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을 강요하는 전쟁의 거짓말
우주의 절반을 없애기 위해 인피니티 스톤을 모으고 있는 타노스가 마지막 마인드 스톤을 찾기 위해 지구에 쳐들어 옵니다. 어벤져스는 타노스를 막고 지구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마인드 스톤을 이마에 지니고 있는 어벤져스 멤버 비전을 보호합니다. 하지만 타노스의 압도적인 힘에 어벤져스는 점점 궁지에 몰리고 이대로 가면 인피니티 스톤을 빼앗기고 우주의 절반이 가루가 되어 사라질 위기에 처한 찰나, 누군가 마인드 스톤을 파괴하자고 합니다. 캡틴 아메리카는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우리는 생명을 거래하지 않아.
We don’t trade lives
극장에서 개봉했을 때는 "친구를 버릴 순 없어"라고 번역되어 오역 논란이 일었던 대사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한 명을 희생해서 지구 인구 절반, 아니 우주 인구 절반을 살릴 수 있다니 꽤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이기도 합니다.(전체가 죽지 않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절반이 희생해야 한다는 타노스의 주장도 비전을 희생시켜 타노스를 막자는 주장과 같은 방식인 셈이죠) 생명의 가치에 경중을 따질 수 없다는 신념에서 나온 말이죠. 캡틴 아메리카는 비록 이름에는 애국주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지만(캡틴 '아메리카'라니, 무슨 송일국네 세 쌍둥이 '대한' '민국' '만세' 이름 같지 않나요?) 어벤져스를 해체하라는 국가의 명령에는 단호하게 맞서는 신념의 강자이기도 합니다. 타노스의 계획이 실패하기를 바라면서도 우리는 캡틴의 저 대사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영화관 밖으로 나오면, 비전 정도가 아니라 에번져스를 통째로 희생시켜서라도 타노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려는 선택을 흔하게 마주하게 됩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한국전쟁이 발발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난 지 채 3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또다시 큰 전쟁이 시작된 거죠. 물밀듯이 진격해오는 북한의 인민군을 한국의 국군은 막아낼 겨를이 없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의 주요 인사들은 가장 먼저 도망치고, 사람들은 뒤늦게 피난길에 오르느라 서울의 주요 도로는 가재도구며 옷가지 등을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나선 피난 행렬로 가득 찼습니다. 한강 북쪽에 사는 서울시민들은 한강을 건너기 위해 한강철교로 모여들었습니다. 한강철교는 순식간에 출근길 신도림역보다도 더 복잡한 인파로 가득 차버렸습니다. 그리고 한국군은 인민군의 추격 속도를 늦추기 위해 피난민이 가득 찬 한강철교를 폭파해 수백 명의 자국민을 살해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죠. 인민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다리를 폭파할 수는 있지만, 다리를 통제하고 사람들이 없을 때 폭파한 것도 아니고 피난민 가득한 다리를 폭파하다니요.
그리고 잘 아시다시피, 한강철교를 폭파해서 북한 인민군의 진격 속도를 조금 늦추기는 했지만 전쟁은 그 뒤로 3년간 이어집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습니다. 당시에 폭파를 안 했다면 북한군이 순식간에 한반도를 점령했을지, 아니면 다리 폭파와 관계없이 참혹하고 지난한 전쟁이 몇 년 동안 이어졌을지는 아무도 모르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결과입니다. 소수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긴 한국군은 수백 명을 희생시켰고, 전쟁은 3년이나 더 지속되었습니다.
전쟁의 한 복판에서는 이처럼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가는 희생을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게 여기는 일도 일어납니다. 전쟁 시기가 아닐 때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의 평화를 핑계 삼아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대표적으로 전쟁을 대비한 군사기지나 군인들의 훈련장이 들어선 지역 주민들이 겪는 희생과 고통을 들 수 있습니다. 경기도 평택에 대추리와 도두리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가수 정태춘의 고향이기도 하고요, "바람이 머물다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노을"이라는 노랫말로 시작되는 동요 '노을'의 배경인 마을입니다. 대추리 마을 주민들은 군대에 땅을 빼앗기고 세 번 쫓겨납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 군대의 기지가 마을에 들어서면서 쫓겨나고,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의 비행장터가 마을에 들어서면서 쫓겨나고, 마지막에는 한 번은 미국 군대에 쫓겨나고, 마지막은 미군기지 확장을 해야 한다며 한국 정부가 마을 주민들을 쫓아냅니다.
일제 시대와 미군정 시기에는 정부가 힘이 없으니 그렇다 쳐도, 민주 정부가 들어선 2000년대 중반에도 군사기지에 쫓겨나야 한다는 것을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안 하는 동안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공동체를 만들어서 온갖 정성과 노력을 쏟아온 마을이었습니다. 주민들이 스스로 바닷물이 들던 땅을 개척해 소금물 빼가면 비옥한 농토로 일구고, 자식들이 멀리 학교 다니는 게 안쓰러워 마을 사람들이 한두 푼 모아 직접 노동해 마을에 떡 하니 학교까지 지어 교육청에 기증을 했으니 마을에 대한 애정과 소속감이 남다를 수밖에요. 그야말로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 있는 땅이니까요. 대추리 도두리 마을 주민들과 평화활동가들, 인권활동가들이 저항했지만 한국 정부는 어쩔 수 없다며 결국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마을을 파괴하고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켰습니다.
비단 대추리와 도두리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사격장이 있던 매향리와 무건리, 해군기지가 들어선 제주 강정마을, 사드 포대가 배치된 소성리에서 이런 일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주일 미군의 80%가 주둔해 있는 오키나와는 미군 부대와 연관된 사건 사고로 주민들이 죽고 다치고, 주변 자연환경이 파괴되고, 동물들의 서식처가 파괴됩니다. 일본 본토의 평화를 위해 일본에게는 미군이 필요한데 그 희생을 일방적으로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셈이죠.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꼭 안보나 평화 분야에 국한되는 건 아닙니다. 칸 영화제에 이어 아카데미 시상식까지 석권한 봉준호 감독의 작품 <설국열차>를 보면 영구동력기관으로 움직이는 설국열차는 치명적인 결함을 해결하기 위해 꼬리칸의 어린아이들을 부품처럼 소모합니다. 그 아이의 희생은 열차에 탄 다른 사람들의 생존과 머리칸의 풍요를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되죠.
사실 이건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캡틴 아메리카처럼 "우리는 생명을 거래하지 않아"라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더 복잡합니다. 어슐러 K. 르귄의 소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다음 내용부터는 소설의 중요한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은 피해 주세요.) 오멜라스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유토피아입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우며, 그곳의 주민들은 창의적이고 철학적입니다. 불의에 분노하고, 춤과 노래와 시를 사랑하고, 축제를 즐기며, 사유와 토론이 일상인 곳입니다. 그런데 오멜라스의 어느 건물 지하, 햇볕도 들지 않고 창문도 없는 습한 방에 열 살쯤 되는 아이 한 명이 갇혀 있습니다. 옥수수 가루와 기름 반 그릇으로 하루를 버티는 그 아이를 오멜라스의 주민들은 일생의 어느 시점에 한 번은 봐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불쌍한 아이를 그곳에서 빼내려 하지 않습니다. 그 아이의 처지가 바로 오멜라스가 누리는 풍요와 행복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은 분노 하지만 이내 그 아이를 잊고 살아가고, 아이를 외면하지 못하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고결하고 행복한 삶을 뒤로하고 오멜라스를 떠납니다.
어려운 문제이지만 외면하면 안 됩니다. 특히 우리의 평화를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거나,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문제적입니다.
첫 번째로 현실적인 이유입니다. 과연 희생을 강요한다고 평화가 지켜질까요? 혹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나요? 피난민들을 희생시키고 한강철교를 폭파했지만 전쟁은 3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희생으로 평화를 지킬 수 있다면 매향리와 대추리 주민이 희생했는데 왜 계속 평화롭지 못하고, 또다시 평화를 위해 강정마을 주민들이, 소성리 주민들이 희생해야 한다고 하는 걸까요? 저는 소수의 희생으로 평화를 지키거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말은 전쟁을 주도하는 권력층의 거짓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짓말까지는 아니더라도, 높은 확률로 희생은 희생으로 끝나고, 또 다른 희생을 강요하는 순간이 다가오게 됩니다. 매향리 다음에 대추리가, 그다음에 강정마을이, 또 소성리가 호출되는 것처럼요.
두 번째 이유는 좀 더 근본적입니다. 소수의 희생으로 얻고자 하는 '모두의 평화'라는 게 과연 존재할까요? 이 매거진에 쓴 '평화가 무엇이냐'라는 글에서 "평화는 당파적이고 논쟁적인 개념"이며 "고정불변의 가치가 아니라 다양한 개념과 해석이 충돌하고 논쟁하는 장"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평화는 각기 다른 얼굴, 무수히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의 평화'는 허구의 개념일 뿐입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좀 더 자세하게 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