 필요성을 데이터와 근거를 가지고 이렇게 공들여 설득력 있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스포츠 선수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운동 활동가들도 공부를 해야 한다. 사회운동을  잘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선동열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또한 과학적이고 논리적분석을 바탕으로 효과적인 방법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야구 선수들처럼  방법을 몸에 익히기 위해 연습을 해야 한다. 사람들이 하는 일은 대단한 왕도가 없다. 선동열 같은 천재들도 결국 마찬가지지 않은가. 편견 없이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고, 질문을 멈추지 않는 , 공부를 통해 배운 것을 지속적으로 연습하는 . 물론 그런다 해도 실패할 수도 있다. 공부와 훈련 말고 운도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하지만 공부와 훈련이 없다면, 운이 아무리 좋아도 무조건 실패한다. 그리고 공부와 연습을 해야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어쩌면 성공과 실패보다  중요한 , 바로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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