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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May 27. 2024

보여주기-세상을 내 편으로 삼는 법

짧은 리뷰


평화단체 활동을 하다가 출판사를 다니면서 내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였다. 뭐 어느 출판사들 독자들이 책을 사도록 설득하는 것이 일이고, 책이 아니라 다른 상품을 만들어 파는 일도 결국 사람들이 지갑을 열도록 설득하는 일이니 이게 나만의 관심사는 아닐 수도 있다. 내가 사람들을 설득하고 싶은 분야는 무척 제한적이었다. 예컨대 잘 나가는 출판사의 직원들이 그러하듯, 현시대의 독자들이 관심 갖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분석하고 그런 독자들의 욕구에 부합하는 책을 기획하는 것이 이나라 내가 그동안 해왔던 평화운동의 주장을 사람들에게 잘 전달하고 설득하고 싶었다.


마케팅을 제대로 공부하진 않았지만 편집자로서 나름의 고민을 이어갔다.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대중적인 글쓰기는 무엇인지, 사람들이 때로는 싫어하거나 거부감을 갖는 주제나 주장에 대해서 물러섬 없이 그렇지만 부드럽게 말을 건네는 화법은 무엇인지 고민했다. 왕도가 있을 리 없다. 그나마 내가 찾은 몇 가지 방식은 사실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기본 중의 기본이었고, 정공법 중의 정공법이었다. 키워드로 요약해 보자면 '솔직, 담백, 유머'였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 모른다고 말하고 아는 것을 과장하지 않는 솔직함. 불필요한 미사여구 걷어내고 정확한 논거와 정보를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담백한 글쓰기. 여기까지는 어쩌면 세상 모든 좋은 말하기/글쓰기의 필요조건이다. 이렇게 하면 무리해서 능력 이상의 재주를 부리려다 망하는 일은 없게 되고, 중요하고 정확한 내용을 말과 글에 담을 수 있지만, 문제는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재미없는 글을 누가 봐주나. 그래서 마지막 키워드 유머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유머라는 측면에서 오후 작가의 글은 읽는 사람을 홀리는 매력이 있다. 방대하고 잡다한 지식과 정보를 '그러거나 말거나, 네가 이 책을 읽지 않는다 한들 뭔 상관이냐 싶지만 읽으면 너도 재밌을 걸' 같은 태도로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글쓰기가 그동안 오후 작가의 책을 읽은 감상이었다. 재밌고, 또 재밌고, 신기한 이야기들의 대잔치였다. 유쾌함은 자칫 가벼움으로 흐를 수 있는데, 오후 작가가 다루는 사건이나 이야기들의 맥락에 숨어 있는 무거운 주제의식들이 가벼움으로 흐르는 것을 막아준다. 그렇다고 묵직하게 진지 빨 지도 않는다. 이번 책에서도 계속 강조하는데, 선악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 채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이야기인 척 써내려 간 덕분에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글이 된다.


이번 책 <보여주기>은 역시나 동서고금의 다양한 인물들과 사건들 속에서 성공을 만들어낸 이들의 전략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렇게 시대와 공간이 왔다 갔다 해도 되나 싶을 정도다. 삼국지연의의 원소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이야기하는가 하면 모나리자 도난사건에 대한 썰을 풀다가, 선한 어그로의 최대치 능력을 보여주는 그레타 툰베리의 전략과 불리했던 판을 뒤집은 서울올림픽 유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니체의 제목 포장술과 쿠엔틴 타란티노의 훔치기, 히틀러와 빌게이츠의 거짓말, 워런 버핏의 원기옥 전략 등 기상천외한 성공의 전략들을 늘어놓는다.


성공에 대한 책이라니 자기계발서인가 싶지만,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진 않는다. 저자 또한 에필로그에서 원래 계획은 "안티 자기계발서"를 쓰는 거였다고 한다. 성공을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개인의 책임과 노력)으로 만들어버리는 자기계발서에 맞서 성공이 얼마나 우연적인 일인지 까발리고 싶었나 보다. 오후 작가는 쓰다 보니 비아냥과 교훈이 뒤죽박죽 된 잡탕 같은 책이 되었다고 자평하는데, 나는 뭐 오후 작가의 책에서 기대하는 재미를 충분히 느꼈으니 잡탕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랴. 애초에 좋은 책과 나쁜 책이 구분되는 게 아니라 좋은 독서와 나쁜 독서가 구분된다고 생각하는 바, 책이 가져야 하는 덕목은 재미고 교훈이나 의미는 독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다만 오후 작가의 팬으로 이 책을 보는 동시에, 사람들을 설득해 캠페인을 성공하는 전략을 찾고 싶은 마음 가득한 평화활동가의 입장으로도 이 책을 읽었다. 그러면서 몇 가지 성공의 특징을 발견한 거 같기도 하다.


우선 이 책에서 주로 다루는 것은 후발주자들의 성공 전략이다. 해골이 그려진 캔에 생수를 담아 판매한 리퀴드 데스 Liquid Death'가 취한 전략은, 이미 플라스틱병 생수가 장악한 시장에서 소수의 마니아층을 공략하는 거였다. 펑크 음악을 좋아하면서 환경문제에 관심 있는, 그러면서 소비를 통해 자신을 브랜딩 하고 싶은 이들에게 어필하는 방식으로 신규 사업체가 진입하기조차 어려운 생수시장에서 유의미한 입지를 확보했다고 한다. 먹고 마시는 것, 심지어 물에다가 'Death'라고 쓰고 해골을 그려넣다니 이걸 기발하다고 해야 할지 어이없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성공했다니 이들의 전략은 효과적이었다. 일본(나고야)에 대한 유럽인들의 거부감에 기대고 일본의 방식을 파고든 한국(서울)의 올림픽 유치전략, 무던한 사람인 척 굴다가 기회가 왔을 때 돌변해 경쟁자들을 뒤도 안 돌아보고 숙청한 삼국지 사마의부터 소련의 스탈린을 거쳐 현대의 시진핑이나 푸틴의 도광양회(韜光養晦) 전략이 대표적이다. 하긴 독보적 1위라면 대단한 전략이 필요하지 않겠지. 1위라는 포지션 자체가 이미 전략인 셈이다.


'성공하려면 이렇게 해라!'는 이야기 대신 성공의 우연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보니 이 책은 성공하는 이들의 노력이 아니라, 그들의 선택이 어떻게 성공으로 이어졌는지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한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 "새로움은 뛰어남보다 종종 더 중요하다. 특히 시장 후발주자들에게 더욱 그렇다. 산업에 늦게 뛰어든 후발주자들의 광고를 보면 1위인 타사 제품보다 더 뛰어난 성능, 더 뛰어난 맛 등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방식으로는 기존 제품을 앞지르기 어렵다."(198쪽)


이 문장을 곱씹어 보면 전쟁없는세상이 20년 동안 살아남은 배경도 이해가 된다. 물론 시민단체는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니며 상품을 판매하는 기업들이 타사와 경쟁하는 것과 같은 시장경쟁을 하지도 않지만, 20년 전 후발주자였던 전쟁없는세상이 열악한 재정적 여건과 평화운동이 척박한 사회적 분위기에서도 살아남은 건 분명 새로움 덕분인 거 같다. 전없세보다 더 뛰어난 활동을 하는 많은 단체들이 있고 그들 중에도 사라진 단체도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어설프고 처음에는 심각하게 어설펐지만 나름 새로운 단체였다. 새NEW 단체라는 게 아니라, 우리가 다루는 의제나 활동 방식이 사람들에게 신선했던 거 같다. 지금이야 새로운 맛이 없어졌지만 병역거부는 처음 등장했을 때 굉장히 센세이션 했고, 무기거래 감시 운동 또한 전없세 이전에 사회운동이 주목하지 않던 분야다. 방식에서도 우리는 트레이닝과 직접행동을 강조했는데 이는 전쟁없는세상의 선배 단체들과는 구분되는 면이었다. 그렇다면 이미 병역거부도, 무기거래감시도, 트레이닝과 직접행동도 새롭지 않은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어떤 전략이 필요할까? 여전히 우리를 후발주자로 놓고 새로운 아이템이나 형식을 찾아야 할까. 아니면 지금까지 전쟁없는세상이 일궈온 것들을 더욱 심화시키는 전략을 취해야 할까.


이 리뷰를 쓰면서 나는 출판사를 다니며 내가 찾은 나름의 설득법 중 하나로 솔직함을 이야기했는데, 사실 세속적인 성공은 솔직함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 때로는 기막힌 타이밍에 적절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성공의 핵심 전략이 되기도 한다. 거짓말이라고 해서 그게 뭐 1+1=5라는 수준으로 완전하게 거짓을 말하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대개의 거짓말은 참과 거짓이 교묘하게 뒤섞여 있다. 예컨대 커피믹스 시장의 80~90%를 독점한 맥심을 단 한 번 흔들었던 건 남양유업이 만든 '프렌치카페]였다고 한다.(150쪽) 이들이 밀었던 단 하나의 포인트 "프림에 화학적 합성품인 카제인나트륨 대신 우유를 넣었습니다."라는 광고문구 때문이었다고 오후 작가는 분석한다. 카제인나트륨이 특별한 게 아니고, 어떤 면에서는 우유보다도 더 좋은 물질이지만 인위적인 화학합성품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에 기댄, 마치 '맥심은 몸에 안 좋은 카제인나트륨을 넣었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전략으로 맥심에 상당한 타격을 주고 프렌치카페의 점유율은 20%를 넘었다고 한다. 카제인나트륨 대신 우유를 넣었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을 유도한 전략이니 솔직한 전략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오후 작가는 '우지 라면', '사카린 소주', '방부제 백신' 같은 사례를 살펴보며 세상의 성공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을 읽는 우리가 눈여겨볼 자세는 진실을 밝히는 쪽이 아니라 시장을 장악한 쪽의 것이다. 그리고 대중이 원한 길을 살펴봐야겠지"(158쪽). 물론 이윤 창출이 아니라 사회정의 실현이 목적인 시민단체에서는 진실을 밝히는 쪽을 아예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길이 세상을 어떻게 좌우하는지를 살피는 일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진실보다 거짓이 매력"(234쪽)적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매력적이기 위해 거짓을 행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성공적인 거짓말을 하고 싶다면 상대의 욕망에 올라타"면 "훨씬 쉽게 원하는 것을 쟁취할 수 있"(290쪽)지만 작가가 강조하듯이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성공의 기술이지 성공의 정치적, 도덕적 판단이 아니다. 정치적 도덕적 판단은 독자인 나의 몫이고 나는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 평화운동이 이루고자 하는 것이 거짓으로 세울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만 거짓이 왜, 어떻게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지며 사람들의 판단과 선택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이해하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책 읽고 난 뒤 내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진지한(?) 리뷰가 되어 버렸는데, 이 책은 그냥 재밌다. 오히려 이 책을 너무 진지하게, 그러니까 성공을 위한 교본처럼 읽어서는 안 될 거 같다. 성공의 우연성에 대해 쓰려다 실패한 책이니 말이다. 그냥 이런저런 재밌는 이야기와 에피소드들에 흠뻑 빠져 몇 시간을 유쾌하게 보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럼에도 또 하나의 교훈을 건져보자면, 오후 작가의 전략적 태도다. 오후 작가의 글이 유머가 가득할 수 있는 이유는 진지해야만 하고 솔직해야만 하는 지점까지 다가가지 않기 때문이다. 성공의 기술에 대해 이야기할 뿐 가치판단을 하지 않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성공의 기술에 대해서도 유쾌하게 써 내려갈 수 있다. 이게 단점이라는 게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이건 오후 작가의 커다란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쓰는 글이 정확히 무엇을 하기 위한 글인지 인지하고, 나름의 목적에 충실하게 써 내려간 글. 만약 오후 작가가 글 쓰는 사람들 특유의 정치적 도덕적 허세를 부리거나 그런 면에서 있어 보이려 했다면 이 책은 재미도 없고 어설픈 훈계나 늘어놓는 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오후 작가는 이 책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정하고, 그에 맞는 글을 쓰며, 나머지를 독자의 몫으로 남겼다. 부록 '책을 내는 가장 쉬운 방법'을 살펴보지 첫 책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 또한 이처럼 명확한 전략과 목적을 가지고 썼더라. 그러니 자신의 말마따나 무명의 백수가 책을 여러 권 낸 작가가 될 수 있었겠지. 허허실실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문체 뒤에 가려져 있지만 오후 작가의 진정한 능력은 어쩌면 전략가라는 점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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