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가가 사회적 토론에 적극 나서야 하는 이유
작년 7월 콜롬비아에서 열린 평화활동가들의 국제컨퍼런스에 참여했을 때였다. 참가자들이 자유롭게 워크숍을 열고 다른 참가자들은 관심 있는 워크숍에 참여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콜롬비아의 병역거부운동 활동가들과 함께 '병역거부 운동, 한국과 콜롬비아의 사례'라는 이름의 워크숍을 열었다. 영어와 스페인어와 한국어가 뒤섞인 복잡한 대화 속에서 모두가 박장대소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병역거부자들이 받는 질문(을 가장한 공격)에 대해서 서로 나눌 때였다.
독일에서는 병역거부자들이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비행기가 추락해서 승객들이 비행기에서 뛰어내렸다. 당신의 어머니와 여자 친구가 동시에 뛰어내렸고 당신은 한 명만 구할 수 있다. 누구를 구할 것인가."
유럽에서 온 활동가가 독일의 사례를 소개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콜롬비아 활동가가 말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받아요. "칼을 든 강도가 당신 집에 침입했다. 강도는 당신의 여동생을 강간하려고 하고 당신 옆에는 총이 있다.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콜롬비아 병역거부자들이 받은 질문은 한국의 병역거부자들에게도 익숙하다. 20년 전에는 무려 판검사들이 재판에서 저런 질문을 병역거부자에게 했다. 요즘은 적어도 판검사들이 저런 질문을 대놓고 하지는 않는다. 세월이 흐른 만큼 질문(을 가장한 공격)도 업그레이드되어 이런 질문을 하곤 한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때 시민군이 총을 들고 공수부대와 맞섰는데 그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혹은 일제시대 때 무장 독립운동에 대해 어떻게 평가합니까?
영어 쓰는 사람, 스페인어 쓰는 사람, 한국어 쓰는 사람들이 각자의 언어로 이야기하는데 내용이 하도 비슷하니 우리는 모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이런 이야기 하면서 웃을 수 있지만 예전에는 그러지 못했다. 병역거부 운동은 시작부터 아주 많은 억지스러운 질문(을 가장한 공격)을 마주해왔다.
모두가 병역거부하면 나라는 누가 지킬 건데?
외국은 다들 군대 키우는데 우리만 총 내리면 전쟁 나면 어떻게 할 건데?
너희만 잘났어? 누군 평화를 싫어해서 폭력이 나쁘다는 거 몰라서 군대 가나?
군인들이 지켜주니까 너희가 병역거부도 할 수 있는 거 아냐? 군인들이 만든 평화에 무임승차하는 거 아냐?
군의 무기 도입을 당장 획기적으로 줄일 수 없는 현실적인 상황에서 국내 방산업을 축소하자는 것은 외국 무기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자는 이야기냐?
이 가운데는 마지막 질문처럼 병역거부자들의 약점을 파고드는 질문도 있지만, 많은 경우 논리적인 대답이 사실상 의미가 없게 느껴질 정도로 무작정 찔러대는 질문들이다. 논리와 근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억지를 반복적으로 마주하다 보면 온 몸에 힘이 쭉 빠졌다. 거기에 더해 날 선 말들, 인신공격, 가족을 들먹이는 협박성 댓글까지 겪다 보면 마음이 상하기도 했다. 나는 그나마 마음이 단단한 편이고 악성댓글에 상처를 덜 받는 편인데도, 그게 누적되니 마음에 짜증과 화가 쌓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들은 토론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수 없었다. 피하는 것도 어느 정도 힘이 있고 빽이 있어야 할 수 있다. 우리는 드넓은 벌판 한가운데서 날아오는 돌을 피할 곳이 없는 처지였다. 그저 마주하는 수밖에. 피할 수 없다면 즐기기는 개뿔, 그냥 돌을 맞으면서도 의연한 척 대처했다. 어처구니없는 질문들에도 성심 성의껏 대답했다.
무슨 큰 그림이 있다거나 미래를 내다본 건 아니었다.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그래서 변명이든, 핑계든,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병역거부 운동의 생각을 말하고 토론하고 논쟁했다. 나와 내 친구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 지나고 났으니 쉽게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 과정을 통해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들은 성장할 수 있었던 거 같다.
사실 대화할 의지가 없는 상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상대와 토론하는 것은 생산적인 일이 아니다. 그래서 병역거부를 덮어놓고 싫어하는 사람들과 토론하는 것을 피하고 싶었지만 피할 수 없었고, 하는 김에 노력하다 보니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토론 과정에서 우리가 신경 써야 하는 사람은 어쩌면 눈 앞의 반대자들이 아니라는 것, 그 토론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100분 토론' 같은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을 떠올려보자. 병역거부와 대체복무를 옹호하는 활동가와 그것을 반대하는 보수 논객이 마주 보고 토론을 한다. 어차피 그 둘의 토론은 평행선이고, 서로는 서로의 주장에 설득될 가능성이 없다. 하지만 그 토론을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은 그 토론 과정을 보고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 사람들은 여유 있는 얼굴로 예의를 갖춘 말투를 구사하는 쪽을 신뢰하고,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며 논리적인 주장을 하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 얼토당토않은 질문을 가장한 공격에 성심성의껏, 논리적으로, 차분하게 대답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사람들 때문이었다.
물론 토론 과정에서 성장이 수월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토론과 논쟁에서 나는, 그리고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들은 때때로 실패했다.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질문에 당황하기도 했고, 정곡을 찌르는 날카로운 질문에는 동문서답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뒤에는 늘 우리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노력했다. 자료를 찾고, 공부를 하고, 근거 자료를 만들고, 새로운 논리를 개발했다. 논리와 주장뿐만 아니라 말투, 태도 등 듣고 말하는 자세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가장 중요한 노력은 설득의 가능성을 열어두려는 노력이었다. 우리만 사람들을 설득한 게 아니었다. 우리 또한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생각이 달라지기도 하고 설득되기도 했다. 병역거부 운동이 가지고 있는 철학과 신념의 핵심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그걸 구현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분명 많은 변화를 겪었다. 때로는 자연스러운 변화도 있었고, 어쩔 수 없이 변화를 받아들이고 난 뒤 뒤늦게 그 변화가 옳은 방향이었다고 깨닫기도 했다.
사회운동을 하다 보면 아주 자주 반대 의견을 마주한다. 정중하면서도 합리적인, 그래서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내용이 많은 반대의견도 있지만 대개 알맹이는 없이 다짜고짜 무턱대고 반대하는 경우도 많다. 거기서 더 나아가 혐오의 감정을 서슴지 않고 드러내는 반대 의견을 마주할 때는 화가 나거나 서글퍼지기도 한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보수 기독교 목사의 거짓 선동, 군대 안 간 여자는 대체복무제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망언(국방부에서 개최한 대체복무 공청회에서 실제로 공개적으로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들을 반복해서 듣는 건 확실히 활동가들의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 하지만 그런 의견을 그냥 멍청한 소리라고 치부하고 넘어간다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활동가들에게는 차별금지법이나 대체복무제도는 토론할 이유가 없을 정도로 당연한 상식이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회운동의 주장은 어쨌든 지금 사회에서는 보편으로 인정받지 못하거나, 소수 의견으로 치부되기 쉬은 것들이다. (보편성을 획득한 이슈에 대해서는 굳이 활동가들이 나설 필요가 없거나, 나서더라도 기존의 시스템이 잘 돌아가는지 감시하는 정도이지 새로운 주장을 펼칠 필요가 없다.) 결국 차별금지법이든 대체복무제든 그것이 사회에 도입되고 온전히 기능하려면 우리의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 멍청한 소리를 하는 사람이나 혐오 발언을 쏟아내는 사람을 우리가 설득할 필요는 없지만,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과 하는 대화를 보고 어느 쪽을 신뢰할지, 혹은 어느 쪽을 지지할지 결정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운동에서 토론과 논쟁이 중요한 까닭은 사회운동이 만들고자 하는 것은 규범 그 자체라기보다는 사회의 부조리한 부분을 끊임없이 개선해나가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다닌 회사의 대표이사는 진보 코스프레하는 것을 좋아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 이름난 진보인사이기도 했다. 대표이사는 어느 날 언론 인터뷰에서 구내식당 메뉴가 채식이라고 거짓말로 인터뷰를 하고 나서, 조리실장님께 당장 냉장고에 있는 고기와 생선을 버리고 앞으로는 모든 음식을 채식으로만 만들라고 업무 지시를 내렸다. 채식이 강제로 규범이 되는 순간, 그것은 해방이 아니라 폭력이고 억압이었다.
당시 채식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채식이라는 실천에 대한 토론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규범은 세상이 바뀌고 사람들이 바뀌면 깨지기 마련이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규범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규범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발산하는 에너지에서 나온다. 대통령 혼자 결단해서 만든 개혁 입법이 정권이 바뀌면 힘 없이 무너지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군사주의 문화에 대한 토론을 하지 못한 채 대체복무제를 도입한다면 그 제도가 실제로는 군사주의를 약화시키는 데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사회운동이 만들어야 하는 것은 결과로써 '무엇'이 아니라 '무엇'으로 가는 과정, '왜'를 질문할 수 있는 힘이 아닐까? 질문하고 대답하는 힘, 결국 토론과 논쟁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