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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이들과 나는 얼마나 다를까

by 이용석


설 연휴, 부모님 집에 가는 1호선은 생각보다 덜 붐볐다. 자리가 없어 서서 가는 사람들이 더러는 손에 커다란 명절 선물을 들고 있어서 통로가 비좁은 감은 있었지만 움직이기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개봉역 즈음에선가 앞량과 연결된 통로가 열리며 나이 지긋한 분이 내가 탄 열차로 들어왔다.


그분은 차량에 들어오자마자 익숙한 톤과 속도로 준비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차림새나 풍기는 분위기로 봐서 교회에서 나온 분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 같은 뻔한 레퍼토리일 테니 신경 쓰지 않았는데, 갑자기 어떤 문장이 내 귀를 파고들었다.


"차례상 차려놓고 절하는 건 조상님이 아니라 마귀에게 절하는 겁니다. 여러분 교회 다녀야 구원받습니다."


설이라고, 다들 차례 지내러 가는 길이란 걸 알고 특별히 멘트를 준비한 거였다. 아니, 차례상에 절하는 게 마귀한테 절하는 거라니. 나는 그 순진한 믿음에 풋 웃음이 나서 고개를 들고 그 분과 차량 안 다른 승객들을 둘러봤다. 열심히 웅변하는 이에게 아무도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문득 나는 조금 서글픈 느낌이 들었는데, 저 모습에 나와 내 친구들의 모습이 포개어질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요즘은 다들 에어팟 귀에 꽂고 있어서 이런 종류의 액션을 안 하는 거 같은데, 나는 대학생 때 지하철에서 소리통이라 부르는 스피치를 종종 했다. 커다란 사회 이슈에 대한 대규모 시위를 하다가 지하철을 타고 다음 시위 장소로 이동할 때면 지하철에서 그냥 쉬는 게 아니라 탑승객들에게 우리의 주장을 알리는 거였다. 한 명이 선창을 하면 나머지 사람들이 따라서 목이 터져라 외쳤다. "소리통"이라는 단어로 시작을 알렸다.


"소리통"

"소리통"

"안녕, 하십니까"

"안녕, 하십니까"

"저희는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실천하는 대학생들입니다"

"저희는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실천하는 대학생들입니다"

"한국 정부는 미국의 부당한 침략 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하려 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미국의 부당한 침략 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이었다. 목이 약한 지하철, 특히 땅 속 깊이 다녀 소음이 유난히 심한 5호선에서는 소리통을 하면 한 정거장만에 목이 다 쉬어버렸다. 쉬어터진 목으로 핏줄 세워가며 말하는 모습이 불쌍했는지 모금통에 후원금을 내주거나 스피치가 끝나면 박수를 쳐주는 시민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우리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무관심에 마음을 다치는 친구들도 있었다.


문득 당시에 우리에게 무관심했던 사람들의 눈에 비친 우리 모습이 지하철에서 차례상에 절하면 마귀한테 절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외치는 이의 모습과 비슷하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는 저들과 다르다고 한사코 부정하고 싶지만 누군가 따져 묻는다면 대답이 궁색해진다. 우리는 사회 정의를 위해서, 폭력과 차별에 맞서기 위해서 구호를 외친 것이고 저들은 자신들의 교세 확장을 위해서 외치니 다르다고? 우리는 유물론에 입각한 과학적 사회주의자들이고 저들은 그냥 자신이 믿는 거를 믿을 뿐이라고?


대학생 시절 나는 그렇게 생각했던 거 같다. 하지만 운동권도 아니고 종교인도 아닌 사람이 보기에는 비슷한 면도 많을 것이다. 종교나 사회운동 모두 추상적인 가치체계를 전제한다. 신, 사후세계, 종교적 믿음은 자유, 평등, 권리 같은 단어들처럼 추상적인 단어들이다. 돌멩이, 나무, 물처럼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 인류가 공동으로 만들어낸 추상적 사고로 개념화한 것들. 결국 장애인과 성소수자와 병역거부자들이 비장애인과 이성애자와 예비역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은 신과 사후 세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신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세계 속에서 판단하고 다른 이의 세계와 만나면 그 판단에 크고 작은 균열이 난다. 차례상에 절하는 것이 마귀에게 절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귀를 닫는 것은 아마도 그의 세계는 나의 세계와 만나서 아무런 균열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이 닫혀 있는 상대와는 아무도 대화하고 싶지 않다.


자유와 평등, 반차별과 평화를 외치는 우리의 목소리가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목소리와 다른 지점은 바로 이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들도 활동가들만큼이나 진지하고, 자신의 주장에 확실한 믿음이 있다면 진지함, 믿음 같은 것은 더 이상 활동가들의 무기가 아니고 오히려 사람들이 귀를 막게 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나의 주장이 타인의 세계를 만나 균열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


'내 주장이나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고 때로는 틀릴 수 있다.

내가 믿고 있는 세계가, 가치가 잘못된 것일 수 있다.

내 주장과 정반대인 타인의 주장이 서로 옳은 이야기일 수도 있다.'


물론 균열은 늘 두려운 것이기도 하다. 균열 이후의 나는 균열 이전의 나와 똑같을 수 없다. 어떤 방향으로든 나는 변할 것이기 때문에. 이때 이 변화가 내가 속한 세계의 원칙을 훼손하는 변화가 될까 봐, 내가 20년간 생각한 세계가 무너질까 봐 나는 늘 두렵다. 나의 세계와 생각이 달라지는 만큼 타인의 세계와 주장도 달라질 것이지만, 나는 우선적으로 나의 세계가 달라지는 것이 두렵다.


하지만 균열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하철에서 차례상 마귀론을 이야기하는 사람처럼 뭇사람들에게 외면받고, 도태당하고,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지내고 싶지 않다. 그 세계가 아무리 완결적이라도 나는 싫다. 나는 활동가로 사는 것에 자기만족이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지만, 그 만족감은 내 세계가 넓어지는 데서 오는 만족감이지 내 세계의 완결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을 설득하고 사회변화를 꾸준히 추구해 나가기 위해서라면, 타인의 세계에 균열을 내고 보편성의 세계를 흔들기 위해서는, 결국 내 세계도 흔들려야야 한다. 다만 이때 내게 일어나는 균열이 사회운동의 원칙을 훼손하는 변화가 아니라, 내 세계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변화이기를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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