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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Oct 26. 2023

파견자들

짧지 않은 리뷰

*스포일러 있음

*김초엽 작가의 팬심 가득한, 지극히 주관적인 서평입니다.



파견자들을 읽고 난 뒤 나는 버섯과 균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찾아보고 있다. 이 신비롭고 아름다운 존재들에 매혹되었기 때문이다. 요새 바빠서 벽돌책을 읽을 여유가 없는데도 세계 끝의 버섯을 사봐야 할까 고민이 들 정도다.


단편은 잘 쓰지만 장편은 재미없는 작가들도 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지구 끝의 온실(그러고 보니 지구든 세상이든 끝에는 어떤 식물적인 존재가 있는 것인가...)을 읽기 전에 나는 기대반 걱정반이었다. 김초엽이니까 잘 썼겠지라는 기대감과 장편은 별로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뒤섞여 있었는데, 기우였다. 덕분에 파견자들은 걱정 1도 없이 기대감만 가지고 기다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대를 충분히 충족시킨 매혹적인 작품이었다. 김초엽 세계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면서도 또 다른 세계로 한 발짝 내디딘 소설이었다.


강풀 월드의 캐릭터들과 김초엽 세계의 캐릭터들


얼마 전 사람들과 강풀의 작품 속 인물들과 김초엽 작품 속 인물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드라마 '무빙'이 끝난 직후였다. 색깔로 비유하자면 강풀의 인물들이 형광빛 노란색이라면 김초엽의 인물들은 무채색의 노란색, CMYK의 K의 농도가 짙게 배어있는 노란색이다.


무슨 말이냐면 강풀의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착하고, 착하고, 착하다. 좌절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돌보고, 끝내 승리한다. '무빙'의 주인공 장주원의 대사처럼 "착한 사람들이 승리하는 멜로드라마" 속 인물들이다. 이들은 구김살도 없고, 오지라퍼들이고, 세상과 불화하는 면은 있지만 가족들과는 아주 끈끈한 애정을 과시한다. 그래서 강풀의 인물들을 보면 내 마음도 꽃밭처럼 느껴지기 마련인데, 작품 밖으로 나오면 강풀의 인물들은 현실에서는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다.


김초엽 작품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가상공간이다. 우주의 어느 행성이거나, 지구의 지층 아래거나, 혹은 멸망한 뒤의 지구거나. 그리고 인물들을 둘러싼 상황은 대체로 어둡다. 파견자들은 애초 설정이 지하도시니까 전체적인 색감 자체가 어두운 게 당연한데, 시각적으로만 어두운 게 아니다. 범람체로 지상에서 쫓겨난 인류(파견자들), 더스트로 멸망해 버린 뒤의 지구(지구 끝의 온실)처럼 김초엽 작품 속 세계는 망해버린 세계다. 그런데 김초엽의 인물들은 망해버린, 그야말로 검은색으로 뒤덮인 세계에서도 끝내 좌절하거나, 염세적이거나, 시니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강풀의 인물들처럼 착하고 착하고 순수하고 흔들림 없이 착하기만 한 것은 아닌다. 김초엽의 인물들은 착하기만 한 사람들은 아니다. 때로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기도 하고, 그 욕망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하거나 비겁한 선택을 하기도 한다. 다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할 뿐이다. 자신의 선택을 늘 의심하고 끊임없이 흔들리면서.


호기심 가득한 소수자들


파견자들의 주인공 태린은 임무를 완수하는 것과 사랑하는 이들과의 관계 사이에서,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과 윤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일과 부딪히는 상황 속에서 계속 갈등한다. 그리고 자신이 마주한 새로운 세계들에서 거듭되는 선택의 순간마다 흔들린다. 주인공 태린뿐만이 아니다. 범람체에 범람화 된 사람들,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린 이들도 자기 앞에 놓인 전혀 새로운 지구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모두가 그러진 않았겠지만, 김초엽 작가가 주목하는 인물들은 모두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김초엽의 인물들은, 특히 파견자들의 인물들은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선오와 태린은 지하도시에서 지상세계를 궁금해한다. 이들의 호기심은 아주 왕성한 에너지여서 이들은 때로는 지하세계의 룰 같은 건 가볍게 무시하고 행동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강풀의 인물들과는 무척 다르다. 강풀의 인물들은 계속 무언가를 지키는 이들이고 그들이 지키는 대상이 그 사회의 보편적인 가치라는 면에서 강풀의 주인공들은 완고하고 착한 보수주의자라면, 김초엽의 인물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정상성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차별받거나 배제된 존재들이다. 그리고 김초엽의 인물들이 그런 존재들에 마음이 가는 까닭은 기본적으로 (강풀의 인물들처럼) 휴머니즘이 장착되어 있지만, 내 생각에는 바로 호기심이 큰 거 같다. 낯설고 이질적이고 새로운 것들에 대한 강한 호기심이 기존 사회가 단단하게 구축해 놓은 가치 체계나 제도, 윤리에 얽매이지 않게 해 준다. 그래서 김초엽의 인물들은 기존 세계를 해체하고 다르게 변화시킨다는 점에서도 세계를 단단하게 하는 강풀의 인물들과는 다르다. 아무튼 나는 김초엽의 인물들이 이러저러한 선택을 하는 힘이 어떤 정치적 목적이나 강한 신념이 아니라 지적인 호기심에서 나온다는 것이 무척 흥미롭다.


소수자에 대한 은유로 가득한 소설


김초엽 소설 속 세계는 기본적으로 소수자에 대한 은유로 가득하다. 남들과는 다른 감각기관이나 신체를 가진 이들, 그래서 이질적인 존재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소설은 이런 특징이 더 도드라졌다고 느낀다. 파견자들의 세계는 우주에서 온 범람체들에 밀려 인류가 지상에서 도피해 지하 도시에서 살아가는 세계다. 범람체들은 지구상의 존재로는 균류와 비슷한데, 개체이면서 집단으로 사고하고 존재한다. 그리고 지구 위의 생물들에 침투해 이들을 범람화 한다. 지하도시에서는 범람화 된 인간들은 미쳐서 결국에는 죽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들을 광증 발현자라고 부르며 도시에서 격리한다. 미치거나 죽지 않고 범람체들과 더불어 사는 방법을 찾은(인간과 범람체가 서로를 길들이면서 함께 찾은 존재들) 이들도 있는데, 지하도시의 권력층은 이들의 존재를 알고 있지만 지하도시 사람들에게는 철저히 숨기며 이들을 몰살하려고 한다.


이 설정이 나는 많은 면에서 소수자에 대한 우리가 사회의 혐오와 차별에 대한 은유처럼 보였다. 보통의 사람들과 다르게 세상을 감각하고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발현자들과 전이轉移자(인간의 자아를 침범하지 않는 법을 익힌 범람체들을 받아들여 범람화된 채로 살아가는 이들이 스스로 칭하는 이름)의 모습을 보면서는 올리버 색스의 책에 나오는 올리버 색스가 만난 이들과 장애인들, 성소수자들이 떠올랐다. 발현자들에 대한 지하도시 사람들의 증오와 분노를 보면서는 성소수자와 장애인, 난민을 혐오하는 이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고, 발현자들을 도시에서 격리시키는 지하도시의 지도자들을 보면서는 외국인보호소라는 감금 시설을 운영하는 한국 정부가 떠올랐다. 그리고 사람들 몰래 발현자들을 실험체로 써서 생체 실험을 진행하는 장면에서는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유대인 수용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 모든 장면들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창살 없는 감옥에서 학살당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떠올랐다.


평화는 전쟁과 공존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평화활동가인 나로서는 다음과 같은 통찰이 너무나 반가웠다. 범람화된 지구를, 지상세계를 인간이 다시 탈환하는 것을 목표로 설립된 파견 본부 설립에 대한 에반 바노스라는 사람의 기고글이 소설 본문 별면에 들어가 있는데, 에반 바노스는 이렇게 말한다.


 "(전략) 그러나 분명히 할 것이 있다. 이 조직의 목적은 하나다. 우리는 평화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승리를 바란다. 궁극적인 승리를 바란다.(후략)"


우리는 보통 평화는 전쟁의 승리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패배하면 평화는 존재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승리 또한 평화는 아니다. 사실 승리와 패배는 모두 전쟁의 산물이고 평화는 전쟁과 공존할 수 없다. 그러니 에반 바노스의 저 말은 전쟁과 평화의 관계를 매우 정확하게 이야기한 것이다. 소설에서는 저 기고문 인용으로 잠시 등장하니 에반 바노스가 어떤 인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분명 평화를 원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솔직한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전쟁을 평화로 포장하지는 않으니.


지하도시의 지도자들은 확실히 공존보다는 전쟁을 택했다. 범람체를 지구상에서 몰아내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공존을 택한 사람들도 있었다. 자신이 원해서 공존하는 방식을 선택한 사람도 있지만, 자기 의도와는 상관없이 범람화 되어 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공존하는 방식을 찾아야만 했던 이들도 있다. 나는 이 지점이 전쟁으로 점철된 이 세계가 주목해야 하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을 절멸시킬 수 있는 방법 같은 것은 없다. 세상은 평화주의자들을 향해 이상주의자라고 손가락질하지만 오히려 전쟁을 통해 상대를 절멸시켜 우리만의 평화를 이루겠다는 생각이야 말로 비현실적이다. 우리의 현실은 범람체와 공존하는 방식을 찾아야 하는 지하도시의 시민들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우리 세계의 '범람화된 존재들'과 공존하는 법을 찾아야 한다. 범람회된 존재들이란 성소수자, 장애인, 난민처럼 혐오에 노출되기 쉬운 소수자들일 수도 있고, 국제정치나 국가단위로 생각하면 서로 적대하는 국가일 수도 있다. 공존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평화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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