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은 있지만 기분은 나쁘다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아주 깊게 해 본 적도 없고 글쓰기 수업을 듣거나 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데, 책을 두 권 내고 나니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교육을 하는 일도 생긴다. 교육 때마다 늘 반복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글쓰기는 미리 실패를 경험함으로써 새로운 대안을 찾게 해 주고 그를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좀 더 설득력 있는 근거와 논리를 만드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글을 쓸 때 잘 쓰지 못할까 봐 걱정하지 말고, 오히려 그런 실패한 글쓰기를 쌓아가는 것이 좋은 글을 쓰는 과정, 다시 말해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를 구성하고 근거를 찾는 과정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나는 오늘, 그토록 강조했던 실패를 경험했다. 그 기록을 남겨두자.
류호정 의원이 여성징병제 논의를 포함해서 성평등 의제로 병역제도 이슈를 꺼낸 것이 얼마 전 반짝 화제가 되었다. 이 이슈는 평화활동가들에게는 선거 때만 되면 반복되는 지겨운 이슈인데, 매번 그렇듯 그다지 깊은 고민 없이 20대 남성들의 표심에 호소하려는 정치인들이 툭 던졌다가 잊히는 그런 이슈다. 그리고 류호정 의원과 새로운 선택의 정책 또한 새로울 것 하나 없는, 또 한 번 확 주목받았다가 이내 사그라들 수준이었다. 그래서 그런 불만을 페이스북에 짧게 쓰기도 했다.
그런데 한 언론사 기자님께서 이 이슈 관련해서 글을 써달라고 요청하셨다. 나는 새로운 선택의 정책이라는 게 제대로 된 글로 비판할 건덕지도 없이 빈약한 수준이고, 이 이슈 또한 언제나 그랬듯이 훅 지나갈 거 같다고 쓰지 않겠다고 답했다. 무엇보다 내가 이 주제로 글을 쓸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여성징병제 관련 글은 처음 쓰는 건 아니지만 예전 글과는 또 다른 이야기를 하려면 자료도 찾고 공부를 해야 하는데 지금 내가 그런 공부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지라. 하지만 기자님은 거듭 요청을 하셨고 마감 기한을 넉넉하게 주신다면 한 번 써보겠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지난 일주일이 흘렀다. 평일에 틈틈이 자료도 찾아보고 관련 글도 읽으면서 기사를 써보려고 시도했지만 잘 안 됐다. 오늘은 날 잡고 아침 일찍부터 카페에 가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완성을 하든 포기를 하든 오늘 끝장을 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쓰면 쓸수록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쓰기에는 아직 공부가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고. 오후에 다시 카페에 가서 글을 쓰는데도 기고할만한 수준의 글이 나오질 않았다. 나는 완벽주의자가 아니고, 어떤 글은 내용적으로 완벽하려는 노력보다는 제때 나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 정한 기준이 그다지 높지 않은 편이다. 어차피 언론에 실릴 수준이 아닌 글이라면 편집부에서 거를 테니, 조금 미흡해도 일단 던져보는 편이다. 그런데도 이번 글은 내 선에서 도저히 밖으로 내보일 수 없었다.
결국 실패를 인정하고 기자님께 전화를 드렸다. 내 공부가 부족해서 못 쓰겠다고. 정말 죄송한 마음 한가득이었다. 글쓰기는 실패를 미리 경험함으로써 내 논리의 허점이 무엇인지를 구조화해서 살펴보는 작업이라는 말을 정말 나 스스로 체감했다. 그렇지만 기분은 썩 좋지 않다. 아침 일찍 목욕하고 카페 가서 글쓰기 시작했을 때는 내가 막 훌륭한 사람이 된 거 같고 기분이 좋았는데. 역시 모든 실패는 거기서 무얼 배우든 상관없이 어쨌든 기분이 상하는 일이다. 하루를 쏟아부었는데 실패하고 나니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도 든다. 그 시간에 써야 하는 다른 글을 썼거나, 아니면 그냥 글 생각 안 하고 놀기라도 했음 안 억울했을 것만 같다.
기분이 상했으니, 그 핑계로 맥주나 마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