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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Oct 23. 2022

2차 송환

짧은리뷰

오혜진 선생님이 <2차 송환>가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2: 금기에 도전>과 겹치는 장면이 꽤 있다고 하셔서,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2> GV를 앞두고 부랴부랴 영화를 챙겨봤다. 만남의 집, 그리고 민가협 목요집회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민가협 집회에서 사람들이 들고 있는 양심수 피켓이 임재성, 오태양, 유호근인 것이. 그것 말고 또 어떤 장면을 오혜진 선생님은 발견하셨던 걸까? 장기수 선생님들과 병역거부자들 사이의 공통점을 보셨던 걸까? 고집이 세다는 거, 그리고 양심의 자유를 한국사회에 화두로 던졌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분명히 있다. 차이점도 있다. 사상적 동질성이라는 측면에서 병역거부자들은 장기수 선생님들과는 무척 다르다. 병역거부자들이 군대를 거부한 이유는 비슷하면서도 다 다르다. 장기수 선생님들과 병역거부자들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주목하며 영화 본 감상을 정리해보려 한다.



양심의 자유 


전작 <송환>이 양심의 자유에 대한 기본적인 이야기를 하기 좋은 작품이라면, <2차 송환>은 양심의 자유를 좀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이다. 비전향 장기수들은 한국 사회에서 '양심의 자유'를 처음으로 사회적인 화두로 던진 이들이다. 비전향 장기수들이 강제전향에 맞서면서 헌법 조문에서 잠자고 있던 '양심의 자유'가 무엇인지 한국 사회는 고민할 수 있었다.  <송환>은 속까지 시뻘건 빨갱이일 거 같은 장기수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며 양심의 자유가 특별할 거 없는 인간 모두의 권리임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송환>을 보다 보면 비전향 장기수들과 전향한 장기수들 사이의 미묘한 갈등을 포착할 수 있다.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저항한 이들의 자부심과 권력에 굴복해 양심을 저버린 이들이라는 자괴감이 두 그룹 사이 갈등의 자양분이었다. 

<2차 송환>은 전향 장기수들의 이야기다. 2000년 김대중 정부 시절,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북으로 송환되고 남은 장기수들. 자의로 남은 이들도 있고, 북으로 가고 싶었지만 전향서를 써서 1차 송환 명단에서 탈락한 이들도 있다. <송환>의 영화 포스터의 주인공인 김영식 님 또한 전향서를 쓴 장기수고, <2차 송환>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며, 북으로 가고 싶어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전향한 장기수들이야말로 헌법상 양심의 자유를 국가가 지켜야 하는 이유를 가장 강력하게 설명하는 존재라는 생각을 했다. 비전향 장기수들의 그 올곧음은 존경할만하지만, 우리 모두가 그런 강한 신념을 지키며 살아갈 수 없다. 양심은 인간의 진지하고도 강력한 마음의 소리라지만, 권력과 힘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기도 한다. 전향한 장기수들조차도 우리들 보통 사람과 비교하자면 아주 강하고 굳은 신념을 지닌 이들일 테다. 그런 이들조차도 권력과 힘 앞에서 양심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양심의 자유를 헌법이 명시하며 보호하고자 함은 그것이 인간의 고유성을 담보하는 권리라서 중요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거대한 폭력과 권력 앞에서 쉽게 무너지는 속성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2차 송환>은 전향한 양심수들의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양심이라는 고귀하고 소중한 권리가 권력과 폭력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국가가, 정부가 보호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언제든 국민의 양심의 자유는 짓밟힐 수 있다는 것이다. 소수의 예외적인 존재만이 폭력에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의 양심을 지킬 수 있을 뿐이다. 


양심의 자유를 넘어서


양심의 자유는 백번을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고, 장기수들이나 병역거부자나 국가 폭력에 의해 양심의 자유를 침해당한 존재인 것은 맞다. 하지만 병역거부자들도, 장기수도 확신범들이다. 양심을 내면에 지니고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양심에 따라 정치적인 행동을 하는 이들이다. 이런 이들에게는 스스로의 양심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신념의 내용도 중요하다. 

워낙에 양심의 자유가 척박한지라 양심과 신념의 내용에 대해서는 사회적인 논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니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도 못하는데, 그 말과 행동의 내용을 따질 수 있나. 하지만 나는 한 명의 병역거부자로, 내가 병역거부를 하고도 감옥 가지 않을 권리만큼이나 내가 병역을 거부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사회적으로 발언하고 토론하고 논쟁하고 싶다. 아마도 장기수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양심의 자유에 대한 논쟁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서, 금기로 여겨지던 정치적 양심의 내용에 대해 활발히 토론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물론 그런 상황이 온다면 장기수 선생님들의 정치, 사상, 신념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지는 의문이다. 당장 나부터도 그분들의 생각에 동의가 되지 않는 것이 많다. <송환>이 나오고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는데, 세상은 20년 동안 아주 많이 바뀌었고, 나 또한 바뀌었는데, 이분들은 변함이 없다. 변함이 없는 것은 때로는 올곧음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성장하지 않음이고 퇴보일 수도 있다. 이제 돋보기 없이는 글씨를 보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모여서 늘 공부하시는 모습은 굉장히 존경스럽지만, 공부의 내용이 20년 동안 변하지 않는다. 대중교통에서 어깨띠를 매고 승객들에게 스피치를 하는 모습은 한편으로는 '저 연세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는 모습이 정말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죄송하지만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분들과 겹쳐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스스로 의심하지 않는 확고한 신념으로 자신이 아는 것을 아직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사명감을 가지고 설파하는 모습. 아마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둘을 구분 못할지도. 


영화 스틸컷


인상 깊었던 캐릭터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장기수 선생님들도 제각각일 텐데, 아무리 같은 정치적 신념을 공유한다고 해도 차이가 있을 텐데.' 좀 더 편하게 이야기하자면, 병역거부자들도 마찬가지다. 모든 병역거부자들이 대단하고 고귀하게 병역을 거부하는 게 아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양심보다는 가족이나 친구와의 관계,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분위기 이런 것들에 크게 영향을 받아 병역거부를 한다. 장기수들 가운데서도 크게 정치적으로 각성하지 않았는데 시대에 휩쓸리거나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분단의 경계 틈 사이에 빠져버린 분들도 있지 않을까. 그런 분들의 목소리도 듣고 싶다고 생각하는 찰나에 마 씨 성을 가진(정확한 이름이 기억이 안 남) 장기수 분이 나왔다. 다른 장기수들과 교류하지 않는 그는, 공작원을 하지 않았다면 죽임 당했을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공작원이 되어 남한에 내려왔다가 잡혔다고 대답했다. 양심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이 분은 남북 모두에서 양심의 자유를 침해당한 것이다. 북에서는 스스로 내키지 않는 작전이나 역할을 강제적으로 해야만 했고, 남쪽에서는 강제로 사상전향서를 작성해야 했으니. 


양심의 자유를 상징하는 존재들, 장기수나 병역거부자들. 사실 가까이서 뜯어보면 그이들의 양심의 내용은 의외로 앙상하거나 혹은 고귀하지 않다. 이 순간의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감옥살이도 불사하지만 또 다른 때에는 양심의 자유를 외면하고 현실에 굴복하기도 한다. 전향도 했다가, 그 선택을 후회했다가, 타협도 했다가, 그러다가 어떤 일에 대해서는 죽어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 그것이 양심이다. 비전향 장기수들만 고귀한 양심을 가지고 있고, 전향한 장기수들은 양심은 격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양심이란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것, 외부의 힘과 권력에 속절없이 무너졌다가도 어느 순간 어느 곳에서는 또 양심의 목소리만큼 강력한 것이 없는 것, 논리와 합리적인 이성만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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