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용석 Aug 01. 2023

지하철을 막고 바닥을 기어야 보이는 사람들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리뷰

세상이 문제가 많아서 그런지 요즘은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드라마나 영화가 제법 많다. 학폭을 다룬 〈더 글로리〉, 노동 이슈를 다룬 〈다음 소희〉, 재벌과 일터 성폭력을 다룬 〈퀸메이커〉, 성소수자 이슈와 동물권과 어린이 인권 등을 두루 다룬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까지.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사람들


드라마나 영화에선 현실과 다르게 약자들이 복수에 성공하거나 정의가 승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사건을 해결하고 갈등을 해소하는 이들은 대개 양심적인 경찰, 강직한 법조인, 정의감 넘치는 기자 같은 이들이다. 나는 이런 작품들을 보면서 늘 궁금했다. ‘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활동가들은 왜 안 나오지?’ 물론 아예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퀸메이커〉에서 김선영 배우가 연기한 화수 이모(노동조합의 사무국장인데 직책보다는 화수 ‘이모’로 불린다는 것이 매우 상징적이다)처럼 수동적인 존재로 그려지거나 아예 존재감 자체가 미미한 경우가 많다. 변호사들이 법률 전문가고, 경찰들이 수사의 전문가인 것처럼 활동가들도 사회운동 캠페인을 조직하는 전문가들이다. 이들의 활약을 제쳐두고 정의 구현과 사회 변화를 이야기하는 건 앙꼬 없이 찐빵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드라마나 영화에 잘 등장하지 않는 게 어디 활동가뿐이겠나. 장애인들을 보기도 어렵다. 물론 영화 〈말아톤〉이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처럼 장애인이 주인공인 작품도 종종 있지만, 장애인이 주인공인 게 뉴스가 될 정도로 가뭄에 콩 나듯 한다. 최근 들어 장애인을 텔레비전에서 볼 기회가 늘어났는데, 드라마가 아니고 뉴스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열심히 직접행동을 하고 싸운 덕분에 우리는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그리고 우리의 일상에서도 잘 보지 못했던, 그렇지만 늘 존재했던 장애인들을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다. 지하철을 막아 세우고, 역사와 열차 바닥을 온몸으로 기지 않았다면 여전히 우리는 텔레비전에서 장애인을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다고 낙담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드라마나 영화가 말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나서서 자기 이야기를 하면 된다. 뇌병변 장애인이자 장애 인권 운동가 이규식(존칭 생략)처럼 말이다.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는 이규식의 생애사를 기록한 책이다. 이규식이 말하고 그의 오랜 활동지원사 김형진, 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인연을 맺은 김소영, 인권교육센터 들의 배경내가 이규식의 말을 정리했다.


책 표지



장애 인권 운동의 역사와 활동가의 삶을 보여주는 에세이


이 책은 개인의 생애사지만 저자가 장애 인권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활동가인만큼 한국 장애 인권 운동의 역사적 흐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한국 장애 인권 운동 역사책’이다. 이동권연대 투쟁국장을 거쳐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로, 이음장애인자립생활 센터 소장으로 이어진 그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면 시설 민주화 운동, 이동권 투쟁, 탈시설 운동으로 이어지는, 19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한국 장애 인권 운동의 중요한 의제와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나 또한 인권활동가 대회나 다른 연대 현장에서 만난 장애 인권 활동가들에게 들어 듬성듬성 알고 있던 장애 인권 운동의 중요한 사건과 변곡점들을 이 책을 보며 비로소 한 줄기 흐름으로 엮어낼 수 있었다. (평화활동가들이 보기에) 장애 인권 분야는 훌륭한 책이 무척 많은데, 누군가 너무 바빠 딱 한 권만 읽고 한국 장애 운동의 최신 역사를 알고 싶어 한다면 주저 없이 이 책을 추천하겠다.


한편으로 이 책은 ‘활동가’에 대한 책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보이지 않고, 세상 사람이 별로 궁금해하지 않는 것이 활동가라는 직업이다. 하지만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이규식의 말처럼, 활동가들이 문제를 발견하고 캠페인을 조직하고, 시민들이 동참해서 함께 싸워서 조금씩 변화한다.


신기하게도 우리가 목소리를 내니까 지하철역 엘리베이터도, 저상버스도 생겨났다. 순식간에 다 해결됐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목소리를 내기 전과 비교하면 눈에 띄는 속도였다. (중략) 싸움의 성과가 있으니 기분은 좋았다. (95쪽)


활동가의 일과 일상 또한 그만큼 중요하게 여겨지고 기록되어야 한다. 누가, 어떻게 활동가가 되는가? 활동가는 사회 변화를 위해 무엇을 하는가? 이규식은 노들야학을 만나고, 자신이 리프트 사고 당사자가 되고, 다른 장애인이 리프트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동안 이규식은 어느새 장애 인권 운동 활동가로 거듭난다. 이동권 연대 투쟁 국장을 할 때는 직접행동의 맨 앞자리에 서는 싸움꾼으로, 발바닥 활동가일 때는 탈시설 운동을 기획하고 당사자들을 만나고 다니는 조직가로, 이음센터 소장을 하면서는 단체의 운영을 고민하는 역할까지 사회가 활동가에게 요구하는 다양한 역할을 이규식은 해내고 있다.


그렇다고 이규식의 활동에 삐그덕거림이 없는 것은 아니다. 활동가도 사람이다. 밥 먹으면 화장실 가고, 욕먹으면 화나고, 무리하면 탈 난다.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거 같지만 동시에 왕궁의 음탕함보다 국밥집 사장에서 성을 내는 옹졸함과 더불어 살아가는, 별 수 없는 인간이다. 더군다나 돈은 많이 못 버니 쉽게 지치고, 지쳤을 때 헤어 나오기 어렵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이규식처럼 오래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들은 과연 어떻게 그 세월을 지나왔을지 궁금해한다. 이규식은 좋은 동료가 있었다. 이동권연대 투쟁국장을 3년 하면서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운 좋게 발바닥 행동 활동가들을 만났다. 운도 좋았다. 전동 스쿠터를 선물해 준 전도사, 첫 제주 여행을 동행해 준 모르는 청년 덕에 이규식은 시설 밖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책 곳곳에서 묻어나는 유머와 무엇이든 직접 부딪히고, 실패하고 욕먹으면서도 배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가 긴 세월 활동가로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온실 속 꽃은 관리받은 대로만 자란다. 너른 들판에서 흔들리며 자란 꽃은 아등바등 온갖 방법을 써서 꽃을 피운.(중략) 밖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해보면서 다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욕먹기도 해야 세상 사는 법을 알지 않을까?(124쪽)


이런 태도를 천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을 노력이라고 부르고 싶다. 인권활동가 대회에서, 집회에서 몇 번 만나본 내가 이규식의 천성을 어찌 알겠나.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그가 싸워온 현장을 통해서 나는 그가 끊임없이 배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스쿠터와 전동휠체어를 배우고, 사람들과 관계 맺는 방법을 배우고, 투쟁하는 법을 배우는 사람. 계속 배우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그에게 찾아온 운도, 좋은 동료들도 그의 편이 되었을 것이다. 



더 많은 활동가들이 책을 쓰기를


강정마을 지킴이들의 인터뷰집인 『돌들의 춤』, 다양한 분야 활동가 11명을 인터뷰한 플랫폼씨의 『활동가들』(출간예정)처럼 활동가들이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쓴 책이 최근 들어 여러 권 출간되고 있다. 무척 반가운 일이다. 나는 늘 동료 활동가들에게 글을 쓰라고, 활동가라면 글을 쓰는 것이 의무라고 강조(어쩌면 강요)해 왔다. 글쓰기는 활동가들의 주장을 정교하게 다듬고 설득의 근거를 마련하는 작업이기 때문이고 활동가들의 경험이 공공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활동가들이 숨 쉴 여유도 없이 바빠서 그렇기도 하고, 글쓰기는 연구자나 전문적인 작가의 일이라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성명서와 논평은 그렇게나 써대면서, 취재요청서와 보도자료는 허구한 날 쓰면서, 회원들에게 보내는 뉴스레터 글은 쓰면서, 많은 활동가들이 정작 자신의 활동을 글로 정리하려 하지 않는 것이 무척 안타까웠는데 그런 안타까움이 이제는 조금 사라질 거 같다.



이규식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이야기


실은 책을 읽고 나서 좀 더 생각해 보고 싶은 어려운 질문이 생겼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동시에 강정마을 해군기지에 맞선 긴 싸움을 진행 중인 강정지킴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돌들의 춤』을 같이 읽었다. 강정 지킴이들은 장애 당사자면서 동시에 활동가인 이규식과 달리 마을의 원주민이 아닌 활동가들이었다. 『돌들의 춤』에는 지킴이들이 해군기지에 맞서는 투쟁 중에 지킴이들과 마을의 원주민들 간의 이견과 갈등, 그에 대한 지킴이들의 고민이 여러 차례 나온다. 이는 사회운동에서 아주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그리고 풀리지 않는 문제다. 이런 갈등은 다양한 입장과 생각을 드러내며 사회운동을 더욱 풍성하고 입체적이고 역동적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너무 과해 사회운동 그룹이 와해되기도 한다. 이런 갈등이 운동의 건강성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당사자 출신 활동가의 역할이 중요하다.


모든 인권 침해 당사자가 활동가가 되지는 않는다. 자신의 문제가 일단락되고 나면 원래의 직장이나 자기 일로 돌아가기도 하고,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에 오는 곰두리봉사회 소속 장애인들처럼 더러는 권력의 편에 서서 활동가들과 싸우는 이들도 있다. 혹은 어떤 당사자는 사회 정의보다 개인의 욕구에 더 몰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사회 변화에 있어서는 누가 당사자인가? 장애 인권 운동에서 비장애인 활동가는 당사자가 될 수 없는가? 당사자의 말은 당사자가 아닌 활동가의 말보다 더 중요하게 다뤄져야 하는가?


이규식 활동가는 이런 질문들에 대해 어떤 고민을 갖고 있을까? 복잡한 현실에서 마주하는 갈등을 그는 동료들과 함께 어떻게 해쳐왔는지, 언젠가 북토크에 참석하게 된다면, 혹은 이규식 활동가가 이 글을 읽게 된다면 그에게 꼭 물어보고 싶다.




이 글은 인권교육센터 들의 홈페이지에 기고한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리고, 터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