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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Dec 04. 2023

블루 자이언트

짧은 리뷰

스포일러 있음


파주에 살아서 좋은 것 하나. 명필름아트센터가 있다는 거다. 봉준호 감독도 자기 영화 볼 때 좋은 극장으로 추천했는데 명필름아트센터는 특히 소리가 좋다. 라라랜드 같은 영화를 명필름에서 본다면 OTT로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체험일 수밖에 없다. 음악 영화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어디서 봤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봉준호 감독은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로마'를 명필름에서 보는 것을 추천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로마'는 사운드가 중요한 영화라고, 음악이 아니라 주인공들의 일상을 구성하는 소리가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니 재즈 영화라면 당연하게도 명필름에서 봐야 하지 않겠나.


일본 애니메이션 '블루 자이언트'를 보고 싶었는데 바빠서 볼 수 없었고, 이미 막이 내린 줄 알았는데 지난 주말 명필름에서 마지막 상영을 한다는 것을 알고 이건 무조건 봐야지, 결심했다. 마치 영화를 보기 위해 체력을 비축한 것처럼 토요일 내내 집에서 꼼짝 않고 쉬었다가 일요일 첫 순서로 상영하는 '블루 자이언트'를 보러 갔다. 만화책이 원작인데, 만화책도 보고 싶었지만 기회가 닿지 않았다. 코로나 때 지원금으로 받은 돈으로 이 만화책을 살까 망설이다가 포기했다. 내가 집이 넓어서 책장이 많았다면 샀겠지. 만화책은 만화책대로 장점이 있겠지만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소리를 담을 수 있기 때문에 작은 재즈 공연을 본다는 기분도 들거라 기대했다.


'블루 자이언트'의 음악에 대해서는 내가 평가할 깜냥은 안 되고, 그냥 음향 좋은 극장에서 재즈 연주를 들은 호사스러운 경험이었다. 특히 주인공의 박력 넘치는 색소폰 연주가 인상 깊었다. 주인공들은 18세의 재즈 연주자들인데 그만큼 그들의 연주는 생기 넘치고, 도전적이고, 발랄하며, 특히 힘이 넘쳤다. 고급스러운 청자가 아닌 내가 듣기에도 그 박력에 몸이 들썩일 정도였다.


스토리라인은 어쩌면 전형적이었다. 주인공들의 열정과 노력, 좌절과 실패, 그리고 그걸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전형적인 성장스토리로 특별할 건 없었다. '여기쯤에서 뭔가 좌절을 하겠군'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주인공들에게 어떤 사건이 생기고, '이 좌절을 극복하면서 성장하겠군' 이런 생각을 배신하지 않고 이야기가 흘러갔다. 독창적이지는 않지만 이게 꼭 나쁜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뻔하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대중적인 스토리라인이라는 것. 사람들에게 익숙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뻔한 성장 이야기에는 늘 뻔한 교훈이 들어가 있다. 문제는 이 뻔하고 식상한 교훈을 얼마나 관객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느냐다. 나는 이 지점에서 이 영화가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미 모르는 바가 아니고, 뻔히 알고 있는 자기계발서 같은 교훈이지만, 나는 영화를 보고 나서 내가 이 교훈을 곱씹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교훈은 두 가지다.


노력하는 사람은 이길 수 없다. 이 얼마나 뻔한 교훈인가. 예술이나 스포츠를 다룬 작품들에서는 반복적으로 나오는 교훈이다. 차이가 있다면 타고난 천재가 노력해서 세계 최고가 되거나, 재능은 없는데 피나는 노력으로 그걸 극복하거나. '블루 자이언트'의 주인공들은 이 둘 다에 해당한다. 색소폰 연주자 다이와 피아니스트 유키노리는 타고난 재능에 노력을 더하고, 초보 드러머 슌지는 멤버들과 합주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한다. 이들의 노력은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한다. 물론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은 진실이기도 하고 허구이기도 한다. 노력이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노력은 우리를 배신하지만, 노력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노력은 자신을 버린 이들을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노력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 앞에서도, 노력을 한다 해도 배신당할 수도 있다는 현실 때문에 우리는 의구심을 품게 된다. 그 지점에서 바로 이 영화가 주는 두 번째 교훈이 중요하다. 물론 이것도 굉장히 진부한 이야기다.  


즐기는 사람은 이길 수 없다. 노력이 배신당하더라도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면 그 배신에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다. 블루자이언트의 주인공들은 모두 지독한 노력파지만 재즈를 하는 이유에서는 차이가 난다. 유키노리는 이기기 위해서 재즈를 한다고 하고, 다이는 그냥 재즈가 좋아서 재즈를 한다. 유키노리는 꿈꿔왔던 목표를 앞에 두고 거대한 벽을 마주하는데, 이기기 위해서 하는 음악으로는 그 벽을 넘을 수가 없다. 이기고 지는 게 상관이 없고 그냥 재즈가 좋아서 재즈를 하고 좋아하는 재즈를 열심히 해서 세계 최고가 되고 싶은 다이는, 아마도 세계 최고의 색소포니스트가 된 거 같지만,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그에겐 좋아하는 재즈를 하는 것 자체가 목표였으니.


이 두 가지 뻔한 교훈이 왜 나에게 크게 다가왔을까. 좋은 성장 스토리들이 그렇듯 이 영화도 나의 성장에 빗대어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직업(평화활동가)에서 좀 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 꾸준히 노력해 왔다고 믿는데, 요즘은 좀 벽에 부딪힌 느낌이다. 한 단계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지금과는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노력의 강도일 수도 있고, 노력의 내용일 수도 있고. 그런데 여기가 내 성장의 최대치일까 봐 두려운 마음도 든다. 내가 기울일 노력이 나를 배신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그게 서운하지도 않고 세상살이란 게 원래 그렇다는 것도 알고 있는데도 불안한 마음이 다 가시는 건 아니다. 노력도 안 해보고 지레 겁먹는 모습이 내 마음에도 안 들지만, 노력도 참 어려운 일이다. 갈수록 체력도 집중력도 떨어지는 것을 느끼니 노력에도 전력을 쏟을 수가 없다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그러니, 더더욱 이 일이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걸 스스로에게 강조하게 되는 거 같다. '노력에 배신당해도 괜찮아. 내가 이 일을 하는 게 좋고 행복하잖아.' 이렇게 미리 도망칠 구석을 만들어 놓고 있는 거 같다. 나의 이런 생각들을 영화가 건드렸기 때문에 뻔한 교훈을 말하는 이 영화가 인상 깊게 남은 게 아닐까. 아, 물론 극장에서 재즈 연주 맘껏 듣는 경험도 색다르고 좋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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