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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Jul 28. 2023

그리고, 터지다

 짧은 리뷰


처음에는 만화가들의 이야기이라는 컨셉에 충실하게 읽기 시작했다. 나도 만화를 좋아하는 편이니, 그리고 창작자들(이라 쓰고 직업인이라고 읽는다)의 이야기는 늘 재밌게 읽는 편이니까. 작가를 이해하는 것이 작품을 이해하는 것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이런 류의 인터뷰집을 읽고 해당 작가의 작품을 보면 훨씬 많은 것이 보인다. 다섯 명의 만화가 중에 내가 작품을 알고 있는 작가는 <안녕 커뮤니티>를 그린 다드래기 작가뿐이었다. 세상에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작가들이 이렇게나 쌓여있다는 게 축복이지만, 이걸 언제 다 보나 싶은 마음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첫 챕터인 이하진 작가의 인터뷰를 보면서는 웹툰 <카산드라>를 함께 읽기 시작했다. 인터뷰를 통해 소개된 이야기가 너무 흥미진진했다. <카산드라>는 그리스 고전인 <일리아스>를 카산드라를 주인공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원래도 역사물을 좋아하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그저 나쁘지 않은 선택이 아니라 웹툰의 재미에 푹 빠지게 되었으니, 악마의 선택이라고 해야 하나. 그동안 웹툰은 챙겨보질 않았었는데 갑자기 내 삶에 웹툰이 들어와 버렸다. 읽어야 할 책, 챙겨보는 드라마와 영화도 많고 때때로 보드게임도 하고 친구들도 만나야 하는데 웹툰까지 보려니 일주일이 8일이고 그중 3일이 주말이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책 추천사를 쓴 오혜진 선생님은 책에 소개된 작품들까지 다 챙겨 읽었다는데, 나도 하나하나 챙겨봐야겠다.


만화가들의 이야기로 읽기 시작한 독서는 어느새 여성만화가들의 이야기로 바뀌어 있었다. 물론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여성 개개인의 각자 다른 상황을 하나로 묶을 순 없다. <그리고, 터지다>의 여성 만화가들도 각자 서로 다른 처지와 다른 상황에 놓여있다. 비혼 여성, 결혼한 여성, 결혼을 했고 육아까지 하는 여성만화가들의 상황과 사정과 고민은 조금씩 다르다. 만화 창작을 가로막는 것들도 때로는 독박육아, 플랫폼의 갑질, 몸 혹은 마음이 아프다거나, 너무나 강한 인정욕구와 실패 등등 서로 겹치면서도 조금씩은 다르다.


이 인터뷰집에 담긴 만화가들을 '여성만화가'로 한데 묶을 수 있는 건, 이들의 작품이 여성서사이기 때문이다. 작가들마다 서로 다른 삶의 굴곡을 거쳐온 것처럼 여성서사 만화의 다양한 모습을 박희정 작가는 이 책을 통해 보여준다. 역사 속 전쟁 이야기를 여성 주인공의 시선으로 다시 고쳐 쓰고(이하진 작가의 <카산드라>), 인어공주 이야기를 제주 바다로 가져와 다시 쓰고(송송이 작가의 <해오와 사라>), 시골 노인들의 삶에 주목하거나(다드래기 작가의 <안녕 커뮤니티>), 육아와 출산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쓰고(소만 작가의 <봄이와>), 여성 청소년의 이야기를 쓴다(국무영 작가의 <똥두>). 고대와 현대를 넘나드는 시간 속에, 그리스와 제주와 시골 소도시와 서울을 오가는 공간에서, 청소년과 아이 엄마와 할머니의 삶이 펼쳐져 있다. 마치 여성 서사가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지 보여주기로 작정한 것처럼.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또래들이 살아온 이야기로 이 책을 읽었다. 나는 세대론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또래 작가들의 이야기를 읽는 걸 좋아한다. 또래 작가들이 자신의 경험이나 삶을 소재 삼아 쓴 글에서는 내가 살아온 시공간의 풍경,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아주 현실적이고 끈적한 고민들을 만날 수 있는데, 내 삶 또한 그 모습 그 고민에 포개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김애란의 초기작 주인공들은 어쩐지 20대 초반의 나와 비슷한 혹은 내가 익숙하게 느끼는 상황에 놓여있다. <자오선을 지나며>의 주인공은 IMF 때문에 노량진에서 재수를 하는데, 내가 재수를 하지는 않았지만 IMF 직후 대학 입시를 치른 나는 그 감각이 낯설지 않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와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도, 살아가는 방식도 달라졌는데 김애란의 최근 소설 주인공들 또한 초기작의 주인공들과는 달라져 있다. 마치 내가 달라진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혹은 브로콜리너마저 노래도 마찬가지다.  '앵콜요청금지' '보편적인 노래' '편지'처럼 헤어진 연인에게 노래를 하던 밴드는 나이를 먹으면서 아이를 업고 동네 길을 걷거나('너를 업고') 물을 마시고 청소를 하고 생각을 하지 말고 생활을 하며 스스로를 돌보지 않음으로 무언가를 말하려 하던 시간을 살아낸다.('바른생활') 브로콜리 너마저의 노래가 달라지는 동안 나도 달라졌기에 그때도 지금도 나는 브로콜리 너마저의 노래를 좋아한다.


박희정 작가의 <그리고, 터지다> 에서 만화가들의 나이를 공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만화가들의 청소년 시절, 대학시절,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된 시절의 이야기들을 읽으면 이 분들이 나와 동시대에 한국 사회를 살아온 사람들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물론 나는 남성이었기 때문에 이분들의 감각을 온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영화 '벌새'의 주인공 은희와 나의 삶이 달라도 내가 그 영화를 보면서 1994년의 한국사회가 당시 중학교 2학년에게 어떤 모습이었는지 아주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 작가들이 만화를 그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아낸 세상이 내게도 낯설지만은 않다. 내가 하는 일-평화운동은 만화를 창작하는 일과는 다르지만 어쩌면 자리를 잡기까지 굉장히 고난한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들이 아주 가깝게 느껴지고, 절로 이 만화가들의 작업을 응원하는 마음이 드는 건지도.




추신. 마지막 챕터인 국무영 작가의 인터뷰에 전쟁없는세상이 등장해서 무척 반가웠다. 전없세 독서모임에 참여하셨다는데, 나도 함께 한 모임인지 나는 없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도 전없세 동료들도 기억에 없다. 인터뷰를 보면 만화가라는 걸 알리지 않고 모임에 참여하신 거 같은데 이 정도면 정체 숨기기에 성공하신 듯. <똥뚜>에 나오는 인권운동을 하는 계숙 언니라는 캐릭터에 전쟁없는새상이 녹아들어 가 있는 거 같다. 눈여겨 살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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