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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Jan 24. 2023

책과 우연들

짧은 리뷰

황수영이 나한테 "평화활동가 중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한 까닭은 내가 두 번째 책에 김초엽 작가의 추천사를 받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추천사를 받은 날에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 김초엽에게 추천사를 받았으니 됐다고, 출판사에겐 미안하지만 내 책은 안 팔려도 상관없다고 이미 이 책은 많은 것을 이뤄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정말로 잘 안 팔린다ㅠㅠ)


기본적으로 덕질을 잘하지 못하는 성격인데 그럼에도 내가 무척이나 좋아해서 내 딴에는 어마어마한 덕질을 하는 창작자들이 있다. 가수로 치자면 모든 앨범을 다 가지고 있는 시와, 이소라가 그럴 것이고 소설가 중에는 단연 김초엽이다. 나는 김초엽 작가가 발행한 단행본을 다 샀다. 


《책과 우연들》은 가장 최근에 낸 책인데, 아껴 아껴 읽었다. 나는 원래 맛있는 음식은 남겨뒀다가 가장 나중에 먹는 편이다. 후다닥 읽고 싶은 마음 꾹 참고 아껴 읽었다. 그리고 나는 원래 물건을 함부로 쓰는 편이고 책도 가방에 아무렇게나 넣어 다니며 읽어 잘 망가지는데 이 책은 깨끗하게 읽고 싶어서 여행 갈 때도 안 가져 가고 평소에도 어디 가져가지 않고 집에서만 읽었다.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책을 볼 때 발견하게 되는 것들도 있겠지만 나는 작품과 작가의 맥락 속에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그 작가의 작품 세계에서 이 작품이 어떤 자리에 위치해 있는지, 혹은 그 작품이 발행된 시공간에서 그 작품은 어떤 맥락을 가지고 있는지, 같은 것들을 알고 본다면 글자와 글자 사이에 담긴 의미를 훨씬 풍성하게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책과 우연들>은 김초엽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꼭 읽어야 할 김초엽 월드 설명서 같은 책이다. 설명서라고는 했지만 김초엽의 작품세계와 김초엽 작품의 세계관이 아니라, 소설가면서 직업인인 김초엽이라는 사람을 이해하게 해주는 책이다. 김초엽 작가를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이 책을 좋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김초엽 작품의 특징은, 그러니까 내가 김초엽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한데, 세상은 어두워도 인물들은 어둡지 않다는 것이다. SF 장르소설인데 지나치게 밝다는 비판을 김초엽 작가도 듣는다고 하니 내 감상이 틀린 것만은 아닌가 보다. 그런데 SF는 밝으면 안 되나? 망가진 세계에서는 인간들도 모조리 망가져 있거나 우울해야만 하는가? 어떤 책인지 기억은 안 나는데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의 수용자들조차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노동에 대해 어떻게든 더 잘할 방법을 궁리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우슈비츠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감옥에서 만난 사람들도 그랬다. 재판받는 중이어서 대체로 짜증이 나 있고 화가 가득 차 있던 구치소 사람들도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가꾸고 그것에 기뻐하려 애쓰기도 했다. 만약 김초엽의 인물들이 무슨 소년 만화 주인공처럼 대책 없이 낙천적이었다면 나도 썩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구체적인 시공간에 붙박여 흔들리고 고뇌하고 무너지면서도 결국엔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어떤 기운, 섣부른 희망을 기대하지 않고 어설픈 절망에 허우적대지 않는 그런 종류의 빛, 찬란하기보다는 은은하고 둥그스름한 종류의 빛, 희망이라기보다는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태도에 가까운 그런 밝은 기운을 나는 김초엽 작품의 인물들에게서 느낀다. 


《책과 우연들》을 보면 김초엽 작품의 인물들이 왜 그런 특성을 가지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나의 이해가 오해에 기반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김초엽의 인물들이 당연하게도 작가를 닮아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피해 갈 수 없는 자연법칙에 따른 우주의 영원한 죽음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멸망을 치닫는 세계를 꿋꿋하게 기록하는 소설 속 화자라든가, 거대한 우주와 무정한 자연의 법칙에 맞서 실패하고 무너지고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지만 무력함을 넘어서는 인물들에 대한 경외감을 이야기한다.(245쪽~246쪽) 나는 이런 이들-"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 속에서 낙관을 찾"으려 노력하는 이들의 모습을 김초엽 작가가 자신의 책에 담고 싶어 한다고, 아니 작가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한다고 느꼈다. 마지막 챕터에서 김초엽 작가는 "이제 나는 과학이 우리가 가진 최선의 도구라고 확신하지 못한다"고 고백(?)하는데, 이것이 절망의 표현이 아니라 과학의 쓸모 즉 "우리가 알고자 하는 마음"의 쓸모에 대해 새로운 고민을 열어가는 다짐으로 읽힌다.


나야 뭐 김초엽의 팬이니 이런 책이 마냥 좋은 게 어쩔 수 없는 일인데, 만약 김초엽 작가의 팬이 아닌 사람에게는 어떨까? 그런 경우라도 나는 이 책을 읽는 것이 무척 재밌고 즐거운 독서 경험을 선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소설가라는 직업, 특히 SF 장르 소설가라는 직업인의 일상과 노동을 보여주는 에세이기 때문이다. 독서 에세이를 표방하고 있지만 김초엽은 독자이자 창작자인 자신의 위치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이 책을 써 내려간다. 원래도 책 읽기를 좋아하지만 쓰기 위해 읽는 사람과 읽는 게 좋아 읽는 사람의 독서는 다를 수밖에 없다. 쓰기 위해 읽는 사람의 독서는 쓰기라는 행위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김초엽은 자신이 읽은 책들을 작가로서 자신의 성장과 자신의 작업 속에 위치시키며 창작자의 쓰기와 읽기를 두루 보여준다. 나는 독서 에세이라고 해서 '서평집을 조금 에세이 형식으로 썼나 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아니었다. 오히려 읽기를 중심으로 써 내려간 소설가의 글쓰기 에세이라고 해도 무방할 거 같다.   


직업인들의 노동과 생활을 들여다보는 일을 즐거워하는 사람이라면, 예를 들면 '생활의 달인' 프로그램이나, 다른 직업인들의 에세이를 즐겨 읽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읽는 일 또한 즐거울 것이다. 특히 소설가, 작가는 남들이 보기에 근사해 보이는 직업이지만 결국 인간이 하는 노동이라는 것을, 그 노동이 지겨우면서도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책과 우연들》은 보여준다. 과연 이걸로 밥벌이를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이야기들, 자신이 과연 재능이 있는지를 늘 반문하며 업계의 다른 이들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하는 모습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긍정과 잘하지 못하는 일에 대한 솔직한 고백들은 여느 생활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모습들이다. SF 마니아도, 순문학 창작 전공자도 아니라서 좌충우돌하며 자신만의 작업 방식을 찾아가는 일련의 과정들과 그렇게 형성된 글쓰기와 독서에 대한 자신만의 기준에 대한 이야기들은 소설가의 작업실을 지켜보는 것 같은 경험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이 책은 자신의 실패의 기록이고, "실패에서 시작되는 가능성"에 대한 기록이고, 가능성을 찾는 노력의 흔적이고, 실패와 노력을 쌓아가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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