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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Feb 28. 2020

편지 쓰기와 편지 읽기의 즐거움

감옥 시절, 나를 살게 해 준 고마운 편지들

이 노래를 들으면서 글을 썼습니다. 브로콜리 너마저 '편지' 노래를 들으면서 읽어주셔도 좋고, 그냥 읽으셔도 괜찮아요. (제목에 쓴 사진은 전쟁없는세상의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평화수감자의 날 행사 사진입니다.)





편지 쓰기가 활동가의 일이라니


편지라니... 손으로 하는 건 다 못하는데, 그중에서도 글씨 쓰기를 가장 못하는 내가 1년 조금 넘는 동안 400통이 넘는 손편지를 쓰고, 해마다 12월 1일 즈음에 영어도 못하면서 한국, 미국, 에리트리아, 싱가포르 등지로 편지와 엽서를 써서 보내다니. 평화운동 단체 활동가의 일 중에 편지 쓰기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모든 활동가들이 편지 쓰는 일이 많진 않다. 전화가 있고, 이메일이 있고, 메신저가 있는데 굳이 편지를 쓸 필요가 없다. 특별한 마음을 담거나 선물을 하면서 작은 엽서 등에 마음을 꾹꾹 눌러 담는 경우는 있어도 그게 업무는 아니니까. 전화도, 이메일도, 메신저도 쓸 수 없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경우가 아니면 굳이 느리고 분실될 위험도 있는 편지를 써야 할 일이 없다.


그렇다. 전화도, 이메일도, 메신저도 할 수 없는 사람들과 소통해야 하는 단체 활동가들이 주로 편지를 쓴다. 바로 감옥에 있는 사람들과 소통해야 하는 단체들. 양심수를 후원하는 민가협(민주화를 위한 가족운동 협의회)이나 구속노동자후원회 같은 곳들, 그리고 수감된 병역거부자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 전쟁없는세상 활동가인 나 같은 활동가들이 편지를 쓰게 된다.


물론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무조건 손편지를 쓰진 않는다. 법무부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의 이름과 수감번호만 알면 누구든 쉽게 인터넷 서신을 보낼 수 있다. 마치 이메일 보내듯 내용을 입력해 전송 버튼을 누르면 수감자들에게는 A4 용지에 출력되어 전달된다. 아, 당연하게도 수감자들은 컴퓨터를 쓸 수 없고 손편지로 답장을 해야 한다.


손편지 말고도 감옥에 수감된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방법이 있다. 친구들이 보내준 인터넷 서신들과 면회 왔다가 남기고 간 접견 서신.
친구 조은이 병역거부로 감옥에 있을 때 나에게 보낸 편지. 수감자들은 시간은 많고 인터넷은 없으니 편지도 많이 쓰고, 편지 쓸 때 자잘한 장난도 많이 친다.


전쟁없는세상에서는 과거 병역거부 수감자들이 많았을 때는 2주일에 한 번씩 바깥 소식을 모아서 우편물을 보내곤 했다. 2018년 6월 헌법재판소의 병역법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에는 수감자가 확 줄어 없어져서 수감자 우편물을 보내지 않다가, 최근 들어 다시 수감자가 생기면서 수감자 우편물을 부활시켰다. 다만 과거처럼 서류봉투 두툼하게 뭔가를 채워 보내지는 않고 활동가들이 돌아가면서 인터넷 서신을 쓰는 정도다. 실무적인 부담은 확실히 덜하다.


그리고 해마다 12월 1일 평화수감자의 날을 즈음해서 평화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혀 있는 평화수감자들에게 편지를 쓰는 행사를 한다. 전쟁없는세상 홈페이지에서 평화수감자의 날 행사 사진을 볼 수 있다.



내가 받은 편지들


편지에 얽힌 기억이 제법 많은데 주로 내가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로서 주고받은 편지에 대한 기억보다는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시절 주고받은 편지에 대한 기억들이다. 소소한 몇 가지 기억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손글씨를 정말 더럽게 못쓴다. 그 때문에 오해받은 적이 있다. 인천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인데, 집이 근처인 친구가 면회를 자주 와주었다. 자연스럽게 나도 그 친구에게 이러저러한 부탁을 많이 하게 되고 면회 때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편지로 부탁을 하고 내 안부도 전하곤 했다. 그런데 한 번은 집 우편함에 꽂힌 내 편지를 친구 어머니가 먼저 보시고는 초등학생이 장난 편지한 줄 알고 버리려고 뜯어보고선 깜짝 놀라셨다고 한다.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친구에게 편지를 썼는데 답장이 안 왔다. 꼬박 답장을 주던 친구였는데, 왜 이번에는 답장이 안 오지? 오늘은 올까, 내일은 올까, 날마다 편지 배달 오는 시간만 기다렸는데 끝내 오질 않았다. 답답했지만, 그 답답함이야 말로 감옥 생활의 본질. 무엇 하나 바로바로 확인하거나 알아볼 수 없는 곳이 감옥이니. 다시 편지를 써서 이전 편지 못 받았냐고 물었는데, 친구는 편지가 안 왔다고 답장을 보냈다. 갇혀 있으면 괜스레 의심만 많아지는 법, 교정당국이 내 편지를 빼돌렸나? 이런 말도 안 되는 의심을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머리에 떠올리고는 했다. 내가 뭐라고 내 편지를 빼돌리나. 몇 달 뒤에 그 친구가 말하길 "오빠 편지가 우리 주인집 개 집 안에 있었지 뭐예요. 개가 물어뜯어서 편지가 군데군데 알아볼 수 없게 되었어요" 나참, 댕댕이가 범인이었는데 애먼 교정당국만 의심한 거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편지는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보낸 편지였다. 처음 보는 이름이었고, 글씨체를 봐도 남성인지 여성인지 아이인지 어른인지 구분이 안 갔다. 얼핏 보기에는 아이 같은데, 편지지를 보면 독립영화 홍보용 엽서거나, 어디 전시회의 홍보 엽서 같은 것들이었다. 그렇다. 내용이 없는 편지였다. 영화나 전시 홍보물을 보내주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보통은 따로 서류 봉투에 홍보물들을 챙겨서 보내줬는데 그분은 엽서 자체에다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주소만 적어서 몇 번을 보내주셨다. 내용도 없고, 모르는 분이라 답장을 쓰지 않다가 한 번은 답장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계속 무언가를 보내주시는 건 고마운데 저를 어떻게 아시는지, 누구신지 정중하게 묻는 편지를 보냈다.


누군지도 모르는 분이 꾸준히 내용 없는 엽서와 책자를 보내주셨다. 누구였을까? 왜 나한테 이런 것들을 보내셨을까?


그리고 답장이 왔다. 이번에는 노란 서류봉투에 두툼한 종이 무게가 느껴졌다. 이번에는 정말 내용이 있는 답장인가 보다 싶었는데.. 이번에는 아예 엽서도 없고 대신 책이 한 권 있었다. 서울의 여러 골목을 여행하는 책이었는데 비매품이었다. 이 책 덕분에 나는 감옥 안에서 서울의 곳곳을 여행할 수 있었다. 그치만 책을 보낼 때도 내용이 담긴 편지는 없었다.


결국 출소할 때까지 그분은 그런 식으로 책자며, 영화 포스터며, 엽서 같은 것들을 보내왔고 나는 끝까지 그분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출소하고 나서도 그분의 이름과 사는 동네를 가지고 누군지 알아보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알지 못했다.



편지가 없었다면 감옥을 어떻게 살아냈을까


1년 2개월 조금 넘게 한 감옥생활에서 내가 받은 편지는 대략 400통, 받은 편지는 무조건 답장을 했으니(외국에서 온 편지 중에 영어권이 아닌 경우는 빼고) 내가 쓴 편지는 최소 400통이 넘을 거다. 그렇게 많은 편지를 쓰면 손글씨가 교정될 법도 한데 나는 여전히 손글씨를 못쓴다. 교정시설은 나의 신념과 사상은커녕 손글씨 하나도 교정시키지 못했다.


가장 많은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은 역시 같은 처지의 병역거부자들과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들. 내가 수감되어 있던 시절 병역거부자들은 모두 내 또래에, 감옥 가기 전에 전쟁없는세상 활동 같이한 친구들이었다. 부르뎅, 고동, 경수와 가장 많은 편지를 주고 받으며 서로 안부를 묻고 감옥생활 정보를 주고받았다. 전쟁없는세상 활동가인 여옥이, 날맹, 조은은 내게 바깥 소식을 전해주고 나는 감옥 소식을 전해줬다.


그리고 부모님. 사실 한국 사회의 20대 남성 가운데 부모님과 제대로 대화를 하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부모님과 관계가 좋은 편이었지만, 내가 어떤 생각으로 하고 사는지, 어떤 삶을 꿈꾸는지 부모님과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의 삶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아마도 부모님 또한 마찬가지였을 거다. 감옥은 시공간을 단절시키지만, 그 단절의 틈새로 그 전과는 다른 관계가 피어나기도 한다. 감옥 간 아들이 안쓰러워서, 부모님 가슴에 대못 박은 게 못내 미안해서 우리는 편지를 쓰고 받았다. 20대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서로의 생각과 삶을 나누었다.


생각해보면 내게 편지는 감옥 생활의 중요한 숨구멍이었다. 전쟁없는세상의 수감자 우편물을 기다리다 보면 2주가 지나갔다.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고, 답장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답장이 오면 몇 번이고 읽었다. 글씨를 읽고, 마음을 읽었다. 어떤 친구들은 내가 마치 대나무숲이라도 되는 양 비밀을 털어놓기도 했다. 나는 당연하게도 그 기억들을 감옥에 두고 나왔으니 비밀은 비밀로 끝이 날 거다.


그리고 편지를 썼다. 겨울이면 취사장 일로 퉁퉁 부은 손마디를 주물러 가며 편지를 썼고, 추위에 곱은 손을 녹여가며 편지를 썼다. 오랜 친구들에게 책이며 옷가지들을 부탁하는 편지를 썼고, 사람들에게 나의 안부를 알리는 편지를 썼다. 감옥 안에서 쏟아내지 못하는 말들과 감정과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편지를 썼다.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보고 싶은 마음과 그리운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썼다. 투머치 토커인 내가 감옥에서는 말을 거의 안 하고 지냈는데, 특히 독거방에 있을 때는 말을 할 일조차 없었는데, 편지 덕분에 견뎠다. 내가 하루에 쏟아내야 하는 언어의 대부분을 편지지가 흡수해갔다.




그래서 지금 나는 감옥에 편지 보내는 일을 기꺼운 마음으로 한다. 감정 노동 서툰 나지만, 잘 알지도 못하고 개인적인 친분도 없어서 인터넷 서신 보낼 때마다 '오늘은 무슨 내용으로 분량을 채워야 하나' 고민하지만 쓰고 또 쓴다. 감옥에서 내게 편지가 그랬듯 지금 수감자들에게도 이 편지가 그들의 존재와 위치와 관계를 확인시켜 줄 수 있는 가느다란 선일 테니. 감옥 안에서 해소되지 않는 감정일 테니. 하루하루의 기다림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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