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몬순> 리뷰
윤석열 대통령이 로이터 통신과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할 수도 있다는 식의 발언을 한 뒤 후폭풍이 거세다. 러시아는 무기 지원은 분쟁에 개입하는 것이라며 만약 러시아가 북한에 무기를 지원하면 한국은 어떻게 반응하겠냐고 반문하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국내에서도 대체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굳이 러시아와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 이유가 없는데 외교적으로 불필요한 발언이었다는 것, 지난번 도청 사건과 엮어 미국과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건강한 한미 관계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무기 지원은 결코 평화를 가져올 수 없고 전쟁을 지속시킨다는 것들이 비판 주요 비판지점이다.
현 국면만 보자면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지원을 반대하는 이들이 무척 많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문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특히 시민사회에서 생각보다 의견이 엇갈리는 복잡한 쟁점이었다. 한국 정부가 인도적 지원을 늘리고, 러시아 병역거부자 난민을 한국 정부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에는 대체로 동의했지만 침략당한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저항권-군사적인 저항을 어떻게 바라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거나 판단을 쉽사리 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무기 지원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이들은 드물었지만 무기 지원, 비행금지구역 설정, 휴전 불가 같은 우크라이나의 주장에 대해 한국의 시민사회가 어떤 입장, 혹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것인가를 두고 차이가 드러났다.
나와 전쟁없는세상은 "평화는 군사적 방법으로 이룰 수 없다"는 입장이 확고했다. 군사적인 저항은 평화주의자들의 방법이 아니고, 군사적인 저항은 성공 가능성도 높지 않을뿐더러 성공하더라도 적을 물리칠 뿐이지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민주주의가 파괴된다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입장이 선명한 것과 별개로 우크라이나에 무기 지원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매우 곤혹스러웠다. 안전한 곳에서 목숨 걸고 저항하는 이들에게 관전평을 하듯 훈수질을 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러시아 편을 든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의 주장에 "러시아에서 돈 받았냐"는 댓글이 달린 적도 있다. 그렇다고 무기 지원을 요구하는 우크라이나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평화운동이 할 수 있는 주장이 아니며 어떤 면에서는 우리는 안전한 곳에서 생색만 내고 결국 우크라이나 사람들만 죽음의 전장으로 내모는 것처럼 느껴졌다.
전쟁을, 살인과 파괴를 지금 당장 멈출 수 있는 별다른 뾰족한 수 같은 게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재 진행 중인 전쟁 앞에서 그동안 내가 해온 말들이 힘이 없게 느껴졌다. 예를 들면 전쟁이 만든 세계를 깨기 위해서 우리는 전쟁을 입체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 이 말은 참으로 옳은 말이지만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파괴와 살인을 막는데 도대체 무슨 힘이 있겠나. 침략하는 국가, 침략당하는 국가만 전쟁의 당사자가 아니라 전쟁에 무기 팔아 돈 버는 기업의 본사가 위치한 부자 나라의 국민들도, 전쟁으로 인해 오른 물가로 살인적인 고충을 겪는 가난한 나라 국민들도 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전쟁에 연루되어 있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너무나 맞는 말이지만, 지금 일어나는 거대한 폭력에 물타기를 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무기력에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무기력함이야말로 전쟁이 지속되기 가장 좋은 토양이다. 전쟁은 이미 일어난 뒤에는 모든 것을 오답으로 만든다. 이미 폐허가 된 도시에서, 죽음과 더불어 살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는 승리도, 패배도, 전쟁을 멈추기 위한 어떠한 대안이나 방법도 다 오답일 뿐이다. 오답이라는 한계를 부여잡고서, 전쟁에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전쟁을 대하는 인류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연극 '몬순'은 전쟁을 둘러싼 이런 복잡한 고민들을 잘 응축해서 보여준다. 몬순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과 갈등은 결국 전쟁이지만(전쟁의 원인이거나, 전쟁의 결과이거나, 전쟁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동반하는 일들이거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전쟁을 떠올릴 때 생각하기 마련인 전투는 이 연극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전쟁은 전투보다 복잡하고, 전투보다 더 오랜 기간 지속된다. 전투는 분명 폭력과 파괴와 살인이 가장 격렬하게 이루어지는 사건이지만, 그 참혹한 이미지에만 시선을 집중한다면 우리는 전쟁의 폭력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파악할 수 없게 된다.
몬순의 공간적 배경은 전쟁터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A국, B국, C국을 배경으로 한다. A국에 본사를 둔 세계적인 군수산업체 '몬순'에서 일하는 차미는 7살짜리 아들 굴과 살아간다. 차미와 굴의 집에는 전쟁이 수십 년간 지속되어 온 국가 타트 출신인 네이지가 홈스테이를 하고 있다. B국가의 대학원생 새벽은 '전쟁'을 주제로 졸업작품을 만드는 중인데 전쟁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면서 타트 출신 교환학생 코쉬코우지, 전쟁 중인 D국가에서 전쟁을 취재하고 있는 친구 이삭과 이야기를 나눈다. C국가에서 아마추어 보디빌더이자 유치원 선생님으로 일하는 리오는 타트 출신 무용수 문과 연인 사이다. 퀴어퍼레이드에서 선보일 연극을 준비 중이다. D국가 출신인 홀키가 그들의 친구다.
이처럼 여러 공간에서, 여러 등장인물들 사이, 여러 갈등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야기의 전개를 이해하는 것만도 복잡한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복잡한 이야기는 복잡하게 이해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복잡한 문제를 복잡하게 이해하고 재편하는 것은 전쟁이 만든 세계에 대한 저항이 된다.
전쟁의 서사와 논리구조는 단순하고 쉽다. 폭력은 복잡한 것을 납작하고 단순하게 만든다. 나쁜 놈들이 우리에게 나쁜 짓을 하고 있고, 우리는 저 나쁜 놈들은 물리쳐야 한다는 것만이 지상명제다. 그렇지만 현실 세계에서 전쟁의 원인, 전쟁의 과정, 전쟁이 끼치는 영향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같은 전쟁이라고 해도 겪는 사람의 위치와 처지 상황에 따라 다른 맥락의 폭력으로 발생한다. 성소수자가, 전쟁국가 출신 교환학생이, 무기회사 직원이, 대학원생이 겪는 전쟁과 마주하는 폭력이 다르고, 전쟁 중인 국가에 살고 있는 이들과, 전쟁 중인 국가를 방문한 이들, 전쟁터와 멀리 떨어진 이들이 겪는 전쟁의 폭력은 다르다.
<몬순>은 전쟁을 둘러싼 다양한 층위의 경험을 복잡하게 얽혀놓음으로써 피해와 가해, 적군과 아군, 승리와 패배 같은 전쟁이 만든 이분법의 세계에 저항한다. 타트에 남아있는 네이지의 가족이 차미네 회사의 제품을 쓰는 군인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이 일로 네이지와 차미의 사이는 멀어진다. 차미는 노동으로 아이를 건사하는 노동자지만 그 노동은 결국 군수산업체를 살찌우는 일이다. 이 군수산업체는 차미가 태어난 나라 타트에서 사람들을 해치고 있다. 차미의 존재는 피해와 가해, 침략국가와 침략당한 국가로 나눌 수 없는 경계를 보여준다. 문은 C국에서 묻지마 폭행을 당한다. 리오는 문이 묻지마 폭행에 대응하는 방식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문과 리오는 성소수자 연인이지만 서로의 출신 국가가 다르고, 그 때문에 폭력을 인식하는 방식과 폭력에 대응하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폭력에는 이처럼 성소수자 정체성, 인종 및 출신 국가, 사회경제적 권력 등 여러 층위의 다양한 사회적 지문이 묻어 있다.
'몬순'은 작품 내 군수산업체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비를 동반한 계절풍의 이름이며, 새벽의 졸업 작품 이름이기도 하다. 새벽은 자신의 졸업 작품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저는 전 세계에서 발사되고 있는 미사일의 경로를 수집했습니다.(중략) 그렇게 수집된 미사일의 방향을 어떤 것으로 표현해야 할지 고민이 컸는데요. 처음 제가 생각했던 전쟁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빗방울처럼요. 하지만 전쟁과 관련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생각이 조금씩 바뀌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정말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일까? 그 아래에 있는 사람만이 전쟁을 실감하는 걸까? 그래서 이번에 재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어디에도 갈 수 있는 전쟁입니다."
이소연 작가가 연극 <몬순>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전쟁의 모습을 새벽의 설명을 통해 말하고 있다. 미사일로 표현된 전쟁에서는 떨어뜨린 사람(침략국)과 땅에서 미사일을 맞은 사람(피해국)만 존재하는 평면적인 이분법의 세계라면, 수직낙하하는 빗방울과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동반되는 계절풍 몬순으로 표현된 전쟁은 2차원 평면 아니라 다른 차원으로 훨씬 더 복잡한 구조를 가진 세계가 된다.
<몬순>을 보고 나면 답답한 마음만 한가득 생길 뿐이다. 전쟁의 피해라든가, 전쟁의 원인, 전쟁의 문제점 같은 것들을 속 시원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누가 전쟁을 일으켰고 나쁜 놈인지, 누가 피해자고 불쌍한 사람들인지, 전쟁을 막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지 무엇 하나 명쾌한 것이 없다.
마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과 전쟁을 막기 위한 뾰족한 수가 없는 평화활동가들의 마음속을 보는 것만 같다. 물론 어떤 이들은 아주 쉽고 명쾌하게 이야기를 한다. 푸틴을 전쟁광으로 몰아가며 우크라이나의 피해와 저항에 공명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거나, 나토와 미국이 연출했고 젤렌스키가 수행하는 전쟁이라며 서방을 비판하거나. 명쾌한 판단들 앞에서 나와 내 동료들은 남들이 듣기에 고구마 백만 개 먹은 것 같은 말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군사적 수단으로 평화를 지킬 순 없습니다." "양국은 지금 당장 휴전 하고 국제사회는 평화협정을 중재해야 합니다." "무기 지원은 전쟁을 더 오래, 더 격하게 만들 뿐입니다. 인도적 지원을 늘리고 전쟁 난민을 수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 답답함이 우리가 겪어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을 복잡하게 바라보고, 분석하고, 인식하는 것은 결국 위에서도 말했듯 오답이라는 한계를 부여잡고 전쟁에 저항하는 행위다. 이는 우리 모두가 전쟁과 어떤 방식으로든 연루되어 있고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이야기하며 전쟁범죄자들의 책임을 흐리게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행위다. 전쟁이 만든 단순하고 간편한 이분법의 세계에 균열을 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쟁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말은, 이와 같은 복잡한 세계에서만 저항의 언어가 될 수 있다. 연극 <몬순> 선사하는 고구마 백개 먹은 거 같은 답답함이야말로, 우리가 전쟁을 인식하고 바라보고 사유하고 재현할 때 필요한 감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