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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Oct 23. 2022

스물다섯 스물하나

짧은 리뷰 

김태리, 남주혁 주연의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뒤늦게 봤다. 꼭 봐야겠다고 생각하는 드라마는 아니었는데, <작은아씨들>을 보면서 조금은 긴장감 높지 않은 드라마를 함께 보려고 보기 시작해서 기대 이상으로 재밌게 봤다. 물론 몰입이 되지 않는 지점도 있었다. 대학교를 자퇴하고 일을 하는 백이진이 아직 고등학생인 나희도에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은 잘 설득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감정적으로 너무 힘든 시기의 백이진이 어떤 위로와 평안을 세상 명랑한 나희도에게서 찾았고 그 감정을 성애적인 감정으로 착각했다고, 애써 이해하며 드라마를 봤다. 사실 백이진과 나희도의 멜로는 크게 재밌진 않았고, 내가 드라마를 재밌게 본 것은 다른 지점들이었다. 



IMF에서 911 테러까지


드라마의 주 배경은 1998년부터 2001년까지, 두 주인공은 각각 2001년에 스물다섯과 스물하나다. 1998년은 IMF 외환위기 직후. 백이진은 IMF로 아버지의 회사가 망해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산다. 스포츠카 타는 부잣집 도련님이었다가 졸지에 신문배달과 만화책방에서 아르바이트로 생계비를 버는 상황에 놓였다. 엄마가 뉴스 앵커인 나희도는 IMF로 집안이 휘청이지는 않았지만 학교 펜싱부가 사려져 펜싱부가 있는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간다. 


나는 1998년에 고3이었다. 우리 집도 IMF 사태에 직격탄을 맞았다. 다니던 회사가 망해서 아빠는 퇴직금도 받지 못하고 졸지에 실업자가 되었다. 뉴스에서는 연일 기업들의 도산 소식과 함께 실업자가 된 중년 남성들의 이야기가 나오던 시절,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출근을 안 하고 집에 있는 아빠에게 아빠도 실업자가 되었냐고 물어봤는데 아빠는 아니라고 했다. 아빠가 거짓말을 한다는 걸 알았지만 더 묻지 않았다. 그 뒤 아빠는 생과자 노점을 하기도 하고, 과일 노점을 하기도 했다. 고1인 동생은 모든 학원을 다 중단했고, 나는 종합반에서 단과반으로 옮기고 국어와 수학만 수강했다. 아마 엄마 아빠는 그 시절이 굉장히 막막하고 어려웠을 텐데, 나와 동생은 학원을 중단하고 용돈이 줄어든 것 말고는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엄마 아빠의 나이는 지금 나와 동생 나이다. 그때는 엄마 아빠가 굉장히 어른이라고 생각했고 위기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나 정도의 나이였다니. 알 수 없는 미래가 얼마나 불안하고 무서웠을까. 엄마 아빠는 그 시절을 어떻게 견디었을까. 나는 당시 엄마 아빠 나이가 되었는데, 엄마 아빠보다 공부도 더 많이 했는데, 부양가족도 없이 내 한 몸만 건사하면 되는데, 그런데도 사는 일이 참 어려운데. 드라마 덕분에 IMF 때 우리 가족이 살아온 일들이 생각났다. 왜 나는 그 시절을 그다지 떠올리지 않고 살아왔을까? 딱히 피하고 싶은 기억도 상처도 아닌데 말이다. 


아무튼 드라마는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릴 만한 여러 가지를 보여준다. 만화책 대여점, 체벌 금지의 제도화와 제도를 따라가지 못했던 현실, 당시의 패션, 신창원 사건, PC 통신 등등. 그리고 시간이 흘러 주인공들은 스물다섯과 스물하나가 되었고, 세계는 911 테러와 마주한다. 911 테러가 일어나고 뉴욕에 파견된 백이진은 테러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고 힘들어하다 뉴욕 특파원이 되고 희도와 이진은 점점 서로의 응원이 상대방에게 가닿지 않음을 경험하며 이별한다. 


911 테러 때 나는 대학생이었고, 학생운동을 열심히 했다. 지금 평화활동가로 살아가는 일에 우연이 작용했다면 911 테러 인지도 모르겠다. 911 이후 세계는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으로 급속하게 휘말렸고, 세계적으로 반전운동이 일어났다. 한국에서도 반전운동이 크게 일었고, 내가 속한 학생운동 그룹은 반전운동 가운데서도 병역거부운동에 주목했다. 내가 병역거부를 알게 되고, 병역거부운동을 만나고, 병역거부운동에 참여하는 과정은 911 이후의 세계라는 요인이 아주 크게 작용했다.


IMF, 911 모두 개개인이 개입할 수 없는 커다란 사회적인 사건이었고, 사람들의 삶에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끼쳤다. IMF가 가져온 풍파로 백이진과 나희도는 만나게 되었고 연인이 되었다가 911 이후에 헤어지게 되었다. 시대가 이들의 일상과 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같은 시대를 주인공들과 비슷한 또래로 살아갔던 내 삶에  IMF와 911 테러가 끼친 영향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래서 이 드라마가 재밌었다.  



나희도와 고유림, 나희도와 백이진


또 하나 이 드라마에서 재밌게 봤던 것은 인물들 간의 관계였다. 연애 관계 말고. 특히 나희도와 고유림의 관계가 인상 깊었다. 고유림에 이어 나희도가 올림픽 펜싱 금메달을 연달아 세 번, 둘이 합쳐 네 번을 딴다. 최고의 자리에 오른 고수끼리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모양새인데, 이걸 고등학생들이 하고 있으니 알콩달콩상콤하기 그지없다. 서로 응원하고 서로 의지하는 친구이자 서로에게 자극이 되는 라이벌.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강탈했다는 부당한 비난을 받은 나희도가, 가정사 때문에 러시아로 귀화하며 여론의 뭇매를 맞는 고유림을 감싼다. 남자들끼리의 우정, 남녀 사이의 우정, 혹은 인생의 쓴맛 단맛 다 본 이들 사이의 우정과는 다른 질감이 신선함으로 다가온다. 같이 울고 웃는 관계라는 것이 말로는 쉽지만 그게 어디 현실에서도 쉽나. 드라마는 결국 사람들이 현실에서 구현하지 못하지만 강력하게 원하는 판타지를 이루어주는 장치라고 했을 때, 어쩌면 이 드라마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판타지는 나희도와 고유림의 관계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희도와 백이진의 관계로 여타의 멜로드라마 남녀 주인공의 관계와는 좀 다르게 느껴졌다. 심장에 박혀 그 사람을 떼어 내면 심장이 같이 떨어져 나와 나도 죽을 것만 같은 그런 진한 사랑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는 어린애 같은 남자와 라면 먹고 갈래요? 물어보는 어른 같은 여자의 현실적인 사랑도 아니고, 이루지지 않는 풋풋한 첫사랑을 드라마는 그리고 싶었던 것 같지만 내게는 백이진과 나희도는 서로의 삶을 응원하는 친구 사이의 사랑과 우정으로 보였다. 힘든 시기, 무너지지 않도록 밝은 세상을 보여주고 늘 좋은 곳으로 이끌어주는 사람에 대한 감정을 성애적인 사랑으로 착각한들 그게 큰 잘못이랴. 물론 서로에게 상처가 남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2009년 장면, 세 번째 금메달을 딴 나희도와 나희도를 인터뷰하는 9시 뉴스 앵커 백이진의 대사가 인상 깊었다. 백이진 앵커님 늘 응원합니다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나희도와, 늦었지만 결혼 축하합니다라고 담백하게 말하는 백이진. 둘 사이에 흐르는 감정은 헤어진 연인 사이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함께 건너온 사이에서 쌓일 수 있는 무한한 신뢰나 우정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이들의 이별이 내게는 안타깝거나 슬프게 남지 않았다. 연인 관계가 끝났다고 신뢰나 지지 같은 감정이 모조리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달달한 연애드라마를 생각하고 봤는데, 연애 말고 딴 게 재밌었던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생각해보니 김태리가 출연한 드라마는 다 봤구나. 그래 봤자 두 편이지만. 고애신도 그렇고 나희도도 그렇고 영화 <1987>과 <아가씨>에서도 그렇고 김태리는 늘 세상이 침범할 수 없는 밝고 명랑한 기운이 있다. 독재정권 치하에서도, 망국의 시절에도, 금융 위기로 나라가 휘청일 때도, 세상의 온갖 격변들도 끝내 어찌하지 못하는 타고난 성정 같은 것. 그렇다고 김태리가 연기한 캐릭터들이 시대의 소용돌이와 상관없는 삶을 사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소용돌이 한가운데를 살아가면서도 명랑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장난스러운 웃음이 더욱 따뜻하게 느껴지는 거 같다. 나는 그 기운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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