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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Jan 21. 2023

[옥플릭스] 다시, 드라마를 보게 되다

드라마 <서울 1945>


2006년 8월 17일 금요일, 나는 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 재판부에서 법정 구속된 뒤 인천구치소에 수감되었다. 병역거부자들은 다른 정치범들과 달리 자기가 감옥에 날짜를 알고 있다. 감옥생활이 두렵긴 해도 구속이 당황스럽진 않았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 책이며 친구들 주소, 우표 같은 것들을 전쟁없는세상에 보내달라고 부탁하고 나는 유유히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 고 생각한다.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는다. 친구들 여럿이 법원에 같이 갔는데 누가 갔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수감되기 전 나는 한동안 TV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 원래는 드라마를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대학에 입학한 뒤 집에 붙어있지를 않으니, 지금처럼 모바일이나 노트북으로 드라마를 보던 시절도 아니었으니,  드라마를 볼 도리가 없었다. 대학 입학 후 감옥 가기 전까지 내가 본 드라마는 4편이 전부다. 네 멋대로 해라, 아일랜드, 태릉선수촌, 떨리는 가슴. 모두 다 드라마가 끝난 뒤 CD에 구워서 봤다. 결과적으로 나의 드라마 시청은 감옥에서 다시 시작됐다.


나보다 앞서 감옥에 간 나동혁, 임재성 같은 친구들에게 감옥 생활에 대해 상세히 듣기는 했지만, 백문이 불여일견. 그래도 무척 긴장되었을 것이다. 만만하게 보이지 마라던 나동혁의 조언을 마음에 새겼던 걸로 기억한다. 인천구치소 신입방을 거쳐 미결방으로 옮겼다. 바다이야기라고 도박게임장 사건이 터졌을 때라 감옥이 유난히 붐비는 시기였다. 


방 안에는 조그만 텔레비전이 하나 있었다. 채널은 고정되어 있고 전원만 껐다 켰다 할 수 있었는데, 그나마도 중앙에서 통제를 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방송만 봐야 했다. 교정당국은 드라마, 예능, 뉴스를 적절히 배분해 정해진 시간에 틀어줬다. 내가 텔레비전을 보기 싫어도 방법이 없었다. 물론 방 사람들을 모두 설득하면 텔레비전을 끄고 책을 읽는다든지 할 수 있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무료한 감옥의 시간을 달래는데 텔레비전만 한 것이 어디 있겠나. 지금도 나는 만약 넷플릭스를 볼 수 있다면 감옥살이도 좀 괜찮겠다고 생각할 정도니. 


아무튼 채널 선택권이 없다 보니 교정시설의 담당 교도관의 안목이 중요했다. 지금은 전국의 교정시설이 같은 방송을 본다고 하는데 2000년대에는 구치소, 교도소마다 각자 알아서 프로그램을 녹화해서 틀어주었다. 무슨 드라마를 틀어줄지는 전적으로 담당 교도관의 취향에 달려있었다. 특별히 교도관들과 친한 사람들은 특별히 보고 싶은 드라마를 골라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인천구치소에 들어갔을 때, 그때 텔레비전에서 나온 드라마 중에 내 눈길을 이끈 것은 서울 1945였다. 


서울 1945는 제목 그대로 1945년 서울을 배경으로 한다. 얼핏 여명의 눈동자랑 비슷한 느낌이었다. 해방 정국의 좌우 대립 속에서 여명의 눈동자처럼 여자 주인공을 돕는 남한 고위 군인이 있고, 결국 여자 주인공은 친절하고 자상한 서브 남주를 떠나 자기가 사랑하는 북한군 군인에게 가고 전쟁터에서 고생고생한다. 여명의 눈동자와 빗대어 보면 김호진이 박상원이고, 한은정이 채시라고, 류수영이 최재성 역할과 겹쳤던 거 같다. 


<씨네21>이었나 다른 매체였나 아무튼 주인공인 최운혁(류수영 분)은 이강국을, 김해경(한은정 분)은 김수임을 모델로 만든 캐릭터라는 이야기를 보고 관심이 더 생겼던 거 같다. 박헌영의 동지로 한국전쟁 후 간첩혐의로 김일성에게 처형당한 비운의 혁명가 이강국과 미군정에서 통역으로 일하며 미군 존 베어드와 함께 살면서 연인 이강국이 북한으로 탈출하는 걸 도왔고 월북을 도왔고 훗날 역시나 간첩 혐의로 사형을 당하는 김수임. 이강국은 북한에서 미국의 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하고, 김수임은 남한에서 북한의 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했다는 정말 드라마 같은 이야기로 만든 드라마였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입소하고 나서 얼마 안 가 드라마가 끝났기 때문에 나는 드라마 주요 줄거리와 인물들도 채 파악하지 못했다. 제대로 봤다고 할 수도 없는 이 드라마가 기억에 남아 있는 건, 감옥에서 처음 본 드라마인 데다가 이소라가 부른 드라마 OST가 너무 좋아서였다. 줄거리가 이해되지 않아도 '개희의 노래'를 듣는 장면들에서는 모르는 이야기에 나는 한없이 몰입할 수 있었다. 이제 막 수감되어서 출소할 때까지 이 노래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개희의 노래 


감옥에서 본 드라마를 정리해보고 있습니다. 옥플릭스 로고는 이승한님이 만들어주심.



서울 1945


연출: 윤창범, 유현기

각본: 이한호, 정성희

출연: 한은정(김해경) 류수영(최운혁), 소유진(문석경), 김호진(이동우)

방송국: KBS1

방송시기: 2006.01.07.~2006.09.10 



서울 1945 오프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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