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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Jan 24. 2023

이해할 수 없는 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드라이브 마이카, 방금 떠나온 세계


1월의 마지막에 본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세 시간이나 되는 러닝 타임이 부담스러웠지만 의외로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여러 점에서 인상 깊은 영화였는데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김초엽의 소설 《방금 떠나온 세계》가 떠올랐다. 지극히 사실적인 영화와 SF 장르 소설 사이에 유사성이 무엇이 있을까 싶지만, 작품이 품고 있는 질문과 작품이 묘사하는 어떤 지점들에서 내게 머릿속에 어렴풋하게 떠오른 것들이 있었다. 그 생각과 느낌을 기록으로 남기려 리뷰를 쓴다.



끝내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주인공 가후쿠는 연극 연출가다. 아내는 잘 나가는 방송작가. 둘 사이 딸이 있었지만 어렸을 적에 병으로 죽었고 그 뒤 낙담의 세월을 보냈다. 아내는 섹스에서 오르가슴을 느끼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절정의 순간 이야기를 하고 다음 날 다 까먹으면 주인공이 다시 들려주는 식으로 창작활동을 한다. 그러다가 주인공은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다. 외도라고 말하기도 좀 이상한 게 아내는 분명히 주인공을 깊이 사랑하고, 잠자리를 함께한 다른 남자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아마도 창작을 위한 오르가슴이 필요했던 것일까? 주인공은 아내를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이 문제를 이야기할 용기도 없다. 아내가 자신을 떠날까 봐. 어느 날 아내가 먼저 결심을 한 듯 출근하는 주인공에게 이따가 밤에 이야기 좀 하자고 하지만, 집에 돌아온 주인공이 발견한 것은 쓰러져있는 아내였고, 아내는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자신을 사랑하지만 다른 남자들과 잠자리를 이어가는 아내를 주인공은 끝내 이해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사랑을 포기하지도 못한다.

《방금 떠나온 세계》 또한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묻는 단편집이다. 김초엽의 인터뷰를 보면 그는 "완전한 이해는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김초엽의 소설이 여느 SF 소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디스토피아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김초엽 소설의 인물들은 희망을 값싸게 소비하거나 무턱대고 믿어버리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절망에 잠기거나 냉소하지도 않는다. 끊임없이 노력할 뿐이다. 작가는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고 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은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영화의 주인공 가후쿠는 김초엽 소설 속 인물들만큼 아내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지는 않는다. 어쩌면 이해할 수 없다고 포기한 것일지도. 인물들의 태도는 다르지만 영화가 관객에게 묻는 것은 소설의 질문과도 같다고 느꼈다. 우리는 끝내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을 기어코 이해할 수 있는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사랑할 수 있는가?



장애를 다루는 방식


김초엽 작가의 소설은 장애를 다루는 데 있어 탁월한 성취를 보여준다. 특히 장애와 테크놀로지와 일상을 다룬 논픽션 《사이보그가 되다》 이 출간된 뒤에 나온 《방금 떠나온 세계》에서는 장애가 등장인물들의 정체성이면서도 동시에 장애를 특별하게 다루지도 않는다. 장애인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 대부분의 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장애인이 등장하는 작품에서도 여전히 비장애인(보편)과 대비되는 특별한 존재(특수)로 그려지기 일쑤다. 불쌍한 사람이라는 시혜적인 시선, 무능력한 사람이라는 차별적인 시선이 캐릭터에 담긴 경우가 많다. 반면 김초엽의 《방금 떠나온 세계》는 이해와 관계와 소통과 결핍에 대해 말할 뿐이다. 다만 그 생생한 사회의 관계망 속에 놓여있는 인물들이 각자의 장애를 갖고 있고, 당연하게도 그들의 장애는 그가 맺는 관계, 이해, 소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누구나 경험하는 보편적인 경험 속에 녹아들어 가 있는 개별성으로 장애는 자연스럽게 존재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중반부 이후 줄거리는 가후쿠가 연출한 '바냐 아저씨' 연극 준비 및 상연 과정이다. 그 연극에서 가후쿠가 소냐 역으로 캐스팅한 이유나는 들을 수는 있지만 말을 하지 못하고 수어를 쓴다. 수어를 쓰는 연극배우라니. 나는 그 설정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연극은 청각 언어가 중요한 수단이고, 청각 언어가 배재된 연극은 상상해 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무성영화도 있는 마당에 대사가 없거나 소리가 없는 연극이 불가능한 것도 아닌데 그리 생각했다. 물론 '바냐 아저씨'의 소냐는 대사가 있다. 이유나는 오디션, 연습, 연극 상연 내내 수어로 연기를 한다. 영화는 이 장면들을 특별하게 다루지 않으면서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다루지도 않는다. 대본을 외우고, 감정을 연기하는 것이나 상대 배우와 합을 맞추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고, 그런 것들이 너무 자연스럽게 묘사되어 있다.



언어와 소통


사실 가후쿠의 연극은 여러모로 실험적이다. 가후쿠는 한국 수어를 쓰는 배우뿐만 아니라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를 쓰는 배우들을 캐스팅한다. 배우들은 다들 각자의 언어로 대사를 한다. 관객들은 무대 한편에 마련된 스크린에 흘러나오는 자막을 보며 대사를 이해한다. 반면 배우들은 대본을 다 외우지 못한 초기 연습단계에서는 상대 대사의 내용을 알지 못해 연기를 어려워한다. 가후쿠는 왜 다양한 언어로 공연하는 연극을 연출했을까? 연극이론을 모르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소통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이들의 소통. 그때 다른 언어는 음성 언어들 사이의 차이만이 아니다. 수어와 음성언어의 차이만큼이나 같은 음성 언어인 중국어와 한국어 사이의 차이도 크다. 어차피 모르면 하나도 못 알아듣는다. 알아듣지 못하는 대사를 서로 주고받으며 연기하는 연극배우들을 통해서, 언어와 소통에 대한 이야기를 가후쿠는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김초엽의 소설에서도 소통은 중요한 키워드다. 결국 이해의 부재는 소통의 불가능성에서 나온다. 김초엽 소설의 인물들의 소통이 어긋나는 지점 또한 음성 언어 사이의 문제만이 아니다. 물론 《행성어 서점》에서 처럼 다른 언어군 사이의 이해와 소통이 어긋나는 이야기도 있지만, 김초엽이 다루는 소통과 이해의 불가능은 언어적인 방식을 뛰어넘어 있다.


1년 전에 쓰다 못쓴 리뷰는 여기에서 끝나 있다. 이해에 대해, 사랑에 대해, 소통에 대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가득했지만 그걸 내 언어로 풀어낼 수 없었다. 그래서 미완인 채로 글을 남겨두었다. 물론 1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나는 그때 나의 느낌과 생각을 표현해 낼 재간이 없다. 언어가 없어서일 수도 있고, 생각이 덜 여물어서 일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김초엽의 다른 책을 읽고 못다 쓴 리뷰를 이렇게 이어갈 수 있을 거 같다.


이해할 수 없는 이를 사랑하는 일은 바꿔 말하면 사랑하는 이를 이해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떤 세계를 마주하는가를 질문하는 일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주인공처럼 <로라>의 주인공 애인처럼. 이해는 소통을 전제로 한다면 우리가 이해라고 생각하는 것도 결국엔 오로지 자신만의 착각이거나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상태를 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소통이 불가능다면 이해도 온전한 이해라는 것도 불가능할테니까.


그렇다고 소통의 불가능성이 꼭 나쁘기만 한 걸까? 그건 어쩌면 애초에 우리가 개입할 수 없는 자연법칙 같은 게 아닐까? 김초엽 작품에서 불가능의 의미는 소통의 포기가 아니라 불가능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오해에서 우연히 생성되는 관계의 새로운 가능성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김초엽 작품에서 소통은 '부재'한 것이 아니라 '불가능'할 뿐이고 김초엽 소설의 인물들은 낙담하기보다는 노력하는 게 아닐까. 불가능을 받아들인 채로, 오해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가능성을 찾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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