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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Mar 25. 2020

서로 다른 전쟁의 얼굴, 평화의 얼굴

모두에게 좋은 평화는 불가능하다


전쟁의 얼굴


할리우드의 명배우이자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2006년 두 편의 영화를 선보입니다. 두 편 모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오지마에서 벌어진 전투를 다루는데, 주인공이 다릅니다.  <아버지의 깃발>은 미국 군인들이 주인공이고,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일본 군인들이 주인공입니다. 이 두 편의 영화는 각각도 훌륭한 영화지만 두 편을 같이 봐야 더욱 진가를 발휘합니다. 보통 전쟁 영화들은 관객들이 감정을 이입하는 우리편과 적군을 나누고, 적군은 나쁘게 묘사하죠. 병역거부자 데스몬드 도스의 이야기를 다룬 <헥소고지>에서도 적군인 일본군은 전쟁에 미쳐있는 정신 나간 사람들처럼 묘사합니다. 하지만 이 두 편의 영화는 적군을 악마화하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 대신 전쟁에 휩쓸린 개인들, 서로 적대하는 양 진영의 사람들에게 전쟁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이 두 편의 영화를 나란히 봤을 때 우리는 전쟁을 선과 악의 대립으로만 보지 않을 수 있고, 누구의 위치에서 누구의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쟁의 모습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영화 포스터.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안타깝게도 개봉 당시 한국에서는 상영을 안 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미국과 일본, 서로 다른 국적에서 바라본 전쟁입니다만 전쟁에서 위치를 결정 짓는 기준이 국적만 존재하는 건 아닙니다. 같은 일본인 안에서도, 같은 미국인 안에서도 각자의 처지에 따라 전쟁의 다른 얼굴을 마주합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앞으로 일어날 전쟁은>은 바로 이 지점을 보여줍니다. 


앞으로 일어날 전쟁은   

   -베르톨트 브레히트


앞으로 일어날 전쟁은 

첫 번째 전쟁이 아니다. 그 이전에도 

이미 여러 차례 전쟁이 일어났었다. 

지난번 전쟁이 끝났을 때

승전국과 패전국이 있었다. 

패전국에서 하층 서민들은 

굶주렸다. 승전국에서도 역시 

하층 서민들은 굶주렸다. 


서 있는 자리는 국적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하지만 계급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그가 어느 나라 사람이든 전쟁은 굶주림을 뜻합니다. 이 경우는 국적보다 계급이 전쟁의 얼굴을 결정짓는 기준이 되겠지요.


젠더에 따라서도 전쟁을 다르게 경험합니다. 전쟁은 늘 가난한 사람을 착취해서 부자들의 배를 불려주지만, 전쟁이 가난한 여성과 가난한 남성을 착취하는 방식은 다릅니다. 전 세계 군사기지의 주변에는 이른바 '기지촌'이라는 이름의 성매매 밀집지역이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주로 자국의 가난한 여성들과 가난한 나라의 이주 여성들입니다. 전쟁은 가난한 여성들의 섹스 노동을 착취하면서 유지됩니다. 가난한 남성들은 보통 군대에 끌려가서 전투를 수행합니다. 그 극단에 놓인 이들이 소년병입니다. 소년병은 국제법상 위법입니다만 버젓이 존재합니다. 유엔아동기금(UNICEF)에 따르면 1990년대에는 전 세계에 약 30만 명 정도 소년병이 있었고, 20세기 들어 숫자가 줄어들어 10만 명가량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전쟁의 소모품이 되는 것은 남녀가 다를 바 없지만 그 양상과 방법은 다릅니다. 


우리가 전쟁을 바라볼 때 단순하게 침략국가와 침략당한 국가로만 구분한다면 참 쉽고 편하겠지만, 그건 전쟁을 제대로 인식하는 게 아닙니다. 전쟁이 일어나는 복잡한 원인, 전쟁이 가져오는 더 복잡한 결과를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선 전쟁에서 피해와 가해를 이분법적으로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남성과 여성에게, 1 세계 국민과 3세계 국민에게,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게 전쟁이 어떻게 다른지를 입체적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전쟁의 복잡한 원인과 구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평화의 얼굴


평화를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전쟁을 볼 때보다 더 복잡하게 바라봐야 할지도 모릅니다. 평화의 얼굴은 전쟁의 얼굴보다 더 다채롭습니다. 


하나하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앞서 말한 전쟁의 얼굴이 달라 보이는 위치들-젠더나 계급, 인종과 국가 같은 기준은 평화를 바라볼 때도 유효합니다. 미국인에게 평화란 테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의미할 수 있겠죠. 반면 이라크인에게 평화란 미군이 없는 나라를 의미할지도 모릅니다. 남성에게 평화란 군대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은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요? 반면 여성에게 평화란 강간이나 성폭력이 없는 세상을 의미할 수도 있고요. 전쟁의 얼굴과 마찬가지로 평화의 얼굴도 젠더와 계급과 인종과 국적 등등이 복잡하게 얽혀서 구성됩니다. 


이것만 해도 충분히 다채로운데 평화의 얼굴은 거기에 또 하나의 축을 더합니다. 똑같은 사물을 평면의 서로 다른 위치에서만 봐도 다른 모습으로 인식되는데, 여기에 더해 사물의 서로 다른 깊이까지 보니 더 다채로워지겠죠. 정물화를 그린다고 생각해보세요. 정물이 놓여있는 앞쪽에서 보는 모습이랑 옆에서 보는 모습, 뒤에서 보는 모습이 다릅니다. 젠더, 인종, 국적, 계급 등의 차이가 바로 정물을 바라보는 위치의 차이입니다.  그 사물의 여러 부분(윗부분과 아랫부분일 수도 있고 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꽃병의 내부일 수도 있겠죠.)을 보는 일이 바로 전쟁이라는 물리적 폭력, 가부장제나 불평등 같은 구조적 폭력, 차별과 혐오 같은 문화적 폭력 들을 살펴보는 일입니다. 위치에 따라서, 바라보는 대상의 어떤 지점이냐에 따라서 우리가 마주하는 얼굴이 달라지는 것이죠. 이 매거진의 글 <평화가 무엇이냐>에서 설명한 '적극적 평화'의 개념을 참고하시면 더 이해가 쉬울 거 같습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평화의 얼굴이 전쟁의 얼굴보다 더 다양한 까닭은 평화가 단순히 전쟁이 부재한 상태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얼굴이든, 평화의 얼굴이든 이처럼 매우 다채롭습니다. 각자의 위치에 따라서, 혹은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아주 많은 평화의 얼굴이 탄생합니다. 이는 바꿔 말하면 모두에게 똑같은 의미의 평화는 없다는 뜻입니다. 모두가 평화를 누려야 하지만 그 평화의 얼굴은 제각각이고, 모두가 함께 누리는 동일한 얼굴의 평화는 불가능합니다.


앞선 글 <모두의 평화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고요?>에서는 소수가 아무리 희생해도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역사적 사례를 통해 설명했는데요, 더 근원적인 문제-소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전제인 '모두의 평화'라는 개념 자체가 허구적인 이유를 구구절절하게 말씀드리게 되었네요. 평화의 얼굴을 다양하게 바라보는 노력은 '모두의 평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평화의 얼굴 안에 풍성하고 다양한 모습을 담아내는 노력 자체가 바로 평화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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