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용석 Jul 07. 2022

당신의 말이 역사가 되도록

짧은 리뷰

나는 전문적인 인터뷰어도 아니고, 인터뷰를 많이 하는 활동가도 아니다. 그냥 재미 삼아 취미 삼아 내가 이야기를 듣고 싶은 평화활동가들 몇 명을 인터뷰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올해 전쟁없는세상의 중점 사업으로 병역거부운동 여성활동가 인터뷰집을 내기로 했다. 인터뷰어로 적극 참여하는 것은 아니지만(두 건의 인터뷰를 보조 인터뷰어로 참여) 전체 인터뷰 사업의 코디네이터를 해야 하다 보니 인터뷰란 무엇이고 어떻게 하고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하는지 공부하기 위해 이 책을 추천받아 읽었다.


'구술을 어떻게 듣고, 기록할 것인가'라는 부제가 이 책이 어떤 책인지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다. 이 책은 구술 기록을 위해 인터뷰를 하는 인터뷰어들이 인터뷰를 어떻게 기획하고, 추진하고, 실행하고, 글로 정리할지를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지점까지 세세하게 알려주는 실용서다. 인터뷰어가 되어 인터뷰를 처음 하는 사람이 읽는다면 큰 도움이 될 정보가 많다. 인터뷰 기획은 어떻게 하는지, 인터뷰이 선정은 어떻게 하는지, 질문은 어떻게 만드는지, 인터뷰 장소는 어떤 곳이 좋은지, 인터뷰를 마치고 난 뒤 녹취록은 어떻게 작성하는지, 그것을 바탕으로 원고는 어떻게 쓰는지, 그 과정들에서 신경 써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가 자세히 나온다.


그렇다고 실용서이기만 한 것도 아닌 것이, 이 책이 생각하는 구술 기록의 목적이 아주 명확하기 때문이다. 바로 책의 제목 "당신의 말이 역사가 되도록" 하기 위한 작업이다. 사회가 외면한 목소리, 드러나지 않은 존재들의 삶을 공적인 역사로 길어 올리는 매우 정치적인 기록이 자신들이 하는 인터뷰 작업이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저자들은 인권활동가들로 오랫동안 여러 사회적 소수자,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만나면서 인터뷰하고 기록을 남겨왔다. 실용적인 면이 책의 주요한 흐름이라면 흐름 사이사이 기록하는 행위의 정치성이 짙게 깔려있다.


실무적인 것도 도움이 많이 되었지만, 인권기록의 정치성이 인상 깊게 남았다. 쓰고자 하는 글의 목적이 인터뷰의 방향뿐만 아니라 인터뷰 준비에도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키는 기록이 좋은 기록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고, 기록의 깊이를 더하려고 탈탈 털듯 상대방의 이야기를 끄집어내야 한다는 태도로 사람을 대하는 이들도 많다. 그 기록은 인권기록이 아니라 억압과 폭력의 기록이다.

우리는 인권기록 과정이 구술자와 기록자 모두 인권을 경험하는 시간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24쪽


이 문장을 읽고선 뜨끔했다. 미리 예방 주사를 맞은 느낌이랄까. 아마도 우리가 수행하는 인터뷰가 좀 더 센세이션하게, 새로운 무언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그런 결과물이기 바라는 마음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나 보다.


고모와 사는 아이에게 "엄마는?"하고 묻거나, 간호학원에 다니는 20대 청년에게 "방학이죠?"라고 묻고 돌아온 답에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더랬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서서히 깨달았다. 사람은 묻는 것에만 관심 있거나 자신의 경험과 세계를 기준으로 타인을 대하기 쉽다는 걸. 사회가 만든 '정상성'의 범주에 속한 사람일수록 물음에 배려가 없기 쉽다는 걸. '안전한' 삶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갈수록 상대방에 대한 고려를 쉽게 놓친다는 걸.

반대로 묻지 않음으로써 어떤 존재를 사회와 세상에서 밀어내는 경우도 있다. 가령 중증 장애를 가진 성인을 만났을 때, 다른이들에게라면 진작 물었을 결혼은 했는지, 아이는 있는지 하는 질문을 아예 하지 않는 것이다. -87쪽


묻는 것과 묻지 않는 것 그 자체가 이미 메시지다. 그리고 모든 메시지에는 권력이 작동한다. 특히나 나처럼, 정상성의 범주 안에 깊숙이 속한 사람들은 당연한 것도 의심을 해야 한다. 모든 질문은, 하지 않는 질문조차도 메시지라는 걸 까먹지 말자.


기록자와 구술자 사이에 형성되어야 할 신뢰감과 친밀성은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기록자가 구술자에게 바라는 신뢰가 이야기의 진솔함이라면 구술자가 기록자에게 거는 신뢰란 경청과 존중, 제대로 된 기록에 대한 믿음이다. -107쪽


가장 어려운 것이 관계,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사이에서도 그럴 거 같다. 


인터뷰 과정을 통해 우리가 도모해야 하는 것은 치유보단 역량 강화다.

(중략)

인권기록은 대화를 통해 삶을 재인식하고 재해석할 힘이 기록자와 구술자 모두에게 발휘되는 과정이 되길 바란다. -114쪽


목표에 너무 심취한 것이 과한 질문과 공격적인 인터뷰로 표출된다면, 반대로 인터뷰의 목적을 까먹고 부수적인 효과에만 집착할 수도 있다. 말하기는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생각을 정리하게 해 주고, 행위나 사건을 해석하여 의미를 부여하고, 그러면서 개인에게는 치유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 단, 우리가 인터뷰를 진행하는 목적인 치유를 위해서는 아니다.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병역거부운동을 바라보고 해석하기 위함이라는 걸 까먹지 말자.


구술자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말하기를 중단하고 들어가 쉴 수 있는 공간, 말하고 있으나 내면에 말하지 않은, 혹은 말할 수 없는 무언가를 품을 공간 말이다.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그 심연에 있는 모든 것이 아니다. 그가 그의 품위를 잃지 않고 타인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할 수 있는 말이 바로 우리가 들어야 할 말이다. 우리가 듣는 말은 기록되어 세상에 공유된다. 그러므로 그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자신만의 방을 지켜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135쪽


나처럼 침묵을 잘 참아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꼭 새겨 들어야 할 이야기. 기록이 전제되어 있는 인터뷰에서 인터뷰이는 인터뷰어에게 말하는 게 아니라 사회의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말을 하는 만큼 안전한 생각의 시공간이 필요하다.


대추리 미군기지 반대 투쟁 이후의 굴곡진 삶의 역사를 묻기 위해 만난 인터뷰에서 우리는 진 싸움 이후 해방의 기쁨을 맛본 여성들을 만났다. '나고 자란 고향, 평생의 터전, 이웃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았던 공동체가 싸움의 과정에서 폐허가 됐다.' 기존의 서사는 이러했다. 그리고 이 서사는 성인 남성의 것이었다.

대추리라는 시골 마을로 시집 온 여성들에게 싸움에서 지고 고향 땅과 삶의 터전을 빼앗긴 일은 뼈아픈 상처였다. 그러나 그날 이후 여성들은 평생 땅을 일구며 살아야 한다는 업보에서, 남편의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촌부에서, 모두가 시부모이자 시댁인 마을 공동체에서 명분 있게 벗어날 수 있었다. 흙때 없는 옷을 차려입고 도시를 드나들며 드디어 내가 번 내 돈이 되는 일자리를 얻으면서 여성들은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고 했다.

(중략)

인터뷰의 목적은 이미 반복된 이야기를 찾는 데 있지 않다. 구술자가 너무 매끈하게 정리해 풀어놓는 이야기는 공식적인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중략) 기록자가 해야 할 일은 좀 더 관점이 새로운 질문을 찾아내는 것이다. -142쪽   


 구절을 읽으면서는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대추리 투쟁의 서사를 이렇게 해석할  있다고  번도 생각하지 못해서. 독자인 나의 기대를 보기 좋게 배반했는데,  배반당한 감정이 너무나 유쾌해서. 우리가 병역거부운동 여성활동가들의 인터뷰집을 낸다면 이런 인터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존의 서사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에서 새로운 질문과 해석을 쌓아가는 . 물론 페미니즘이 병역거부운동 혹은 전쟁없는세상 안에서 아주 새로운 관점은 아닐 수도 있다. 새로운   낯선 것은 아니니. 우리는 다른 서사를 해보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