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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Jun 19. 2022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

짧은 리뷰


과학사나 과학기술학 관련 책들을 틈나는 대로 챙겨보고 있고 <겸손한 목격자들>을 무척 재밌게 읽었던 터라  임소연 선생님의 새 책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은 당연하게 출간되자마자 읽어야 할 책 리스트 최상단에 올려두고 한숨에 읽어 내려갔다. 평소에 여러 장르의 책 여러 권을 동시에 읽는 편인데, 이 책은 그냥 한달음에 몰입해서 읽었다.


과학기술학에 대한 관심에 더해,  책을 읽으면서 염두에  것이 하나  있다. 전쟁없는세상은 올해 계획을 세우면서  가지를 결정했다. 하나는  팀으로 운영되어  기존의 체계를 뛰어넘는 기획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활동의 목표에 페미니즘의 관점을 더욱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올해 중점 사업을 채택된   하나가 병역거부운동의 여성활동가들을 인터뷰하는 것이었다. 바쁜 상반기가 끝나고 하반기부터 여유 있게 하려 했는데, 펀딩 신청한 것이 덜컥 선정이 되어 10 말까지 인터뷰집을 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페미니즘의 렌즈로, 여성 과학자의 시선으로 과학기술을 들여다보는  책이 페미니즘의 렌즈로, 여성활동가들의 기억과 경험으로 한국 병역거부운동의 역사를 정리해보려는 우리의 기획에 어떤 영감을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책을 읽었다.




흥미로운 지식이 가득한 책


시작부터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과학 지식이 사실이 아니라는, 흥미로운 사례를 이야기한다. 바로 '정자 경주' 아빠의 성기에서 배출된 수억 마리의 정자가 엄마 뱃속 난자까지 달리기 시합을 해서 그중 가장 빠르고 건강한 정자가 난자에 수정되어 짜잔 하고 우리가 태어났다고, 그렇게 과학시간에 배웠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설마 과학자들이, 교과서가, 선생님이 거짓말을 하겠어. 그런데 그게 사실이 아니라니. 최신 연구에 따르면 정자가 능동적으로 움직여 가만히 있는 난자를 쟁취하여 수정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자 무리가 난자 가까이 가서 서성대면 난자가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그중 한 정자를 끌어당기는 방식, 즉 난자가 능동적으로 정자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바로 다음에 나오는 내용도 충격적이다. 내 비록 청소년 시절에는 과학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하지는 않았고 그중에서도 생물과 지구과학은 싫어하는 과목이었지만, XY 염색체가 남성이고 XX 염색체가 여성이라는 사실, 즉 X와 Y의 차이가 남녀를 구분한다는 사실은 기억하고 있다. 정규 교육을 받았으니 이 정도쯤이야. 그런데 이것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XX와 XY로 구분되는 23번째 염색체가 성별을 정하는 '성염색체'로 알려져 있는데(이런 자세한 것까지 기억나진 않지만 책에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다) 실제로는 성염색체가 성별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염색체가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성별은 단 하나의 요소로만 결정되는 게 아니라고 한다.

 

흥미로운 지식은 계속된다. 임신과 태반, 장과 우울증, 인공지능과 로봇과 젠더, 진화론과 페미니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상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과학지식을 이야기해준다.  



새로운 지식은 새로운 시선에서 나온다


그렇다고 이 책이 새로운 지식 각각을 전달하기 위한 책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새로운 지식이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보여주고 역설하는 책이다. 새로운 지식이라는 게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지식은 늘 존재해온 지구와 자연과 인간의 몸을 새로운 시선과 새로운 감각으로 살필 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새로운 시선은 역시나 페미니즘과 여성과학자들의 시선이다. 과학기술인의 성별 불균형은 아주 심각한데, 이런 편향이 과학기술의 연구와 연구가 생산해낸 지식의 성별 불균형을 초래했다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배워온 과학지식이 사실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고 과학기술을 연구하고 수행하는 과학자들의 성별, 인종, 계급, 장애여부 등 다양한 요소에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남성 과학자들이 입덧이나 태반 혹은 성형수술에 과학적인 관심을 가지기도 어렵지만, 만약 관심을 가지더라도 입덧과 태반 혹은 성형수술이 여성들의 일상과 삶에 어떤 의미와 맥락을 가지는지를 감각적으로 인지하기는 어렵다. 결국 여성들의 삶에 중요한 요소들은 과학기술의 연구 주제에서 밀려나기 십상이다.


주류 과학계에서는 저자의 이런 시각이 어느 정도로 보편적인 인정을 받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요즘 나오는 과학기술 관련 대중서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시선은 아니다. 나 또한 정인경 선생님의 책 <뉴턴의 무정한 세계>를 볼 때만 해도 우리가 아는 과학이란 객관적인 시선이 아니라 근대 서구 백인 남성의 시선으로 자연 세계를 해석한 시선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지만,  그 이후 읽은 책에선 이런 시선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시선 그 자체보다는 그런 시선이 과학 현장에서 어떤 갈등을 빚어내고, 어떤 수행을 이뤄내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것이 이 책이 가지는 특징이자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생생함을 더하고 싶다면 <겸손한 목격자들>을 함께 읽는 것이 좋다.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


저자가 거듭 강조하는 것처럼 과학기술인을 꿈꾸거나 고민하는 여성 청소년들이 청년들에게 정말 안성맞춤인 책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과학기술인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더라도 이 책을 충분히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책이 전하는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지식이 탄생하는 과정에 대한 생동감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데 부족함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인 목적을 가지고 읽었다.


과학이 아니라 운동의 역사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페미니즘은 어떻게 새로운 지식, 새로운 해석, 새로운 목표를 발견할 수 있을까?


이미 올해 들어 몇 차례 비슷한 논의를 전쟁없는세상에서 한 적이 있었다. 우리의 갈증은 명확했다. 단체 내 활동의 성별 분업이라든지 기자회견장이나 얼굴 내비치는 자리에 젠더 불균형을 해결하는 것,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건 일차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문득 벡델 테스트가 떠올랐다. 알탕 영화만 가득한 영화판에서 벡델 테스트는 분명 의미 있는 지표지만, 더 깊이 있는 분석은 불가능하다. 중년 남성들만 가득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페미니스트가 만든 페미니즘 영화로 손색없는 '공동정범' 같은 영화는 벡델 테스트로는 측정이 불가하니까. 우리는 병역거부운동의 벡델 테스트에서 더 나아가 병역거부운동이 과연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와 젠더 불균형에 어떤 도전을 했고, 어떤 균열을 내왔는지, 그런 측면에서 대체복무제가 도입된 이후의 병역거부운동(혹은 반군사주의운동)의 비전과 목표와 전략을 수립하는데 페미니즘의 관점을 녹여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가능할지를 찾고 싶어 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생각해보건대 새로운 시선으로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고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는 것이 가장 과학적인 방법인 거 같다. 예컨대 병역거부운동에서 '태반'과 같은 존재를 발견하고 분석하는 것, '정자 경주'처럼 굳어 있는 옛 지식을 의심하고 검증하고 다시 쓰는 것이겠지. 그럼 문제는 병역거부운동에서 '태반'은 무엇이며 '정자 경주'는 무엇인가인데,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역사적으로도 맥락적으로도 병역거부운동에서 이미 쌓여온 과거 같은 존재니. 그러고 보면 인터뷰를 기획하면서 내가 인터뷰어로 나서지 않도록 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인 거 같다.


새로운 시선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새롭게 써 내려갈 병역거부운동 여성활동가 인터뷰집이 벌써 기대된다. 다들 바쁘겠지만, 인터뷰어로 나서는 활동가들에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을 한번 읽어보라고 추천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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