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뷰
나참, 리뷰도 아니고 책 읽기 전에 프리뷰를 다 써보네. 그렇지만 책을 읽기 전에 기록하고 싶은 게 있다. <사람을 잇다 사람이 있다 삼달다방>을 읽고 난 뒤 이 마음이, 이 느낌이, 이 생각이 어떻게 달라져 있을지 궁금하다.
제주 성산에 위치한 삼달다방. 소문으로만 듣던 삼달다방을 나는 한 달 전쯤 처음 가봤다. 개굴, 공현, 제리 등 많은 시민사회단체 동료들이 삼달다방 다녀온 이야기를 사석에서, 자신의 SNS에서 자랑하는 동안에도 크게 관심이 동하지 않았다. 인권활동가들이 많이 따르고 의지하는 선배 오케이(박옥순)와 그의 짝꿍 무심(이상엽)이 운영하는 것도,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공간으로 운영하는 것도, 만화책이 엄청 엄청 많은 것도 알고 있었지만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러다 한 달 전 제주에서 진행된 인권옹호자대회에서 정말 오랜만에 오케이를 만났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오랜만이었고, 오케이도 나도 서로 생각하지 못했던 만남에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마침 인권옹호자대회가 끝나고 하룻밤 잘 곳이 필요했던 나는 오케이와 함께 삼달다방에 가게 되었다. 삼달다방에서 만화책 <20세기 소년>을 보다가 함께 묶은 분들과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새벽에 나온 것이 나의 삼달바당 체험의 전부다. 물론 오랜만에 만난 오케이와의 대화는 너무나 흥미로웠고, 처음 본 삼달지기 무심님과의 대화는 무척 즐거웠다. 무심님은 오랫동안 공연 기획 일을 해왔던지라 내가 궁금해하는 한국 대중음악사의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덕분에 밤이 깊도록 음악을 크게 틀어놓으며 그 노래를 만들고 연주하고 부른 뮤지션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호사를 누렸다.
그러고는 한 달이 지났는데 최근에 나온 <사람을 잇다 사람이 있다 삼달다방> 책 북토크를 파주 교하에 있는 쩜오책방에서 한다는 게 아닌가. 제주에서 내가 받은 환대가 생각났고, 북토크에 신청해 오케이와 무심을 보러 다녀왔다. 쩜오책방이 가득 찼는데, 대부분이 삼달다방에 다녀온 분들이었다. 활동가들이 삼달다방을 좋아하는 건 익히 알고 있었고, 왜 그런지도 쉽게 짐작이 간다. 믿고 의지하는 좋은 선배 활동가가 있는 곳이고 누구도 차별하거나 배제하지 않는 곳이니까. 인권활동가들에게는 힘들면 쉬러 갈 수 있는, 언제나 든든한 뒷배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그런데 쩜오책방 북토크에 온 분들은 직업활동가들이 아닌데, 오케이나 무심을 원래 알던 사람들이 아닌 분도 많은데 삼달다방에 다녀온 뒤 그곳을 너무나 사랑하게 된 분들이었다. 무엇이 이 사람들의 마음을 앗아갔을까, 북토크와 뒤풀이 내내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벌써 10년도 더 전, 내가 처음 취직한 출판사 시절이 떠올랐다. 나는 그곳에서 절대 닮고 싶지 않은 모습들을 마주했다. 그 회사 간부들, 경영진들은 회사 안에서는 권력자들이었지만 회사 밖에서는 국가나 대기업의 권력에 맞서는 진보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 몇 명은 내가 아는 활동가들하고도 친분이 있었고 대규모 집회에 가면 어렵지 않게 얼굴을 마주칠 수 있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여느 권력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아스팔트 위에서 대통령을 욕하고 이건희를 욕하는 건 잘했지만, 회사 안에서는 이건희나 김정은 못지않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대표이사의 성희롱, 부당노동행위, 비민주적이고 비합리적이고 회사 재정 건전성을 거덜 내는 경영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못했다. 오히려 대표이사의 손발이 되어 노동조합을 활동을 방해했다.
당시에는 그들이 진절머리 나도록 싫었고 그들의 위선에 치를 떨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하다. 왜 안쓰럽냐면 그 사람들 대부분은 업무 능력이 별로 없는 이들이었고, 나이는 먹었고 능력은 없으니 다른 회사에 이직하기도 어려운 이들이었다. 그러니 그 회사에서 충성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회사 밖에서 온갖 진보적인 집회에 열심히 다니면 사람들은 나이 먹고도 열심히 산다며 대단하다고 박수를 쳐주는데, 그분들은 자신의 삶 속 모순으로부터 도망쳐 그 박수 소리 뒤에 숨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이 먹고도 보수화 되지 않고 아스팔트 현장에 다니는 훌륭한 중장년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인정받는 것을 즐기는 거 같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굳게 다짐했다. '말년에 능력 없어서 권력에 빌붙어야 하는 삶은 얼마나 추한가. 어딜 가더라도 내 밥벌이 할 능력 정도는 갖추자. 그래야만 내 삶 가까이에 있는 부당한 권력에 맞설 수 있다.' 무언가를 배우는 걸, 책 읽는 걸 좋아하기도 했지만 어쩌면 나름 열심히 책도 읽고 책도 쓰고 그런 까닭에는 그때 한 다짐이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나는 내 밥벌이 못해서 권력에 아부해야 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기를 쓰고 능력 있는 사람이 되려고 애썼다.
편집자는 적성에 맞지 않았지만 다행히 활동가는 적성에 잘 맞았고, 어떤 면에서는 부족하고 잘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면에서라도 능력을 인정받는 활동가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부지런히 책을 읽고,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그리고 글을 써댔다. 새로운 것이나 내가 못하는 것은 최소한 돌아가는 방식을 이해하려고 공부했고, 내가 자신 있는 것들은 이걸로 용돈 벌이라도 할 수 있는 기술로 개발하기 위해 꾸준히 연마했다.
얼마 전에 술 마시면서 이야기 나눌 때 뭉치가 활동가들이 능력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운동판이 가장 능력주의가 심하다고 이야기했는데, 맞장구를 치면서도 여전히 나는 능력 없는 사람인 채 나이 먹어서 갈 곳 없는 신세가 되는 것이 너무나 두렵고 불안했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에 빌붙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능력을 갖추자는 마음이 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살아보니 대단한 능력자가 되는 건 애당초 글러먹은 일이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능력이라도 갖추는 일도 무지막지하게 어려운 일이더라. 노력도 재능도 다 개인의 성취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들이다. 죽도록 노력해야 겨우 중간을 가고, 뒤처지지 않을 수 있다. 노력도 재능이고 권력인 바 노력할 수 없는 몸, 노력할 수 없는 마음, 노력할 수 없는 상황인 이들을 나는 앞지르며 살아왔다. 운 좋게도 나는 노력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정말 운 좋게도 내가 노력한 만큼 인정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머리로는 혼자만 살아남으려고 할 게 아니라, 시스템과 사회구조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혼자 살아남을 길을 찾는 것만도 힘든 일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며 살아간다.
사람들이 삼달다방에 그토록 열광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차별받거나 배제되지 않는 공간은 퍽 아름답지만 그것만으로 이처럼 다양한 사람이 매료되어 제주도에 간 김에 삼달다방에 가는 게 아니라 삼달다방 가려고 제주도에 갔을까? 무심은 북토크에서 삼달리에서 시간이 멈춘 곳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는데, 그건 약간은 도시에서 벗어난 시골에서 느낄 수 있는 종류의 느낌처럼 다가왔다. 꼭 삼달다방이 아니더라도 도시의 삶을 탈출하면 느끼는 감각들 말이다.
사람들은 삼달다방에 열광하는 건 비단 그뿐만은 아닐 거 같다. 자본주의 사회가 규정해 놓은 생산성 높은 육체, 마음, 능력 같은 기준들이 삼달다방에서는 작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런 질서에 정면으로 맞서고 싸우는 곳이라는 점이 삼달다방을 특별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그런데 저항의 진지라고 하면 좀 부담스러울 수 있는데 삼달다방이 싸우는 방식은 뭔가를 반대하고 기성의 힘과 질서를 부수려고 악을 쓰는 게 아니라 다른 질서와 관계를 만드는 방식이기 때문에 직업활동가가 아닌 사람들도 해방감을 느끼면서도 부담스럽지 않게 저항의 진지를 찾는 게 아닐까? 사람의 존재 의미나 가치가 쓸모나 생산성 따위로 결정되지 않는 작은 세상을 내가 함께 만들고 있다는 감각이 주는 해방감 말이다.
삼달다방을 생각하면 할수록 10여 년 전에 내가 했던 다짐들, 여전히 내게 유효하고 중요한 다짐들을 되돌아보게 된다. 여전히 나는 제 밥벌이 할 능력도 없어서 권력에 빌붙어야 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삼달다방 같은 진지가 소중하고 필요하지만 모든 진지가 그런 방식으로 싸울 수만은 없다는 것도 잘 안다. 그렇지만 나이 먹어 가면서 훌륭한 활동가가 되고 늙어서도 권력에 빌붙어야만 밥벌이 할 수 있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한 방법이 나 혼자 애써서 능력을 개발하는 것, 그래서 나 혼자 떳떳하게 사는 것이어도 괜찮은지 자꾸만 스스로 묻게 된다. 마치 삼달다방이 나에게 질문을 던진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