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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Nov 21. 2022

아무튼 언니

짧은 리뷰

은유 작가가 쓴 인터뷰집 <크게 그린 사람>에서 원도 작가를 처음 접했다. 원도 작가는 경찰이다. 원도 작가의 인터뷰를 읽을 때 마침 나는 무기박람회 DX KOREA에서 한 직접행동으로 일산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을 즈음이었고, 집회 시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하는 의무에는 둔감한 채 어떻게든 형사사건으로 만들려고 하는 티가 팍팍 나는 일산경찰서에 짜증이 나 있을 때였다.


여성 경찰들이 경찰 조직 안에서 차별받는 거를 모르지는 않지만(사실 그냥 그러겠거니 생각할 뿐이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다) 그래도 경찰은 경찰일 뿐. 이런 삐딱한 마음을 가지고 인터뷰를 읽었는데 무척 인상 깊었다. 그래서 원도 작가가 쓴 <경찰관 속으로>를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다. 직업으로서 경찰에 대한 이야기에도 흥미를 느꼈고, 원도라는 작가도 궁금했기 때문에. (아마도 과학수사대 소속이라고 해서 더 궁금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자전거 여행 때 들른 하동의 동네책방에서 <아무튼, 언니>를 발견하고 샀다. 사실 이 책을 꼭 사려던 건 아니다. 여행지에서 동네책방에 가면 꼭 한 권씩 책을 사는데, 그 서점에는 이미 내가 산 책이거나 아주 궁금하지는 않은 책들만 있었다. 내가 읽고 싶은 건 <경찰관 속으로>였지만 그 책은 없었고, 원도 작가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던 나는 <아무튼, 언니>를 골랐다. 조금 쌀쌀한 밤이었는데 서점 주인이 믹스커피도 타 주고 단감도 주셨던 게 기억에 남는다.



빨려 드는 글솜씨와 익숙한(?) 이야기


첫 문장부터 몰입이 됐다. 글솜씨도 좋았고, 작가가 어린 시절 처했던 상황도 남달랐기 때문에 전개될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남다른 상황이 뻔하고 상투적인 이야기로 흘러갈 수도 있지만, 그랬다면 은유 작가와 한 인터뷰를 보고 난 뒤였기 때문에 그러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군데군데 경찰이라는 직업의 특징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초보 직장인(취업 준비 기간까지 포함해서)의 좌충우돌 인생사를 함께 해준 언니들에 대한 애정을 가감 없이 표출한 에세이였다. 그래서 내가 처음 떠올린 단어는'경찰', '여성'이 아니라 '청년'이었다. 인생의 단물 쓴 물을 다 본 뒤의 회고록이 아니라, 인생의 단물 쓴 물 한가운데를 헤엄치는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감각이 부럽게 느껴졌다.


그러다 차츰 이야기가 '여성'과 '경찰'로 넘어왔다. 나는 '경찰' 이야기가 더 듣고 싶었는데 '여성'에 더 방점이 찍혀 있었다. 새롭지는 않은 이야기. 물론 꼭 필요하고 더 필요하지만 이미 여러 책에서 수차례 읽은 이야기들. <82년생 김지영>에서 읽었고 신문기사에서 읽은 이야기들이다, 고 생각했다. 물론 사회 전체로 보면 아직 모르는 사람도 많고 알면서도 외면하거나 부정하는 사람도 많은 이야기기 때문에 더 필요한 이야기지만, 내가 굳이 이걸 또 읽을 필요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한 게 사실이다. 나는 경찰 이야기가 더 듣고 싶다고 생각했고, 여성 차별에 대한 이야기라면 이것보다 더 깊이 있는 분석을 담은 책을 읽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나의 좁디좁은 세계


그러다 작가가 언급한 한 통계를 읽으며 나의 좁디좁은 세계를 실감했다. 사실 처음 접한 통계도 아니다. 1990년 백말띠 해에 태어난 신생아의 남녀 성비가 여아 100명 당 남아 116.5명이고 대구와 경북지역은 각각 129.7과 130.7이라는 통계. 자연의 법칙을 거스른 이 어마어마한 불균형의 강도가 새삼 크게 다가왔다. 우리가 인권에 주목할 때는 숫자가 채 담아낼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경우는 숫자만으로도 너무 거대했고 숫자가 담아내지 못하는 이야기의 성격도 너무나 다르다. 존재하나 말하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존재하지 못하게 된 이들의 존재하지 못한 이야기들이니.


뒤통수를 크게 한방 맞고 난 뒤에는 이 책의 이야기들이 다시 보였다. 작가가 고등학교에서, 대학교에서, 취업 준비하면서 겪은 일들을 보면서 나는 연신 "아직도 이런 곳이 있단 말이야?'를 남발했는데, 그런 것들이 실은 내가 속한 세계가 좁디좁았기 때문에, 나의 시선이 좁디좁았기 때문에 몰랐던 것이다. 나는 남자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고, 시민단체에서 일하기 때문에 내 눈으로는 볼 수 없었을 뿐. 차별은 여전히 당당하고 뻔뻔하게 존재한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내가 위치한 자리에서 한 발짝만 달라진 풍경에서 보더라도 쉽게 보이고 무겁게 느껴지는 문제인데 나는 그만 익숙하고 조금은 반복적인 이야기라고 여겼던 것이다. 나의 오만함에 크게 반성하는 독서가 됐다.



사랑과 우정에 대한 찬양 


이렇게만 쓰고 나면 이 책이 여성이 처한 암담한 현실을 고발하는 르포물이거나, 사회비판서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은 어두운 세상에 대한 책이 아니다. 오히려 어둡고 암울한 세상에서도 함께 살아가는 힘을 서로 주고받는 이들과 나눈 사랑과 우정을 찬양하는, 아주 밝고 희망차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책이다. 세상을 욕하고 싶을 때, 같이 욕해줄 사람이 필요해서 읽었는데, 욕보다는 내 주변의 고마운 사람들을 생각나게 해주는 책이다. 차별과 혐오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바로 사랑과 우정이라는 걸, 유쾌하게 보여주는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동에 있는 동네책빙 시소에서 예쁘게 포장(?)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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