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용석 Jun 07. 2024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

짧은 리뷰

20세기 초중반-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 해방 정국에 이르는 동안의 과학사를 인물과 사건중심으로 정리한 책이다.


흔히 과학사는 서구, 백인, 남성 중심으로 기술되는데 이 책은 그러한 과학사에 대해 "100년 전 우리 조선사람들도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대중강연을 통해 과학을 사회적으로 보급했다"고 외친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은 무기력하지 않았다. 국제적으로 폭넓은 행보를 보이며 당대의 흐름과 같이했다. 과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과학계의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였던 상대성이론을 소개한 선구자가 있었고, 조선 전역을 돌며 순회강연을 했던 젊은이도 있었다.(293쪽)


수학, 과학에 대한 전문 지식이 있다면 이 책에서 소개한 다양한 수학자/과학자들의 업적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런 전문지식이 없어도 무방하다. 저자는 방대한 정보를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이는 민태기 작가의 전작 <판타레이>(완독은 못했지만)에서도 느꼈던 바다. 과학지식과 정보에 대해 쉽고 재밌게 전달하는 능력은 대중과학서에서는 무척 중요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이 책을 20세기 초중반의 우리 과학사를 알기 위해 꼭 읽어야 할 책으로 추천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추천하지는 않을 거 같다. 아래와 같은 이유에서다.



엘리트 중심


대한제국 말기와 식민지 시기, 그리고 해방 직후까지 조선의 과학자들을 무리 지어 보여주는데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 중 하나는 그들의 다양한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도 함께 보여준다는 것이다. 또한 안창호, 서재필, 여운형, 이승만, 허헌, 임화처럼 수학이나 과학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조선인들의 수학/과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들도 중요하게 등장한다. 그리고 한 번의 독서로는 관계망을 다 그리기 어려울 정도로 이들 엘리트들 사이의 인연-지연, 학연, 혈연의 복잡한 관계도를 한하나 보여주는 것은 무척 흥미롭기도 한다.


망해가는 국가, 게다가 신분해방이 이루어지지 않은 나라에서 근대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이들은 소수의 엘리트 계층뿐이었다는 점에서 이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는 하지만 나는 이렇게 지나치게 엘리트 중심으로만 과학사를 정리한 것이 이 책의 아쉬운 점이라고 생각한다. 외국의 침략과 함께 들어온 근대 과학, 현대 물리학은 보통의 조선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식되었는지, 조선인들은 과학을 동경했는지 두려워했는지 무서워했는지 무시했는지, 하여간 과학이라는 신학문이 보통의 조선사람들의 삶과 일상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저자의 실력이면 충분히 다룰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성 중심


현대 물리학의 시작이 서구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이를 백인들만의 공적으로 치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역시나 백인이지만) 브레히트의 시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에서 몇 구절 빌리자면 젊은 알렉산더가 인도를 혼자 정벌하지 않았고, 만리장성의 완공에는 수많은 벽돌공이 있었던 것처럼, 현대물리학의 대단한 발견도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 혼자서만 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테니까. 무엇보다도 막대한 연구비를 필요로 하는 과학연구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에 대한 야만적인 착취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의심해 본다면 말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우리의 시선에서, 우리를 중심에 두고 서술한 과학사란 서구 중심의 과학사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분명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이 극복하고자 한 것은 '백인 중심의 서구'였을 뿐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반쪽의 과학사다. 이 책에 등장하는 중요 인물들은 대부분 남성이다. 지하련은 중요하게 다뤄지지만 예외적인 존재이며, 목차에 등장하는 이름들만 봐도-서재필, 안창호, 황진남, 우장춘, 이극로, 최규남, 이태규, 리승기, 여운형으로 모두 남성- 조선의 과학사에서 여성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당시 상황 때문에 수학이나 물리학을 제대로 공부한 여성이 없거나 드물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단순히 여자 이름 나오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게 아니다. 없는 이력을 만들어내거나 부족한 의미를 과대포장하라는 것도 아니다. 실제 역사가 그러하여 남성 과학자 중심으로 과학사를 기술하더라도 그에 대한 문제의식을 충분히 담을 수 있지만 그런 노력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실망스러운 것이다.



과학과 전쟁, 국가주의가 빚어낸 폭력에 대한 비판적 접근의 부재


과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기에 다시는 과학에 뒤처지지 않겠다고 다짐한, 현실 극복의 역사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누구보다 뜨거운 시대를 살았으며, 그들이 소개한 과학으로 우리는 식민지에서 벗어나고, 전쟁의 잿더미에서 불과 몇십 년 만에 선진국 대열에 올라서는, 세계사에 유례없는 기적을 보여준 것이다. 이 책은 시대의 아픔과 비극을 과학으로 극복하려 했던 분들의 이야기다.(293쪽)


과학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말이 나는 조금은 무섭게 느껴졌다. 물론 식민지를 벗어나야 하고, 구체제를 극복해야 하겠지만 그것이 과학의 주된 역할인가? 과학은 세계를 바꾸기는 목적이라기보다는 물질세계를 관찰하고 이해하기 위한 도구 아닌가? 물론 과학자에게는 사회적인, 국가적인, 민족적인 책무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그가 과학자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시민으로서 해야 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은 민족의 미래를 여는 열쇠이자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는 도구였지만, 이념은 우리를 분열시켰고,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를 공격하기도 하며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대립의 역사가 우리 과학에 남긴 상처는 컸다. (294쪽)


나는 여기서 저자가 과학을 이념과 대립시키는 방식이 무척 이해가 가지 않는다. 모든 과학은 그 과학이 발견되고 발전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조건 속에서 탄생하는 거 아닌가? 물론 물리학의 법칙은 1950년대 한반도에서든, 1914년 사라예보에서든, 뉴턴 시대의 영국에서든 똑같겠지만 과학이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고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는 그 과학이 태동하는 시대 및 공간과 크게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전례 없던 거대한 전쟁과 대량학살이라는 폭력의 세기 20세기에 전쟁은, 침략은, 수탈은 과학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 근대과학이 국가주의, 전쟁과 어떤 연관을 맺고 발전해 왔는지를 성찰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것이 아닐까?



대신 추천하고 싶은 책


보통은 좋았던 독서에 대해서만 리뷰를 남기지 비판하는 리뷰를 남기진 않는다. 책 쓴 저자, 만든 출판노동자들이 기울였을 노고를 생각하면 비판이 쉽지 않다. 더군다나 퀄리티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저자의 명민함에 감탄을 연발하는데 다만 세계관이나 시선이 달라서 내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라면, 비판은 더욱 조심스럽다. 내 의견이 맞다고 장담할 수 있겠다. 특히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분야라면, 저자가 나보다 훨씬 많이 알 테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리뷰를 쓴 까닭은 민태기 저자의 능력이 너무 대단하고, 책이 너무 재밌어서다. 그래서 나는 저자의 시선이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재밌는 글로 위험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했다.


20세기 초반 나라를 잃고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 사람들이 만난 현대물리학에 대한 조선의 과학사를 다룬 책이 하나 더 있다. 정인경 선생님이 쓴 <뉴턴의 무정한 세계>다. 나는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보다 이 책이 훨씬 더 많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고 생각한다. 재밌는 지식과 정보도 좋지만, "도대체 우리에게 과학은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왜 세계의 불평등에 분노하지 않는"지를 묻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과학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보여주기-세상을 내 편으로 삼는 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