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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Mar 28. 2023

오타니, 위긴스, 그리고 활동가

오타니 쇼헤이 


스포츠 경기를 볼 때 국가대항전보다는 리그 경기를 좋아하는 편인데, 특히 야구는 그 속성상 단기전인 국가대항전이 재미있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한 시즌을 치른 뒤에 상위권 팀끼리 맞붙는 포스트시즌이라면 모를까, 단기전이나 토너먼트 같은 방식은 제대로 된 야구의 맛을 살리기 어렵다. 온갖 기록이 켜켜이 쌓이고 쌓여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야구다. 


게다가 야구는 다른 구기 종목에 비해 꼴찌팀이 1위 팀을 이길 가능성이 가장 높은 스포츠고, 최고의 선수도 사이클에 따라 단기전에서는 폭삭 망할 수도 있는 스포츠기도 하다. 예를 들어보자.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자로 손꼽히는 1994년의 이종범은 최종 타율 0.393에 196안타를 기록했다. 당시 이종범은 시즌 중반까지도 4할 타율을 유지했는데 육회를 먹고 식중독에 걸려 3게임에서 13타수 1안타를 치며 타율을 깎아먹었다. 다시 말하면 4할에 근접한 역대급 시즌의 이종범도, 딱 3 경기만 잘라놓고 보면 타율이 1할도 안 되는 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WBC도 챙겨보지 않았는데, 그래도 오타니 쇼헤이의 퍼포먼스는 정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챙겨봤다. 야구팬이라면, 스포츠팬이라면 응당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정도로 압도적으로 감탄을 자아내는 선수는 구기종목에서는 NBA의 마이클 조던과 한국 프로야구에서 선동열 밖에 안 떠오른다. 경기 영상도 영상이지만 오타니와 관련된 기사들이 눈에 보이는 대로 찾아 읽었다. 그러던 중에 오늘 최민규 기자님이 얼룩소에 쓴 무척 흥미로운 기사 오타니 쇼헤이는 한국 야구의 안티테제다를 봤다. 이 기사에서 흥미로웠던 건,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오타니에 대한 이야기보다 지금의 오타니를 있게 해 준 오타니의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성공한 막내에게 기대기보다는 각자의 힘으로, 각자의 노동으로 삶을 꾸려가는 가족들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고등학생 오타니를 지도했던 사사키 히로시 하나마키히가시고 감독의 이야기가 마음에 깊이 남았다. 


일본 고교야구도 한국 고교야구처럼 선수 모집에 어려움을 겪는데, 일단 전국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 야구 명문으로 이름을 날리려는 한국 고교야구 감독들과 달리 사사키 히로시 감독은 야구 선수 이전에 좋은 사람이 되게 하는 방식으로 학부모를 설득한다고 했다. “근육의 힘은 나이가 들면 떨어지지만 지식과 지혜는 평생 쓸 수 있다. 야구부원들에게 학업을 충실히 했는지 엄격하게 묻는다. 사람으로서 올바른 사고방식을 갖출 수 있도록 지도하려 한다.”는 말은 한국 학원 스포츠, 아니 프로스포츠에서도 볼 수 없는 철학이었다. “야구로 평생 먹고살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야구를 잘하는 것만으로 고교 생활을 보내는 건 헛수고이며, 아까운 낭비”라는 통찰이 무척 인상 깊었다. 



앤드류 위긴스 


2022년 나의 프로스포츠는 봄에 끝났다. 내가 좋아하는 기아 타이거즈가 별 볼 일 없었기 때문에. 사실 성적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최종 5위. 가진 전력만큼의 성적이었다. 하지만 재미가 없었다. 최형우와 양현종은 확실히 전성기를 지났고, 이의리는 미래가 기대되었지만 아직은 불안정했으며, 황대인은 봄에만 반짝하다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성범과 김선빈은 딱 기대했던 만큼 활약했지만, 기대가 컸던 김도영은 역시나 프로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그나마 후반기에는 조금 적응한 모습을 보였지만 부상이 김도영을 가로막았다. 특별히 마음 둘 선수 없이 그렇게 내 프로야구 시청은 봄과 함께 저물어갔다. 


그래도 그나마 봄을 즐길 수 있었던 건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덕분이었다. 아킬레스건과 무릎인대 파열이라는 큰 부상을 딛고 2년 만에 돌아온 클레이 탐슨, 노쇠했다는 평가와 큰 경기에 약하다는 평가를 동시에 날려버린 스테픈 커리, 드디어 농구에 눈을 뜬 앤드류 위긴스, 커리와 똑같은 키로 센터처럼 덩크하고 아버지처럼 스틸하는 게리 페이튼 2세, 폭발적인 득점력으로 골든스테이트의 미래로 떠오른 조던 풀, 우당탕탕 하지만 미래가 기대되는 운동 능력의 소유자 조나단 쿠밍가, 여전한 드레이먼드 그린과 성장한 케본 루니, 그리고 돌아온 안드레 이궈달라까지. 골든스테이트는 '이것이 바로 팀워크이다'를 보여주는 짜임새 있는 수비로, 명불허전 화려한 패스 게임과 슈팅으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2년 연속 MVP에 빛나는 니콜라 요키치의 덴버, 떠오르는 샛별 자 모란트와 멤피스 그리즐리, NBA의 현재이자 미래인 루카 돈치치의 댈러스, 미국의 자존심 제이슨 테이텀과 보스턴 모두에게 챔피언이 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지를 가르쳐주었다. 



그런데 올시즌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봄농구 전망을 밝지 않다. 당장 플레이인 토너먼트를 걱정해야 하는 순위도, 역대급으로 망해버린 원정 경기 성적도 문제지만 가장 큰 문제는 지난해 플레이오프에서 발군의 실력 향상을 보여준 앤드류 위긴스가 이탈했다는 것이다. 서부 파이널에서 루카 돈치치를 전담 마크했고, 파이널에서 팀 내 리바운드 1위를 했던 앤드류 위긴스의 공백은 너무나 커 보인다. 슈터들의 컨디션이 저조하거나 패싱 게임이 잘 풀리지 않을 때, 확률 높은 미드레인지 게임을 펼쳐줬던 공격에서의 공백도 크지만 상대 에이스 득점원을 전담마크 했던 수비 공백이 더 커 보인다. 


헌데 앤드류 위긴스의 이탈은 부상 때문이 아니다. 개인적인 문제라고만 알려져 있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굉장히 인상 깊었던 건 스테픈 커리나 스티브 커 감독이 앤드류 위긴스의 이탈을 대하는 태도였다. 커리나 커 감독의 성정상, 팀 동료에게 역정을 내는 인터뷰를 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 그뿐이 아니었다. 그들은 한결 같이 앤드류 위긴스가 돌아오기를 바라면서도 그의 이탈에 대해 인생에서 "농구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거나 아이가 태어나도 게임을 빠지지 않는 것이 미덕처럼 회자되는 한국 프로스포츠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주축 선수가 한 달 넘게 개인 사정으로 결장하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이겠지만, 인생에서 농구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니. 기아 타이거즈 주전 선수가 개인 사정으로 한 달 넘게 결장하고 있다면 과연 김종국 감독은 "인생에 야구보다 중요한 게 있다"며 해당 선수를 옹호할 수 있을까? 팬들은 그걸 용납할 수 있을까?



인생에는 사회운동보다 중요한 게 있다


"야구를 잘하는 것만으로 고교 생활을 보내는 건 헛수고이며, 아까운 낭비"라는 말, "농구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말. (사사키 히로시는 고교야구 감독이긴 하지만) 타고난 재능들이 모여서 전쟁 같은 경쟁을 하는 스포츠 분야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것이 무척 신선하다. 그것도 최고의 지도자로 인정받는 이들이 말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저 말은 꼭 스포츠 선수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다. 너무나 바쁘게, 너무나 열심히 살아야 겨우 중간이라도 유지할까 말까 하는 모든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말이다. 그리고 활동가들에게도. 일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밥벌이 수단으로도 중요하지만 일을 통해 사회적 관계를 맺고, 일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을 받는다는 면에서도 그렇다. 특히나 활동가들은 직업적 특성상 이 두 가지에 더해 활동을 통해서 의미까지 찾고 싶어 한다. 내가 하는 일이 세상을 좀 더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는 데 기여한다는 그런 의미를 추구하는 건 활동가들에겐 무척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때로는 크 커다란 의미가,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개인의 인생을 압도하기도 한다. 의미에 압도당한 활동가의 삶이란, 행복할 수가 없다. 


모두가 야구 선수로 성공할 수 없는 것처럼 모두가 훌륭한 활동가, 뛰어난 활동가가 될 수는 없다. 어느 영역이든 뛰어난 이들-오타니 같은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생태계가 건강하게 유지되려면 오타니만 있어서는 안 된다. 오타니에게 삼진을 당하는 타자도, 홈런을 맞는 투수도 있어야 오타니가 존재할 수 있다. 사회운동은 야구보다는 좀 더 협력적인 관계 맺음이 가능하다. 게다가 천재의 영향력이 스포츠만큼 크지 않다. 사회운동이 사회변화를 이끌어가는 저변에는 물론 뛰어난 활동가들의 남다른 감각과 활동력도 영향을 끼치겠지만, 그보다는 뛰어나지 않은 수많은 활동가들의 책임감이 사회운동의 가장 큰 힘이 된다.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좋은 활동가가 되고 싶고, 뛰어난 활동가가 되고 싶다. 기왕이면 일 잘한다는 평가를 듣는 게 기분이 좋지 않은가. 혹은 내가 중요한 역할을 해내서 좋은 성과(사회변화)를 만들었을 때 성취감이 더 크기도 하니까. 그렇기 떄문에 좋은 활동가, 뛰어난 활동가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내 인생이 사회운동만으로 채워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우리 인생에는 사회운동보다 더 중요한 일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내가 활동을 게을리하거나, 좋은 활동가가 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내 인생을 사회운동에 가두지 않고, 내 인생의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이 좋은 활동가가 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꼭 활동가가 아니더라도, 내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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