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용석 Jul 10. 2023

일할 자격

짧은 리뷰

어떤 책이 좋은 책일까? 새로운 지식이나 정보를 알려주는 책, 새로운 시선이나 관점을 접하게 해주는 책, 재미있거나 감동적인 책. 모두 좋은 책이다. 그중에서도 내게 가장 좋았던 책들은 내가 쌓아온 세계와 상식을 흔드는 책들이었다.


기록노동자 희정의 《일할 자격》은 내가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심하게 나의 세계를 흔들었다. 멀미가 날 정도로 강렬한 독서였다. 흥미로운 건 저자인 희정 작가 또한 책 안에서 자신의 세계와 상식이 흔들리는 것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 흔들림을 통해 노동에 대해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그렇다. 이 책은 노동에 관한 이야기지만, 그동안 내가 읽어본 노동 르포, 노동 문학, 노동계급을 연구하거나 노동자들이 겪는 탄압과 차별을 파해치는 사회과학 책들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책이었다.  


열심히 일하지 않는 노동자의 노동, 늙은 사람을 돌보는 늙은 사람의 노동, 뚱뚱한 몸을 가진 사람의 노동, 마음이 아픈 사람의 노동,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여성의 노동, 남자답지 못해 군인이 될 수 없는 이들의 노동. 이 사회에서 노동이라고 부르지 않거나 노동이라고 하더라도 좋은 노동으로 인식되지 않는 모습의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성실, 일의 의미, 책임감,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 


나는 이런 말들을 좋아한다. 이런 가치들을 좋아한다. 요새는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것을 힙하고 쿨한 것처럼 표현하는 글들이 인기가 많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와 같은 제목을 달고 있으면 책 읽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진다. (나는 이 책을 안 읽어서 책 내용이 어떤지는 전혀 모른다. 다만 제목만 보고 판단해서 읽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저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책 한 권을 쓰는 일은 그 내용이 아무리 별 볼 일 없어도 시간이 많이 드는 노동이다. 열심히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대신 나는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내는 사람들의 일상이 이 사회를 지탱한다고 생각한다. 묵묵히, 열심히 노동하며 사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그리고 나도 그러기 위해 노력한다. 나뿐만이 아니라 나를 포함해서 많은 활동가들이, 더 넓게는 많은 노동자들이, 일하는 사람들이 이런 상식을 공유한다고(혹은 공유해야 한다고) 믿어왔고, 지금도 그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회사가 거지 같아도 참고 열심히 일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에게 일은 직업보다 큰 개념이다. 회사가 거지 같으면 저항을 하거나 맞서 싸우는 것도 일이고, 회사에선 태업을 하거나 대충 다니면서 다른 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 행하는 것도 일인 셈이다. 


또한 성실함, 책임감, 자부심 이런 가치들이 친절함, 상냥함, 예의바름 같은 기질들처럼 지극히 계급적인 속성을 띤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알면서도 그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굳이 변명을 하자면 지금 당장 누군가가 그런 태도들을 갖추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건 그것들을 갖추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타고난 게 아닌 것들에 대해서는 노력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노력'마저 계급적이다. 노력할 수 있는 사람들은 교육받은 사람들이다. 안다. 하지만 게으름에 대해, 무책임에 대해, 자주 약속을 어기는 것에 대해 노력하지 않는 사람과 나는 함께 일을 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나는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대답하곤 했다. 일을 못할 수는 있고(나도 사실 못하는 게 많은 사람이니), 상황이나 사정 혹은 그 사람의 상태가 안 좋을 순 있지만 서로 함께 하는 동료 사이에 최소한 지켜야 할 예의는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니 이 책을 읽고 흔들린 것은 나의 세계, 나의 상식이다.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상식. 아마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크게 다르지 않을 상식, 보수든 진보든 함께 공유하는 그런 류의 상식이라고 믿어왔던 것들. 


이 책에 나온 이들은 노동할 자격에 왜 그런 것들이 포함되어야 하나고 묻는다. "게으르고, 불안정하고, 늙고, 의지 없"고 그러면 안 되냐고 묻는 것만 같다. 자본주의가 규정하는 노동의 속성들-부지런히 순종적으로 일만 해야 한다거나, 일을 하면 누구나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다거나, 모든 노동은 이윤을 창출해야 한다는 그런 인식에 던지는 질문이라면 나도 함께 묻고 싶다. 하지만 이들은 돈보다는 의미와 재미를 위해 일을 하는 나에게, 위계적인 구조와 기계적인 일보다는 평등한 구조와 창의적인 일을 하고 싶은 나에게, 경쟁적인 노동보다는 협력하는 노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에게도 반문을 한다. 


왜 "성실은 시민권의 발급 조건(32쪽)"인가? 왜 자격에 "정상성과 노력"이 필요한가?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질문이 그동안 내가 쌓아온 상식을 흔들어 댄다. 성실, 노력, 책임감 같은 거는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갖추고 있거나 갖추려고 노력해야 하는 덕목이라는 상식 말이다.  


결국 상식이라는 것은 보편성과 마찬가지로 세상이 정해놓은 테두리 안에서의 원리원칙이라는 걸 이 책을 통해서 다시 한번 뼈저리게 깨닫는다. 그 가치가 공동체가 유지되는 데 정말 중요하지만 결국 테두리의 안과 밖을 나누기 위한 수단일지도. 시민을 보호하는 성벽이 테두리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만 시민으로 규정하는 수단인 것처럼 말이다. 진보도 보수도 엄청나게 다른 것 같지만 그 테두리 안에서, 테두리를 지키려는 의지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런 것들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그리고 책을 읽고 나서 흔들리지만 여전히 나는 내가 지켜온 세계와 상식을 무너뜨리고 싶지는 않다. 


왜 그럴까? 나부터가 성실한 사람이고 싶어서일까? 나는 아침형 인간이고 하루 세끼를 챙겨 먹는 사람이니 성실한 사람인 건 맞다. 나의 성실함은 늘 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높여왔고, 나는 그런 점을 잘 활용해 왔기 때문에 그걸 놓치기 싫은 건가? 아니면 여전히 일하는 사람으로서 동료들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들-게으르고, 믿을 수 없고, 약속 어기고, 무책임한 사람과 일을 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혹은 내가 노력으로 일궈낸 성취들이 의미를 잃고 인정받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워서? 


무너지지는 않으면서도 흔들리는 이유는 어렴풋하게 알겠다. 나 또한 능력 없는 노동자로 존재해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감각, 일터에서 내 존재의 의미가 희미해져 가는 감각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갈수록 내 몸도 효율이 떨어져 가는 것을 깨닫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사회에서 노동하는 이에게 요구하는 정상성의 규범에 너무나 들어맞는 사람이라는 뻔한 자각 때문이기도 하다. 뻔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정상성 혹은 사회 규범에서 요구하는 것을 내가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고, 이미 아는 것을 자각이라고 말한 까닭은 이 책을 읽고선 "이 세상이 어떤 사람들에게 어떤 길목을 열어두는지 또한 막아두는지"(108쪽)에 대한 인식이 새로운 감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


연분홍치마 김일란 감독이 예전에 한 말 가운데 유독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페미니스트란 이 공간에서 누가 배제되고 있는가"를 살피는 사람이라는 말. 나는 희정 작가가 페미니스트고, 페미니스트의 글쓰기를 했기 때문에 이런 책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노동자의 권리나 노동자의 권력에 주목한 오래된 시선(물론 그것도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소중한 시선이라고 생각한다)이었다면 일할 자격도 갖추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를 쓸 수 없었을 테니까. 여성 노동자들 혹은 성소수자들이 겪는 차별이나 그들의 권리에 초점을 맞춘 페미니즘 노동 서사들과는 또 다른 완전히 새로운 페미니즘 노동 서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흥미롭게 읽은 챕터는 마지막 사회복무요원들의 노동이다. 여타의 챕터들과는 좀 다르게 내용이 구성되어 있는데, 희정 작가가 인터뷰이들의 말과 글에서 발견되는 문제의 지점들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나는 그 내용이 흥미롭기도 하고 대체복무제 개선 논의에서 꼭 필요한 시선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기록으로 남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 품평에 오르기 쉬운 2등 시민 들이 있다. 이들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은 채 민간인 남성과 군인 사이의 상대적 박탈감에만 집중한다면, 군인의 노동자성에 대한 인정과 최저임금이라는 보상은 '정상 남성'만이 사람이라 불리는 세계의 질서 속에 머물 수밖에 없다.(256쪽)

















매거진의 이전글 복잡하고 답답한 전쟁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