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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Jan 02. 2023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짧은 리뷰

알고 보면 쓸데없는 전쟁과 약에 관한 신기한 백과사전 같은 책이다. 나는 이렇게 내 인생에 아주 긴요한 쓸모는 없어 보이지만 재밌는 책을 좋아하고, 이런 책에서 나만의 쓸모를 찾아내는 일을 즐긴다. 쓸모없어 보인다고 했는데, 그건 순전히 저자의 문체 때문이다. 문체가 나쁜 것은 아니고, 굉장히 유머러스하다. 박사님이고 지금은 교수님인데, 유머러스한 글쓰기를 한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


(배트맨이 PTSD 환자며 강박증 증상도 있다고 말한 뒤) PTDS나 강박증이나 세로토닌 부족으로 나타나는 것은 비슷하다. 배트맨이 PTSD나 강박증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밤에 그만 돌아다니고 낮에 활동하라고 말하고 싶다. 세로토닌은 낮에 빛을 쬐어야 만들어진다.


때로는 개그 욕심이 과할 때도 있지만 덕분에 약에 대한 화학적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 되었다. 과학사 분야 책들이 그러하듯, 잡다하고 방대한 지식과 정보를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특히 전쟁과 관련된 방대한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는데, 전쟁사를 다룬 정통 역사책에서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들이다.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자랑하던 전격전은 병사들에게 각성제인 메스암페타민(일명 히로뽕)을 투여해서 야간 행군과 집중력 향상을 이뤘기 때문이고 독일과 동맹이었던 일본의 가미카제 특공대 또한 마지막 비행을 하기 전 필로폰 차를 마셨다고 한다. 각성상태를 유지하고 피로를 느끼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러일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였던 여순항 전투에서 일본군과 러시아군의 가장 큰 적은 서로가 아니라 각각 각기병(일본군)과 괴혈병(러시아군)이었다 한다. 러시아는 일본군의 봉쇄에 대비해 장기전을 준비했지만 싱싱한 채소만은 꾸준히 공급할 수 없었고 괴혈병으로 쓰러져갔지만 일본군 또한 각기병 때문에 스스로 쓰러져가는 러시아군을 쉽사리 이길 수 없었다 한다. 러일전쟁에서 일본군 사망자는 대략 8만 4천 명인데 그중에서 각기병으로 죽은 군인이 2만 7 천명이 있다 한다. 더 재밌는 것은 각기병은 당시 불치병이 아니었고 각기병 치료법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알아낸 것이 일본 해군인데, 해군과 육군의 알력 다툼 때문에 해군이 육군에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군으로 참전했다가 덩케르크 철수 때 독일군의 어뢰에 침몰한 배에 타고 있으면서도 기적적으로 생환한 의사 라보리는 수술 자체보다도 수술에 대한 환자들의 두려움이 수술의 성공률을 낮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전장에서 마치 동물들의 겨울잠을 흉내 내어 전쟁 공포를 이겨낸 것처럼 환자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수술에 대한 두려움을 이길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하던 차에, 당시 연구되고 있던 항히스타민제 소식을 듣고 수술 직전에 이 약을 환자들에게 투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수술 성공률은 변함이 없었고, 환자들 가운데 정신병을 앓고 있는 이들의 상태가 호전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정신과 의약품이 처음 탄생하게 되었다 한다.


하지만 정신과 치료제에 대해 의사들이 사용하기를 주저했다. 아직까지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어 있다는 믿음이 의사들에게도 팽배했던 탓이다. 이에 미국의 제약회사들은 의사들을 공략하기보다 주정부를 공략했다. 전쟁이 끝난 뒤 정신과 질병을 호소하는 참전군인이 많았던 탓에 주정부들은 예산이 점점 부족해졌는데, 치료약이 있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1933년 위스콘신 대학교의 칼 링크라는 교수가 인근의 소들이 사료를 잘못 먹고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죽음의 원인을 밝히기 위한 연구를 시작한다. 결국 소의 출혈제 역할을 하는 성분을 알아냈고 이를 시판 약품으로 제조했는데 쥐약으로 팔기 시작했다. 한편 1951년 E. J. H라는 젊은이가 입영통지서를 받고는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것이 두려워서 링크 교수가 만든 쥐약을 사서 먹었다. 하지만 일주일 내내 먹어도 먹어도 죽지 못하고 멀쩡히 살아 아침을 맞이했고, 죽지도 못하고 전쟁터에 끌려가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군입대를 했다. 군대에서 군의관에게 이 일을 이야기했고 군의관은 이를 의학협회지에 발표했다. 의학자들은 이 쥐약이 사람들한테는 해를 끼치지 않는 이유를 알아냈는데, 사람은 쥐와 달리 혈액응고 작용을 하는 비타민K가 다량 있어서 그랬던 것이다. 이후 와파린이라는 이름의 이 약은 심장 수술에 쓰였고, 전쟁이 끝난 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수술에도 쓰였다고 하며 지금까지도 혈전 환자들에게 쓰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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