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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Sep 08. 2021

DP가 드러내는 폭력이라는 자화상

스포일러 처음부터 있습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DP〉시즌1의 마지막 장면(쿠키 영상)은 매우 상징적이다. 내부반에서 괴롭힘과 구타를 당하던 조석봉 일병의 탈영이 결국 황장수 전 병장의 납치와 자살 미수로 끝나며 일단락되는가 싶었지만, 마찬가지로 자신의 내부반에서 괴롭힘을 당하던 조석봉의 친구가 조석봉의 뉴스를 내부반 텔레비전에서 보다가 총기 난사를 하면서 끝이 난다.


많은 분들, 특히 군대에 갔다 온 예비역들이 이 이야기를 대한민국 군대의 현실을 잘 고발한 드라마라고 이야기한다. 더러는 자기 경험에 기반해 고증이 잘못되었다고 요즘 군대 저러지 않는다고 드라마를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군대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좀 다른 측면에서 이 드라마를 봤다. 군대 내 가혹행위라든지 사병들이 겪는 현실을 제대로 고발한 드라마라는 평가가 타당하긴 하지만, 군대 고발 드라마로만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협소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드라마 〈DP〉는 군대 내부의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면서 동시에 군대 밖에도 만연한 '폭력'에 대한 이야기다.



군대에 대한 드라마? 폭력에 대한 드라마!


이 드라마가 이토록 인기를 끄는 것은 나처럼 군대에 가지 않은/못한 사람들에게도 어필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군사주의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이 겪은 폭력에 대한 다양한 경험과 감각이 이름조차 생소한 DP(탈영병 체포조) 이야기를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로 만든다. 군대는 폭력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장소인 동시에 한국사회에 내재한 폭력에 대한 은유다. 폭력의 속성과 작동방식을 탁월하게 보여주는데, 폭력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이만큼 충실하게 해낸 드라마를 본 적이 없다.  


조석봉이 자살 시도를 하기 직전 터널에서 DP조의 한호열 상병(구교환)은 조석봉을 설득하면서 바꿔가자고 이야기하지만 조석봉은 이렇게 대답한다. "저희 부대에 수통 있지 않습니까. 거기 뭐라고 쓰여있는지 아십니까? 1953(년). 6·25 때 쓰던 거라고…. 수통도 안 바뀌는데 무슨." 군대는 과연 절대 변하지 않을까?


단순한 수치만을 비교하자면 변했다고 할 수도 있다. 2011년에는 군기사고로 101명이 목숨을 잃었고 그 가운데 자살 사건이 97건이었는데, 이 숫자는 점차 줄어들어 2020년에는 44명이 군기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그 가운데 자살은 42명이었다.(출처: e-나라지표) 겉으로 드러난 수치는 줄어들었지만 폭력이라는 본질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현실에서 너무 쉽게 찾을 수 있다. 당장 최근 연달아 드러나는 군대 내 여군에 대한 성폭력 사건들, 그리고 해결이 요원해 보이는 사이 피해 여군들의 극단적인 선택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것만 봐도 군대 내 폭력의 본질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DP의 많은 장면은 폭력이 구조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쿠키 영상에서 조석봉의 친구가 내부반에서 괴롭힘을 당하다가 총기를 난사하는 장면은 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인 동시에 변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은유인데, 변하지 않는 이유는 폭력이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구조이기 때문이다. 폭력이 하나의 사건이었다면 조석봉의 탈영과 자살 시도에서 끝이 났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황장수에게 괴롭힘 당하던 조석봉이, 학원에서 봉디(조석봉+간디)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그 조석봉이 후임병들을 괴롭히는 사람이 되는 것 또한 폭력이 권력의 문제이고 구조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권력이 작동하지 않는 물리력은 사회적인 의미에서 폭력이 아니다. 호랑이가 고라니를 잡아먹는 것을 우리는 폭력이라 하지 않지만 병장이 이등병을 폭행하는 것은 폭력이 되는 것이다. 그 권력은 황장수든, 조석봉이든 가리지 않는다. 폭력의 구조가 사람들을 피해자로, 방관자로 다시 가해자로 만드는 것이다. 원작 웹툰에서 김보통 작가는 주인공 안준호의 입을 통해 "내가 특별히 선해서 탈영병을 쫓는 것이 아닌 것처럼, 탈영병도 특별히 악해서 탈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차이가 있다면 나에게는 그가 탈영을 결심하게 된 그 상황이, 사건이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 정도라고, 솔직히 생각한다"고 말한다. 꼭 탈영만이 아니다. 권력이 작동하는 폭력이란 특별히 악한 사람이 저지르는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악한 행동을 해도 괜찮은 분위기를 만드는 힘이다. 그러한 거대한 구조 앞에서 때때로 개인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


그 구조 안에서 개인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이 어쩌면 방관자일 수도 있는 것이다. 가해자가 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는 엄청난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방관자 또한 폭력의 구조를 떠받드는 적극적인 역할이다. 프리모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방관자들의 책임을 통렬하게 지적한다.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중략) 나는 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한다." 개인으로서 최선의 노력조차 폭력의 구조의 일부라면, 우리는 더 이상 폭력에 대한 저항을 개인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 폭력이 사회 구조의 문제라면 그것을 푸는 일도 사회적인 일이어야 한다.



군대는 어떻게, 왜 폭력에 대한 면죄부가 되는가


군대 바깥 사회에 만연한 폭력에 대한 은유라고 하더라도, 이 드라마를 보고 군대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일부 남성들이 드라마 〈DP〉를 남성판 《82년생 김지영》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제 알겠지?"와 같은 질문이 아니다. 그런 질문은 폭력의 구조를 바꾸기보다는 더 공고하게 할 뿐이다.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은 이런 것이다.


"왜 군대는 다른 사회 조직보다 폭력이 만연한가? 왜 군대에서의 폭력은 쉽게 은폐되고, 평범하고 멀쩡한 사람들까지 폭력에 다양한 방식으로 가담하게 만드는가?"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유는 위계적인 권력구조다. 폭력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니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구조가 폭력이 자라기에 좋은 토양인 것은 틀림없다. 나는 여기에 하나를 더 생각해본다.


폭력이 군대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안보라는 이름으로 치장하고 있지만, 군대가 추구하는 안보는 철저하게 군사적인 수단으로 지키는 안보, 물리적 폭력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안보다. 상대방보다 강한 군사력으로 전쟁을 억제하거나, 전쟁이 일어나면 전투를 펼쳐 상대방을 무찌른다. 평화를 위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이 군대다. 평화적인 수단으로 안보를 지키는 일은 군대의 일이 아니다. 평화적인 수단으로 안보를 지킬 수 있다면 군대의 역할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이럴 때 군대는 새로운 적을 만들어야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증명한다. 냉전이 끝난 뒤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적을 만들어내서 전쟁을 이어가는 미군이 대표적인 예다.(아마도 지구상에 에서 새로 만들 적이 없어진다면 미군은 우주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며 군사력을 강화할지도 모른다.)


폭력이 정당성을 얻는 곳, 다시 말해 폭력에 면죄부를 주는 곳이라는 특성이 군대에서 병사들 간에 폭력이 쉽게 일어나게 되는 데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닐까? 비록 법적으로 면죄부를 받는 것은 국가의 폭력인 공권력이지만, 폭력에 대해 무뎌진 감각이 사병들 개인 관계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자기한테 왜 그랬냐는 조석봉의 질문에 황장수 병장이 "그래도 되는 줄 알았으니까"라고 대답한 것은, 폭력이 괜찮다는 감각의 무의식적인 발로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군대에서의 폭력을 줄이는 근본적인 방법은 결국 폭력에 의존하는 안보, 폭력적인 수단으로 이루는 평화라는 전제를 바꾸는 것이다. 물론 군대는 전투를 목적으로 하는 집단이니, 군대 스스로 이를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정부와 사회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우리의 평화와 안보를 군사력에 의존하기보다는 다른 평화적인 수단에 의존하고, 군사력은 정말로 최소한으로 유지하는 방식으로 군대를 재편한다면 군대 내의 폭력은 상당수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군대에서의 폭력이 은폐되는 것은 민주주의의 파괴와도 연관된다. 군대는 안보를 이유로 민주주의의 억제를 정당화한다. 당장 유신시대 유신 헌법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국가 안보가 무엇보다 우선 될 때 민주주의는 작동할 수 없다. 민주주의의 중단은 얼핏 생각하면 정보의 은폐와 독점 혹은 시민에 의한 감시와 운영을 떠올리기 쉽다. 물론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들이다. 하지만 어쩌면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을 때 더 심각한 문제는 저항의 권리가 사라진다는 데 있다. 저항하지 못하는 개인은 고립되고 무력해져 결국에는 가해자가 되거나 방관자가 되어 폭력의 구조에 동화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군대 내 폭력의 근절을 위해 필요한 또 하나의 조치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민주주의의 회복이다. 군인들이 부당한 명령이나 폭력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군의 기강이 무너진다고, 큰일 날 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 그런 생각이 군대 내 폭력을 사라지지 않게 만든다. 정말로 큰일 날 일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군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군대를 그대로 두는 것이다.



시즌2를 기대하며


언론에서 드라마 〈DP〉에 관한 기사가 쏟아지고 있다. 문화면뿐만 아니라 사회면에서도 이 드라마를 계기로 군대 내 가혹행위나 사병에 대한 인권침해를 이야기하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온다. 대선 후보들은 너나할 것 없이 인기 드라마를 언급하며 자신의 입맛에 맞게 이야기한다. 아무쪼록 드라마를 계기로 터져나온 많은 말과 생각들이 이대로 사라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워낙 인기가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모두들 시즌2를 기대한다. 나 또한 시즌2를 학수고대한다. 바람이 있다면 시즌2에서는 암울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뿐만 아니라, 폭력에 저항하는 이들의 이야기도 들어가면 좋겠다. 


 




*이 리뷰를 조금 수정하고 보완해서 오마이뉴스에 기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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