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리뷰
그냥 뒹굴거리는 걸 잘하지 못하는 나는 주말이나 휴일이라도 누워 있는 법이 없었다. 눕는 것은 잠잘 때만이고, 깨어 있는 시간이라면 누워 있는 날은 몸이 아픈 날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막 대단히 부지런하게 집안일을 찾아서 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대체로 시간 여유가 있으면 친구들을 만나거나 사람들에게 연락해 약속을 잡곤 했다. 이제 나는 사람들을 만나고 술을 마시고 대화를 나누는 일이 예전만큼 즐겁지 않다. 때때로는 체력적으로 힘들다. 그렇지만 여전히 누워서 뒹굴거리는 것은 못한다. 깨어 있는 시간을 혼자서 보내야 하는데, 게임은 이제 재미가 없고 드라마는 이미 다 봐버렸거나 일주일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찾은 가장 좋은 혼자 놀기는 책 읽는 것과 글 쓰는 것이었다.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되지 사람에게 실망하거나 체력적으로 감정적으로 힘들지 않으면서도, 책을 매개로 저자와 대화를 하는 것이니 소통의 욕구는 충족되었다. 그리고 이젠 읽고 난 직후가 아니면 책에 무슨 내용이 있었는지, 책을 읽고 난 내 감상이 어땠고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가 기억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면 책 읽고 난 뒤에는 리뷰를 쓰려고 한다. 새롭게 발견한 정보, 책을 읽고 들었던 질문이나 생각, 그리고 그때의 감정을 까먹지 않기 위해서.
<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읽은 까닭은 정말로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김지원 기자식으로 표현하자면) '해찰'하는 순간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해찰의 순간에 만난 생각들과 감정을 기록하려 한다. 안 그러면 또 까먹을 테니까.
나의 '읽는 욕망' 가장 내밀한 핵에는 항상 쓰기, 진정성 있는 소통의 욕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내 이야기를 누군가가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도 내 글을 읽고 공감하거나 공감하지 않더라도 비판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180쪽)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을 털끝만큼도 바꿀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어떤 대의가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것과 거기에 동의하는 것이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나는 어설프게 쓰는 자로서 살아온 지난 십여 년간 절실하게 깨달았다.(182쪽)
평화활동가로서 나는 정치적인 주장을 하고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사람들을 설득해야 한다. 주장하기와 설득하기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영상을 제작하기도 하고, 퍼포먼스로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가장 기본적인 메시지 전달 방식은 역시나 글쓰기와 말하기다. 특히 활동가들의 주장은 이 사회에서 아직은 보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가치나 권리를 옹호하는 경우가 많으니, 설득은 참 어려우면서도 무척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김지원 기자의 저 말들이 내게는 여러 감정과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기자의 쓰기와 활동가의 쓰기는 다른 면이 있지만 읽고 쓰는 욕망의 내밀한 지점에 소통의 욕구가 있다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더군다나 설득을 위해서 나와는 생각이 다르거나 심지어 세계관이 다른 이들과도 대화를 해야 하는데, 지금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을 조금도 바꾸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도 느끼기 때문이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늘로 솟은 거대한 벽을 마주 보고 있는 기분이 들 때면 벽을 타고 올라야 할지, 옆으로 돌아가야 할지, 땅을 파고 지하로 벽 너머로 가야 할지, 아니면 포기하는 게 맞는 건지, 벽 앞에 캠프를 차리고 벽을 넘을 사람들을 모아 작전을 짜야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내가 겪고 생각한 바로는 더뎌 보이더라도 정공법만이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김지원 기자가 이야기하는 책이라는 매체가 가지는 특징 가운데 많은 것이 내가 생각하는 평화운동과도 많이 닮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정공법이라는 방법, 그러니 자연스럽게 조금 더뎌보이지만 자신만의 호흡을 지켜가야 한다는 측면에서.
하고 많은 매체들 가운데 무언가를 배우기 위한 도구가 굳이 책이어야 하는 까닭에 대해 김지원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글이든 영상이든 쉽게 쓰고, 쉽게 소비되는 시대에 여전히 책 한 권 분량의 생각을 삭여 내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주장을 겸손하게 검증하고 또 모은 결과물이 갖는 밀도는 결코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다. (13쪽)
즉 책이라는 매체는 저자와 편집자를 비롯한 출판노동자들과 비평가들과 독자들의 수고와 노동과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콘텐츠이기 때문에 밀도가 매우 높고, 상대적으로 믿을만한 지식과 정보를 다룬다는 것이다.
평화운동 또한 빠른 속도, 자극적인 말 걸기의 유혹을 느끼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캠페인을 해나갈 때 반전反戰 여론을 높이기 위해 끔찍한 이미지를 사용한다든지, 혹은 여성을 피해자로만 재현하는 식으로 성별 고정관념에 기댄다든지 하기 쉽다. 그리고 이런 방식은 단기적으로 매우 효과적일 때도 있다. 하지만 평화운동의 궁극적인 목표-가부장제와 군사주의, 국가주의, 성차별주의가 폭력적인 형태로 얽히는 것에 저항하기 위해서라면 이는 그다지 효과적인 방식이 아니다.
느리고 더디게 보이더라도 정공법을 택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이다. 원래 어려운 것이라면 어렵게 달성할 수밖에 없다. 수고롭고 번거로운 노동과 노력이 책을 만드는 것처럼, 평화운동 또한 지겹고 지루한 수고와 노력의 과정이 있어야만 더 좋은 주장을 내놓고, 더 좋은 메시지로 더 많은 사람과 소통하며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쓰는 저자의 마음으로, 책을 만드는 출판노동자의 마음으로, 책을 읽는 독자의 마음으로 평화운동을 해나가야 한다고, 다시 한번 결론을 내려본다.
그렇다면 나는 평화활동가면서 책을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하니, 꽤나 운이 좋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