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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Apr 20. 2023

퀸메이커

앙꼬 빠진 사회 정의 구현 드라마 


대기업 전략기획실에서 일하며 한 번도 실패해 본 적 없는 이미지 메이킹의 귀재인 황도희(김희애)가 인권변호사 오경숙(문소리)을 서울시장으로 만드는 드라마라고 하니 기대가 컸다. 연기 잘하기로는 어디 내놔도 꿀리지 않을 두 배우가 처음으로 합을 맞추는 드라마인 데다, 그동안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정치 드라마(여성 국회의원 비율이 19.1%, 윤석열 정부 출범 당시 여성 장관 비율 17%, 여성 광역단체장 비율 0%이니 드라마가 아닌 현실 정치도 다를 바 없다.)에서 제대로 된 우먼 파워를 보여주리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무척 기대를 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기대했던 바에 크게 못 미치며 실망을 안겨주고 있는 듯하다. 그동안 남자들만 가득한 정치드라마 장르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여성 배우들의 연기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는 평도 있지만, 대체로 이야기의 짜임새나 연출, 극의 완성도에서는 혹평을 하는 이들이 많다. 진부한 클리셰만 가득한 드라마의 주요 배역도 이제 여자 배우들이 나온다는 것이 이 드라마의 의미라는 비아냥 섞인 반응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어떤 창작물이든 장점과 단점이 있기 마련이고 때로는 단점이 무수한 작품이라도 확실한 장점 하나만으로도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퀸메이커>는 지금으로선 신중하게 판단하더라도 총체적으로 실패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왜 실패했을까? 너무 뻔한 캐릭터의 문제일 수도 있고, 진부한 연출의 문제일 수도, 게으른 시나리오 문제일 수도, 이 모든 것이 복합적이었을 수도 있다. 혹은 시청자들이 잘 알 수 없는 제작상의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분석은 드라마 비평가들이나 문화평론가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나는 좀 다른 측면에서 이 드라마의 실패 이유를 생각해보고 싶다. 



<퀸메이커>가 정치드라마로 실패한 지점


나는 이 드라마가 '여성 드라마'로 실패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주요 배역을 남자 배우로 바꾼다 한들 재미없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보다는 '정치드라마'로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현실정치에 몸담고 있는 분들의 반응을 보면 사소한 것에서부터 현실고증도 제대로 안 되었고, 픽션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단순화와 과장이 지나치다는 의견이 많다. 나는 여기에 더해 정의로운 주인공이 세상을 바꾸는 (넓은 의미의) 정치 드라마들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사회운동(혹은 노동조합)의 부재'가 이 드라마의 실패의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많은 이들이 이 드라마를 보면서 엄정화, 황정민 두 배우가 출연한 영화 <댄싱퀸>을 떠올린다. 변호사 출신 비정치인 후보가 서울시장이 되는 스토리인 데다 <댄싱퀸>의 정민(황정민) 또한 오경숙처럼 치밀한 계산을 하기보다는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고 돌직구 같은 화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후보자 토론회에서 정치판에서 닳고 닳은 정치인들에 맞서 조금 서툴지만 거침없는 행동과 진심이 담긴 돌직구 화법으로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댄싱퀸>의 정민과 <퀸메이커>의 오경숙은 무척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둘은 성격만 비슷할 뿐이다. 정민은 의도하지 않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의로운 변호사의 상징이 되었지만, 오경은 비정규직 해고노동자들 위해 무료 변론을 먼저 제안하고 고공농성을 하는 사회운동가다. 


함께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나는 <퀸메이커>가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입사동기인 세 명의 말단 직원(고아성, 이솜, 박혜수)이 우연히 회사의 불법행위를 알게 되어 이를 사회적으로 고발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내용이다. 주인공이 인권변호사와 고졸 말단 여직원이라는 계급 차이가 있지만 두 작품 모두 정의롭지 못한 권력에 맞서 여성들이 힘을 모아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재밌게 보면서도 이야기 전개가 엉성하고 무리하다고 느낀 지점이 몇 있었는데, 그런 장면들은 어김없이 작품 속에서 노동조합의 부재를 느낄 때였다. 거대한 기업 권력에 맞서 말단 직원 세 명과,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감화된 소수의 개인 몇 명이 힘을 모아 거대악을 고발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이야기는 신나고 즐겁지만,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판타지다. 물론 픽션이 다큐와 같은 밀도로 현실을 재현할 필요는 없겠지만 개개인 몇 명의 아름다운 연대로 거대기업을 굴복시키는 해피엔딩을 무리하게 만드는 과정에서 이야기가 논리적인 비약 혹은 엉성한 전개가 일어났던 것이다. 



<퀸메이커>에서도 오경숙 주변의 노동조합 혹은 사회단체들은 보이지 않는다. 마천루 옥상에서 고공농성을 하는 그녀의 주변에는 민변 변호사 동료들도, 고공농성을 함께 기획하고 실행해 가는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없다. 해고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숨'이라는 여성단체가 나오지만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고공농성 투쟁을 이끌어가는 사회운동의 주체로 그려지기보다는 오경숙의 고난 극복 서사의 도구 정도로만 그려진다. 이 드라마가 노동인권 변호사들이 싸우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재현은 필연적으로 선택과 배제의 과정이고, 개인의 서사를 위해 현실세계에서는 중요하지만 이야기 흐름에서 중요하지 않은 요소들을 과감히 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특성화고등학교 현장실습생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음 소희>와 같은 영화에서는 사회부조리와 맞선 집단이 나오지 않는다. 경찰인 유진(배두나) 혼자서 뭔가를 해보려고 아등바등하지만 영화 속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특성화고등학교 현장실습생의 노동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노동인권단체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다음 소희>는 이 문제를 고발하며 우리 사회가 이 문제에 있어서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과감하게 유진의 실패와 사회의 실패만을 이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이야기는 사회운동을 생략해도 이야기의 설득력이 반감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정의가 승리하는 서사에서는 사회운동의 역할을 삭제하면 이야기가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현실에서 개인과 거대 권력의 힘의 차이는 너무가 간극이 크다. 아무리 특별한 사람이라도, 뛰어난 사람이라면 몇몇 사람의 개인적인 능력으로는 그 간극을 뛰어넘을 수 없다. 과거 새정치를 말하며 안철수가 인용했던 로자 파크스도 버스에서 백인 자리에 앉아버린, 흑인 민권 운동의 도화선이 된 그 액션은 우발적이었지만, 그전에 오랫동안 동료들과 함께 어떻게 하면 인종차별을 없앨 수 있을지 방법을 고민한 활동가였다. 혼자 욱해서 한 행동이 아니었고 철저하게 조직적으로 준비했기 때문에 로자파크스의 불복종이 도화선이 되어 역사적인 흑인 민권 운동이 활활 타올랐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하기로 한 결정은 김진숙 지도위원 개인의 결정이었겠지만 희망버스가 전국에서 김진숙을 만나러 부산 영도에 가고, 한진중공업 문제가 전국적인 이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걸출한 노동운동가 김진숙의 역량에 더해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고공농성을 지원하고, 연대투쟁을 조직한 민주노총의 활동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분노를 모으고, 힘을 모아서, 새로운 방향으로 에너지를 쏟는 사회운동을 빼버리고 세상이 바뀌는 이야기를 하려면 어떤 지점에서는 반드시 논리의 비약 혹은 이야기가 갑자기 몇 단계를 건너뛰어 진행되는 일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요즘 많은 한국 드라마와 영화에서 권력자가 범죄를 저지르는 결정적인 장면을 SNS를 통해 생중계하며 대중의 공분을 불러일으켜 정의를 구현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도,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 같은 사회운동의 역할을 이야기하지 않은 채 문제를 해결하려는 궁여지책이다. SNS에서 공분을 모으는 것은 사회변화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변화가 이루어지거나 정의가 바로서진 않는다. 


 이야기의 진행 과정에서 필수적인 요소를 빼고선 좋은 이야기를 만들 수 없다. 사회정의를 권력관계에서 이야기하려면 결국 거대 권력에 맞서는 사회운동을 언급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퀸메이커>는 정치드라마이기보다는 황도희의 복수극이고, 오경숙의 사회정의 구현도 결국 은씨 일가에 대한 복수극을 위한 수단으로 기능한다. 복수극이라서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복수극인데 정치드라마의 외피를 쓰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괴리가 생긴다는 것이다. 복수가 일어나는 무대가 정치계라 하더라도 차라리 본격 복수극을 표방했다면 더 좋은 작품이 되었을 거라고 예상해 본다.


<퀸메이커>도 그렇고 한국의 대중문화 콘텐츠들은 왜 권력에 맞서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작품에서 사회운동을 보여주지 않을까? <송곳>이나 <카트>처럼 아예 노동조합이나 사회운동이 핵심 테마인 몇 작품을 제외하면 사회 정의 구현은 늘 개인들의 싸움으로만 그려질까? 정치적인 변화를 이끌어가는 조직된 사회운동을 왜 찾아보기 힘들까?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드라마에서 왜 사회운동을 보기 어려울까?


드라마는 현재를 반영하는 거울인 만큼, 현실 세계의 사회운동이 사람들에게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일까? 사회운동이라고 늘 좋은 일만 하는 것도 아니고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에서 때로는 파렴치한 불법을 저지르는 경우도 있고, 좋은 뜻으로 하는 활동이 결과적으로는 사회 진보에 해가 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이런 경우 사회운동을 드러내는 것은 시청률을 갉아먹는 요소가 될 테니 창작자들이 외면할 것이다. 


혹은 창작자들이 정치나 사회운동이 사회 변화를 추동하는 메커니즘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대중을 수동적인 존재로 바라보기 때문일 수도 있다. <퀸메이커>에서도 대중은 능동적인 정치적 주체가 아니다. 해고 투쟁을 하는 노동자들이 머리띠를 묶고, 조끼를 입고, 투쟁가를 부르지만,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정치적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 노동자들은 고공 농성하는 오경숙을 바라보거나, 복잡한 사정 때문에 배신하거나, 끝내 오경숙을 지키는 용도로만 등장할 뿐이다. 


한국의 정치 드라마, 특히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작품들에서 사회운동이 잘 보이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엄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을 함께 던져봐야 할 주제라고 생각한다. 사회 변화나 정의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드라마의 완성도와 재미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퀸메이커>는 김희애와 문소리, 김선영, 김새벽 같은 좋은 배우들을 캐스팅하고, 실패를 모르는 대기업 기획전략실장이 당차고 솔직한 노동인권변호사를 서울시장으로 만든다는 매력적인 콘셉트를 가진 드라마인 만큼, 훨씬 더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오경숙이 쌓아온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보여주었다면, 원칙주의자 오경숙과 이기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황도희의 관계도 훨씬 입체적으로 묘사되지 않았을까? 오경숙과 서민정, 오경숙과 박재민의 갈등도 충돌하는 두 세계 속에서 훨씬 복잡하고 설득력 있게 그려낼 수 있지 않았을까?



*이 글은 얼룩소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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