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용석 Mar 31. 2023

동물권력

짧은 리뷰

올해 전쟁없는세상 블로그에서는 '동물+전쟁'을 주제로 4명의 필자가 돌아가면서 한 달에 한 편씩 글을 쓴다. 나는 일종의 전쟁없는세상 블로그 편집자인데, 저자들이 글쓰기를 어려워할 때 적절한 조언을 하거나 저자들이 보내온 글을 보면서 더 추가할 내용이나 수정 혹은 보완할 내용은 없는지 판단해야 한다. 그런데 조언을 하기에도 판단을 하기에도 나는 이 주제에 대해 아는 것이 정말이지 하나도 없다. 


나는 그동안 왜 동물권 관련 책들을 읽지 않았을까? 다른 책 읽느라 바빴을까? 그런 면도 있지만 이것저것 분야 가리지 않고 책을 읽는 편인데, 동물권 책이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던 것은 우연은 아닐 거다. 동물권 활동가들의 직접행동에 지지를 보내면서도 동물권 활동가들의 어떤 주장에서는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것들도 있기 때문이었을까? 꼭 동물권 운동이 아니라도, 다른 모든 운동과 심지어 평화운동 안에서도 모두가 나와 생각이 같지는 않으니 이 또한 이유가 아니다. 인식과 판단이야 다를 수 있는데 때로는 그것이 도덕적인 차원으로 이야기되는 것에 선뜻 마음이 가지 않았던 걸까? 선악구도로 접근하는 것은 사회운동에서는 경계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성향은 내가 하는 평화운동에서도 종종 발견할 수 있으니 이것도 주된 이유는 아니다. 아니면 정말 내가 보수화 되어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기 버거워하는 것일까?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내 큰외삼촌은 이제는 힘들어서 접었지만 꽤 오랜 세월 염소 농장을 하셨다. 한때 백 마리 가까이 키우기도 했다. 주문이 들어오면 다양한 방식으로 염소를 식품으로 가공해 팔았다. 동물권의 입장에서 보면 큰외삼촌은 동물에 대한 폭력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나이 먹고도 자신의 성실하고 솔직한 노동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어떤 면에서는 도시에 사는 우리의 생활 방식이 시골에서 염소 키워 잡아 파는 외삼촌보다 더 많은 동물을 조용하게 학살하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이런 문제가 나에겐 거리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게으른 핑계다. 예컨대 내 전공(?)인 평화운동 분야에서도 이런 딜레마는 얼마든지 있고, 나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런 딜레마들에 대해 어느 정도 진척된 생각을 갖고 있다. 그만큼 공부하고, 생각하고, 사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물권의 딜레마 앞에서 머뭇거리는 거라는 걸 나도 알고 있다. 이제라도 노력해서 공부하고, 사유하는 수밖에. 그래서 책을 좀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책은 흥미롭지만 읽는 과정이 힘들다. 나에게는 주로 레베카 솔닛의 책이 그렇다. 읽고 나면 성취감과 만족감이 크지만, 꾹 참고 완독 하기가 너무나 힘들다. 동물권력은 흥미로운 만큼 읽는 것도 즐거웠다. 글도 재밌고, 시대를 넘나들며 다양한 역사적 사례가 펼쳐지는 이야기도 재밌고, 무엇보다 동물을 피해자로만 묘사하지 않아서 좋았다. 


마침 피해자와 가해자로 도식화하는 것이 구조의 문제를 가리고 책임을 개인에게만 묻게 한다는 문제의식을 담은 박이대승 선생님의 칼럼 '가해자-피해자 도식을 넘어'를 보았던 터였다. 나 또한 병역거부운동을 해오면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병역거부자를 피해자로만 인식한다면 이 문제는 국가폭력(가해자)에 의해 양심의 자유를 침해당한 자유권의 문제에 머문다. (물론 이것은 이것대로 이 자체로 매우 중요하다.) 반면 우리가 병역거부자를 피해자로 정체화하지 않고 저항자로 인식할 때 비로소 전쟁이라는 구조적인 폭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야기할 수 있고, 그것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는지를 말할 수 있게 된다. 병역거부자가 저항자가 된다고 해서 병역거부자 개개인이 입은 피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전쟁에 동참하지 않고 징집을 거부하는 것의 정치적 의미를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가는 것뿐이다. 


이 책은 동물의 역사를,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동물과 인간이 맺어온 역사를 다룬다. 역시나 동물에 속하는 인간이 다른 비인간 동물과 서로 협력하고, 갈등하고, 경쟁하고, 지배하고, 파괴하는 관계들을 폭넓게 살펴본다. 협력과 갈등과 경쟁은 인간과 비인간 동물 사이에서 복잡하게 뒤엉켜 작동한다. 어부들과 협업해서 고래 사냥을 하는 범고래가 때로는 사냥으로 잡은 고래 고기를 두고 갈등하고 경쟁한다면, 로마 콜로세움에서 권력의 과시용 죽음의 쇼에 동원되어 죽을 때까지 싸워야만 했던 동물들은 인간의 지배욕에 파괴당한다. 


물론 인간이 인간을 학살할 역사만큼이나 인간이 비인간 동물을 학살한 역사 또한 오래되었지만 대부분의 전통사회에서는 인간과 동물은 고된 노동의 동반자로서 서로 의지하며 살아갔다고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인간(노동자)을 도구로 만든 것처럼 동물 또한 도구로 만들었다.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서로가 느끼는 감정에 공명하던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자본주의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가능하게 한 도축장을 거치며 달라졌다 한다. 살기 위해 동물을 죽이면서도, 그 눈을 보며 미안한 마음과 죄책감을 느꼈던 인간들은 이제는 도축장에서 "생산"된 상품으로 고기를 접하면서 그것이 인간처럼 감정을 표현하는 눈을 가진 존재였다는 것을 쉽게 망각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관계의 전환은 마치 대량살상무기의 등장으로 서로의 눈이 보이지 않는 거리에서 감정의 섞임 없이 적군을 죽일 수 있게 된 현대의 군인들 이야기 같았다. 


나는 특히 '동물들의 저항'에 대한 내용을 재밌게 읽었다. 앞서 동물을 피해자로만 묘사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저자는 지배와 파괴에 저항하는 동물의 힘(권력)을 중요하게 다룬다. 제목이기도 한 '동물 권력'은 동물들의 물리적인 힘을 뜻하는 게 아니다. 마치 노동자들이 일하지 않음으로써 권력이 생기듯 동물들도 인간의 명령이나 지배에 복종하지 않음으로써 권력이 생기고 이 권력을 바탕으로 인간과 협상을 하기도 하고, 요구조건을 관철시켜 나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동물원의 동물들은 과학자들의 실험에 무조건적으로 협조하지 않는다. 범고래쇼의 고래들이 툭하면 태업을 하고, 사육사를 해치기도 한다. 여러 명의 죽음과 연루되어 있고 자신을 돌보던 사육사를 죽인 '살인고래' 틸리쿰의 이야기를 보면서는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플루토가 생각났다. 로봇은 인간을 해칠 수 없게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시대에, 인공지능이 고도로 발달한 한 로봇이 인간을 살해한다. 인간은 자신들의 예측을 벗어난 행동을 하는 그 로봇은 겹겹의 감옥에 가두어 둔다. 인간에 부속된 존재로 인간을 해칠 수 없다고 믿었던 존재들의 반란과 저항이 겹쳐 보였다. 


인간이 전쟁에서 동물을 활용해 온 역사 또한 무척 흥미로웠다. 고대의 장갑차이자 적군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해 운용했던 코끼리 부대, 칭기즈칸과 함께 세계를 정복한 기마부대의 말들, 빠르게 집을 찾아가는 비둘기의 습성을 이용한 1차세계대전 당시 통신병 비둘기들, 아메리카 선주민들을 말살하기 위해 유럽인들이 말살한 버펄로들, 자살폭탄 테러에 이용되는 동물들과 폭탄물을 탐지하다 죽은 인간 파트너를 그리워하다 스트레스로 세상을 떠난 탐지견까지. 인간이 비인간동물을 전쟁에서 활용하는 방식은 꽤나 다채로웠다. 특히 '군-동물산업 복합체'라는 개념은 처음 보는 개념이었다. 마치 "군산복합체가 전쟁이 끊이지 않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엔진이"이라면 "전쟁이 동물의 노동과 사체를 딛고 선 것임이 분명하다"(226쪽~227쪽)는 점에서 이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아직은 군산복합체처럼 정교한 개념은 아니지만, 저자는 이 개념이 앞으로 발전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밖에도 인간은 자신처럼 커다란 눈망울과 얼굴 근육으로 감정을 표현할 줄 아는 동물들에 그렇지 않은 동물들보다 더욱 공감한다는 이야기나 우리가 흔히 포디즘으로 알고 있는 자본주의 대량생산 시스템이 포드자동차회사보다 먼저 시카고의 대량 도축단지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처럼 흥미로운 이야기도 많았고, 논쟁적인 논점들도 많다. 동물에 대한 학살과 수탈을 자행해 온 1세계 국가들이 이제는 야생동물을 보호한다며 아프리카의 토착민들을 내쫓는 일이라든지, '동물해방론'과 '동물권리론'의 차이점, 정치적인 기획이 없이 거대한 외침과 개인적인 윤리 지침으로 양극화된 동물 운동의 문제점을 살펴보며 인간과 동물이 모두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정치공동체 주폴리스zoopolis 개념과 같은 자칫 민감할 수 있는 논점들을 피해 가지 않으면서도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않고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을 찾을 수 있도록 생각의 여백을 둔다. 


책 한 권 읽고 세상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고 위험한 일은 없다. 나는 동물권 관련해서 이제 겨우 책 한 권을 읽었을 뿐이다. 아직 내가 품고 있는 수많은 질문들, 의문들, 의구심들은 그대로다. 다만 이 책을 통해서 우리 인간과 더불어 지구의 역사 속에서 당당한 주인으로 행세해 온 비인간 동물들의 존재와 그들의 역사를 조금이나마 인지할 수 있었다. 인간이 만든 시스템과 폭력 속에서 비인간 동물은 착취당하고 학살당하는 피해자가 맞다. 하지만 마치 병역거부자를 피해자로만 보는 게 아니라 저항자로 인식할 때 병역거부운동이 평화운동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처럼 "인간을 지배자에서 구원자"로 "동물을 피지배자에서 희생자"로 자리바꿈 하는 것을 넘어서 인간과의 관계에서 저항하고 협상하고 협력하는 역사적 주체로서 동물의 힘을 볼 때 우리는 이 폭력의 구조를 넘어서고 인간과 비인간 동물이 다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잘 드러낸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표지 이미지는 남성화된 물리적 강함을 뜻하는 힘으로써의 권력을 말하는 것처럼 보여서 안타깝다. 




 





매거진의 이전글 전쟁을 마주하는 우리의 책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