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용석 Jun 04. 2022

노동조합은 처음이라

짧은 리뷰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은 누가 뭐라 해도 병역거부다. 그리고 또 하나를 꼽아보자면 노동조합 활동이다. 최근에 나를 알게 된 사람들은 내가 천년만년 전쟁없는세상에서만 일한 줄 아는 분도 있을 텐데, 나는 30대의 앞부분 절반을 출판사에서 일했고, 첫 회사에서는 책 만드는 일보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활동하는 일에 힘썼다. 그때 《노동조합은 처음이라》 같은 책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30명 남짓 되는 출판사였는데 경영진을 뺀 대부분은 노동조합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노동조합활동을 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시민단체 활동을 해본 사람도 나밖에 없었다. 당시 나는 돈 벌 생각으로 회사에 들어갔다. 노동조합활동이나 노동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나보다 앞서 들어온 수습사원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계약해지되는 것을 보면서, 회사가 전반적으로 비합리적으로 운영되고 그 중심에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대표이사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내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노동조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동료들에게 조심스럽게 노동조합을 만들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던 것이다.


노동조합이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만드는지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대학 때 학생운동을 하고 졸업한 뒤에는 사회단체에서 활동했던 나도 몰랐다. 우리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노동 3권이 뭔지부터 공부해야 했다. 대학시절 학생운동을 하면서 노동해방이 어쩌고, 계급투쟁이 저쩌고 읊어대면서도 노동법 한 번 읽어본 적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하염없이 부끄러웠다. 당시에는 출판사에 노동조합이 있는 곳이 세 곳밖에 없었다. 우리는 창비 분회장을 모셔 출판사 노동조합이 무엇을 하는지 듣고, 오마이뉴스 지부장을 만나 진보적인 가치를 표방하는 회사에서 노동조합을 하는 일의 어려움을 듣고, 노동운동 단체의 노무사를 모셔 노동법에 대한 교육을 들었다. 그런 도움이 없었다면 우린 더더욱 헤맸을 것이다. 이것저것 책을 사보기도 했는데, 노동운동 선수들이 쓴 대단한 책은 많았지만 초보 노동조합 활동가를  위한 책은 없어서 아쉬웠다. 다행히 상급노조인 언론노조의 도움으로 노조도 만들고 단협도 하고 아무튼 노동조합이 해야 하는 일을 서툴지만 하나씩 해나갔다.


 《노동조합은 처음이라》은 당시 우리와 같은 노동법 한 번 안 읽어본 노동조합 초짜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단협을 맺고 회사와 새롭게 노사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의 분투를 잘 보여준다. 1부에서는 노동조합을 만들고 단협을 맺는 과정을, 2부에서는 단협을 맺은 뒤 일상적인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회사와 갈등하고 토론하고 양보하고 양보를 이끌어내는 과정을 보여준다. 글을 워낙 재치 있고 재미있게 써서 노동조합 경험이 없거나 노동조합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몰입감 있게 읽을 수 있다. 노동 교육이 빈약한 한국 사회에서 대학까지 졸업한 뒤에 사회생활하면서 처음 노동조합 혹은 노동법을 접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면 좋겠다. 노동운동 선수들이라면 깊이를 아쉬워할 수도 있지만 어차피 그런 분들을 대상으로 하는 책도 아니고, 최근에 새롭게 노동조합에 문을 두드리는 새로운 젊은 조합원들의 한 특징을 살펴보기에도 굉장히 좋은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나는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여러 가지를 배웠다.  


일단 민주노총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기 전 나는 너무 쉽게 민주노총을 비판했다. 거대하고, 비민주적이고, 때로는 개량적이고, 권위적이고... 비판할 것들이 넘치고 넘쳤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민주노총을 직접 몸으로 겪으면서 나는 내가 했던 손쉬운 비판이 얼마나 의미 없는지 깨달았다. 나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그렇지만 훨씬 구체적이고 정교한 문제의식을 가진 활동가들이 민주노총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민주노총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 잘 알지도 못한 채 남발했던 손쉬운 비판은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활동가들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민주노총을 비판하면서 나 자신의 급진성이라든지, 개혁성을 뽐내고 싶었던 거라는 걸 아프게 깨달았다. 이제는 비판할 일이 있으면 민주노총 자체를 비판하지 않고 문제가 되는 행위를, 그 행위에 책임이 있는 주체를 비판한다.


그리고 노동조합 활동을 해보니, 생각과 정치적 입장이 서로 다른 조합원들의 욕구를 조율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었다. 시민단체 활동은, 예컨대 전쟁없는세상처럼 사회에서 그다지 대중적인 환영을 받지 못한 주장을 하는 단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생각을 지지하는 회원들과 주로 만나며 활동을 한다. 반면 노동조합은 정치적 입장의 동일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조직이 아니다. 당연하게도 조합원들 가운데는 민주당 지지자, 국민의힘 지지자, 진보정당 지지자가 섞여 있고, 논쟁적인 사회 쟁점에 대해서도 조합원들의 의견은 각각 다르다. 정치적 결사체인 단체에서는 공동의 대의를 위해 서로가 자신의 욕구를 양보하는 것이 익숙하지만, 노동조합에서는 조합원들의 서로 다른 욕구를 조율하는 게 어렵다. 나는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노동조합 활동가들에 대한 존경심이 일었다. 동시에 조합원을 만나면서는 활동가가 아닌 보통의 사람들이 어떤 감각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이해하게 되었고, 사람들을 만나고 설득하는 과정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사실 노동조합 활동은 갈등을 조율하고 권력을 견제하고 이익을 재분배하는 넓은 의미의 정치가 우리 삶에 왜 필요하고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를 가장 쉽고 뼈저리게 배울 수 있는 학교다. 나와 생각이 다른 조합원들과 대화하며 서로의 공통분모를 찾아내야 한다. 위임받은 권력을 행사하여 조합원들이 바라는 것을 회사로부터 따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적당히 양보도 하고,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을 관철시키는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 만약 다른 조건이 똑같은 두 후부가 국회의원 선거에 나왔다면 나는 법조인 출신보다 노동조합 활동가 출신이 국회의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의 역할을 입법 기술자가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갈등을 조율하는 조정자여야 하고,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그런 일을 누구보다 일상적으로 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은 초보 노동조합 활동가들에게는 필독서지만, 국회의원과 보좌관, 지방선거 당선자와 낙선자, 정치를 꿈꾸는 모두가 얻을  많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블랙미러 시즌3, 보이지 않는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