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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Jan 20. 2023

카피 쓰는 법

짧은 리뷰

전쟁없는세상처럼 조그만 단체에서는 홍보도 결국 활동가들이 알아서 해야 한다. 홍보 전문가가 있거나 전문가까지는 아니라도 홍보를 전담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일 뿐이다. 구멍가게에선 사장이 경리이며 경비이듯이, 조그만 단체에서 일하는 활동가들은 모두가 홍보 담당자일 수밖에 없다. 전문적으로 들어가면 전문용어가 난무하는 신세계가 존재하겠지만, 그냥 피상적인 수준에서 경험을 바탕으로 이해하자면 홍보는 거칠게 구분하자면 크게 두 가지의 요소로 나뉘는 거 같다. 이미지와 텍스트. 


이미지는 말 그래도 그림이나 사진. 잘 만든 이미지 하나, 잘 찍은 사진 하나는 열문장보다 강렬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사진이든 웹포스터는 잘만들 수 있는 미적 감각이 없다. 그런 능력까지 갖춘 이들이 드물게 있지만 나는 아니며, 나는 내 이미지 작업 능력이 별 볼 일 없음을 슬퍼하기보다는 잘 만든 웹포스터를 보면 따라하는 식으로 부족한 것을 채우려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요령이 생겼다. 미학적으로 잘 만드는 거는 내가 노력한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그냥 깔끔하게 만들기로 했다. 뭐 전문 디자이너도 아니고, 유료폰트나 유료이미지를 쓰는 것도 아니니 그냥 깔끔하고 무슨 말하는지만 잘 보이게 만드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나마 전쟁없는세상은 캠페인 사진만큼은 프로 사진가 못지않게 사진을 찍는 박승호가 있어서 이 사진을 활용하면 그래도 기본은 하는 홍보물이 나온다.


이미지에서 큰 장점이 없다면 텍스트에서라도 장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출판사 다니면서 글을 만지고, 제목이나 홍보 문구를 짜보는 일을 해봐서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더 잘하고 싶다. 단점을 극복하고 장점을 살리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현실적으로는 둘 다 해내기 힘들다면 단점을 보완하기보다는 장점을 극대화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텍스트 다루는 솜씨는 그래도 이미지 다루는 솜씨에 비하면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각 잡고 공부한 거는 아니지만(각 잡고 공부하기엔 작은 단체 활동가인 나는 다뤄야 할 기술이 너무나 많다!) 살아가며 틈틈이 글쓰기 책, 창작자들이나 카피라이터들이 자신의 작업에 대해 쓴 에세이들을 찾아봤다. 대중문화 창작과 상품 광고와 사회운동 캠페인은 영역이 무척이나 다르지만 결국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행동을 이끌어내는 기본 원리는 똑같으니까, 다른 영역의 전문가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쉽고 짧게, 잘 쓰는 기본기를 다지기 위하여'라는 부제 붙은 <카피 쓰는 법>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읽어 내려갔다. 


유유출판사 땅콩문고 시리즈가 그러하듯 이 책도 실용서와 에세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 삼아 정리한 생각들을 친절하게 들려준다. 카피라이터나 광고 홍보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메시지를 발신하는 일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책이다. 무난하게 읽히는 와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문장들도 있었다. 엄청 센세이션하고 대단한 노하우나 비법을 가르쳐주는 건 아니지만, 평소에 내가 고민하던 것을 저자가 콕 집어 다뤄줘서 기억에 많이 남는 거 같다. 하긴, 저자는 이 책에서 말하기를 "카피는 카피라이터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독자가 듣고 싶은 말"이라고 하니, 책이란 것도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독자가 읽고 싶은 말을 쓰는 것일지도. 그런 생각으로 책 원고를 써서인지 특별하고 대단하지 않은 문장들이 기억에 여러 개 남았다. 아! 평범하고 일상적인 표현을 하라는 것도 저자가 강조하는 거였지. 한 줄의 카피를 쓰는 것과 긴 줄 글로 이루어진 단행본을 쓰는 것은 엄연하게 다른 일이지만 결국 텍스트를 읽는(혹은 보는) 이의 뇌리에 남게 하는 원리는 비슷한가 보다.




기계적으로 쓰던 단어의 자리에 낯선 표현을 넣어 보세요. 낯설게 조합하면 사람들이 잘 기억합니다. 사람들은 익숙한 건 그냥 지나치지만 뭔가 덜컹하고 걸리게 만드는 건 다시 보고 싶어 해요. 그다음엔 참신하다고 느끼죠 (126쪽)


"용감한 겁쟁이들" "(국가의 입장에서 병역거부자들을 보자면) 가장 안전한 위협들" "피스메이커+트러블메이커" 병역거부자들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한다. 모순된 두 단어의 조합이 현실의 모순점을 보여주는 것만 같아서. 나는 그냥 내가 좋아서 이런 표현들을 즐겨 썼는데, 이게 읽는 사람들에게도 되리에 남는 방식이라는 걸 카피라이터의 입을 통해 확인하고 나니 이런 낯선 조합의 표현을 자주 쓰려고 노력해야겠다. 


모두에게 팔면 아무도 사지 않습니다. 내가 정한 타깃에게만 팔아야 사요. 타깃을 정한 다음 그 타깃에게 도움이 될 만한, 즉 그들의 고충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 누군가 듣습니다. 카피는 카피라이터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고객이 듣고 싶은 말이어야 합니다. (130쪽)


타깃을 명확하게 하라는 말처럼, 머리로는 아주 잘 이해가 되지만 실제로는 실행하기 어려운 말도 없다. 몰라서 못하는 것보다 알아도 못하겠는 것이 언제나 더 어려운 법이다. 특히 후원을 요청하는 글을 쓸 때 더 그렇다. 내가 느끼는 괴리감은 이런 것이다. 머릿속으로는 앞으로 전없세 활동을 함께 해나갈 20대 여성이나, 혹은 후원에 가장 많이 동참할 거 같은 40대를 타깃으로 삼는다. 그런데 막상 후원 메시지를 쓰면 20대 여성에게 쓴 메시지나 40대에게 쓴 메시지가 다를 게 별로 없다. 

이 어려움은 상품 판매와 단체 후원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요인이 다른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사람들이 왜, 어떤 이유로, 어떤 계기로 단체 후원이라는 행동까지 오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뭉뚱그려서는 알겠다. 전쟁없는세상 지지하고 이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등등. 그런데 지지하고 응원하는 마음이 후원이라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연결되는 지점에서 후원인들의 어떤 욕구가 작동하는지, 특히 각각 타깃으로 삼은 후원인 집단이 어떤 특질을 공유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쟁없는세상은 비폭력 트레이닝에서 늘 캠페인 목표를 구체적으로 삼으라고, 너무 추상적이거나 자본부의 반대 가부장제 철폐 같은 큰 목표는 좋지 않다고 말한다. 그런데 막상 트레이닝을 해보면 목표를 구체화하는 것을 다들 어려워한다. 홍보도 마찬가지인 거 같다. 타깃을 구체적으로 설정해야 하는데 그게 연습이 잘 되어 있지 않아서 어렵다.  

또 하나 더 단체 활동가들이 자주 저지르는 실수 혹은 잘못. 활동가들은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데 익숙하다.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한다는 것이 자신의 원칙을 버리는 일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한다는 것이 운동의 원칙을 버리거나 메시지의 핵심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말하기의 방식이나 표현을 다듬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의 판단을 대신하려는 태도가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게 만든다. 듣는 이의 판단까지 대신하려는 태도는 활동가들 뿐만 아니라 자기 일에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저지르는 오류다. 하지만 판단은 결국 메시지를 듣는 사람의 몫이고, 우리는 판단을 도울 뿐이다. 나는 사회운동의 메시지는 사람들이 가장 불편할 수 있는 내용이나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를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내가 해야 할 말의 핵심만 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는 방식으로 전달하고 판단을 기다려야 한다. 예를 들자면 병역거부에 대해 긴가민가하는 반응을 보이는 상대를 설득하는 메시지는 병역거부가 왜 중요하고 의미 있고 이런 말이 아니라, 상대방이 지지할 수 있도록 핑계나 구실을 만들어주는 말인 것이다. 물론 이게 말로는 쉽지만 실제 하려면 어렵다. 


기준을 세울 때 가장 중요한 건 우리 브랜드가 혹은 내가 정말 쓰고 싶은 카피는 어떤 스타일인지 방향성을 고민해 보는 것입니다. 저는 자극적이거나 말장난을 하는 키치한 카피보단 담백한 설득을 하는 카피를 쓰기로 했어요. (138쪽)


전쟁없는세상을 만들고 첫 10년은 그냥 좌충우돌이었다. 아무런 계획도 명확한 목표도 전략도 없었다. 그 뒤 10년은 캠페인의 구체적인 목표를 명시화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을 세우고 활동했다. 성과도 거뒀다. 그 뒤로는 전쟁없는세상이라는 브랜드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보도자료를 쓰면서도, 홍보용 이미지를 만들면서도, SNS에 글을 쓸 때도 전쟁없는세상의 이미지를 생각한다. 제대로 마케팅을 공부한 적도 전쟁없는세상 브랜드에 대한 제대로 된 분석을 한 적도 없다. 그냥 막연하게 생각하는 정도지만, 이제는 문장 하나하나에 전쟁없는세상의 이미지를 담으려고 노력한다. 그런 노력은 경험적으로 체득한 것이다. 단체의 인지도와 위상이 올라가서 책임감이 생긴 까닭이기도 하고, 중구난방으로 내는 메시지로는 더 이상 효과가 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나 또한 자연스럽게 표현이 담백해졌다. 이 이야기는 다음 문장과 함께 정리해 보자.


카피를 쓸 때 세웠던 기준 가운데 하나가 '최고'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중략) 달콤한 말로 고객을 빠른 시간에 유혹하고 싶겠지만, 정작 내가 그런 타이틀에 속았는지 입장을 바꿔 생각해봐야 해요. (144쪽)


사회운동을 하면서 가장 빠지기 쉬운 유혹은 우리가 적대하는 권력을 악마화하는 것이다. "역대 최악의 정권" "헌정사상 최악의 참사" 이런 표현들. 사회운동은 홍보비를 많이 쓴다거나 뭐 여타의 자원이 별로 없기 때문에 더더욱 관심이 목마르다. 그런 상황에서 자극적인 표현은 당장의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을 설득하고, 행동을 이끌어내는 데는 자극적이거나 극단적인 표현이 좋지 않다. 특히 짧은 문장으로 표현하는 카피나 구호, 성명서나 기자회견의 제목에서는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러다 보니 전쟁없는세상도 처음에 완전 듣보잡일 때, 뭐라도 해서 주목받아야 할 때는 메시지가 거칠고 자극적이었다. "전 세계 병역거부자의 99%가 한국 감옥에 있습니다." 이런 문장들. 그런데 어느 정도 단체의 영향력이 생기고 난 뒤에는 우리의 존재를 알리는 홍보가 아니라 우리를 지지하지 않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홍보가 필요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메시지가 담백해졌다. 오래 천천히 정도를 걷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이분법으로 구분할 것은 아니지만 알리는 것이 더 중요하냐 설득하는 것이 더 중요하냐의 문제랄까.

또 하나, 활동을 하다 보면 공포 마케팅을 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사회운동이 지금 세상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이다 보니, 세상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들추어야 한다.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가 망할 거라는 공포심리에 의존하는 메시지를 내고 싶은 유혹에 취약하다. 하지만 책임감 있는 집단이라면 나는 공포에 의존한 홍보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기 처한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숨겨야 한다는 게 아니라, 문제점을 드러낼 때는 철저하게 과학적인 언어를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 활동가 개인은 정말 위기감을 느끼고 있더라도 위기에 대한 판단은 사람들이 할 수 있게 해야 하고, 활동가들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간결하고 논리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감정이 없는 차가운 이야기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타고난 천부적인 감각으로 자신의 감정으로 타인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가 그런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자극적인 것은 빨리 질린다. 사회 변화는 오래 걸리는 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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