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리뷰
내가 가장 재밌게 본 야구책은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이다. 아, 만화책은 빼고. 얼마 전에 이 책을 다시 볼 일이 있어서 책장을 여러 차례 훑었는데도 책이 보이지 않는다. 원래 책을 빌려주면 받을 생각을 별로 안 해서, 누구에게 무슨 책 빌려줬는지 모른다. 이 책도 내 책장에 없는 것을 보면 누군가를 빌려줬을 텐데... 어쩌겠나 필요하면 다시 사 봐야지. 다시 사보려고 온라인 서점에 들어갔는데, 김은식 작가의 새 야구책이 나온 게 아닌가. 제목부터가 '이건 네가 읽어야 하는 책이야'라고 나에게 말을 건네는 거 같았다. 도대체 우리는 왜 야구를 보는가?
머리말에서 김은식 작가는 이 책을 쓰게 된 과정을 설명한다. 한국사람들이 야구를 좋아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글을 쓰게 되었고, 어찌어찌 글을 마무리해서 넘겼지만 스스로 만족스럽지 않았던 모양이다. 야구는 다른 스포츠에 비해 룰이 복잡하고, 장비가 많이 필요하고, 경기장도 제약이 많고 하여간 대중적으로 확산되기 어려운데 왜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프로스포츠가 되었는지. 이 질문을 박사 과정 학위 논문 주제로 삼아 공부를 계속했다고 한다. 그 공부의 결과물이 이 책이다.
한국의 정치와 경제 변동을 중심축으로 삼아 사회 문화적 변화들을 추적해고, 그 배경 위에서 야구장 그라운드와 관중석에서 나타난 변화를 놓고 의미를 분석했다.(중략) 그렇게 거시적인 사회 변화와 야구장에서 나타난 극적인 승부들을 마주하면서 큼직한 흐름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소박하나마 맥락과 사건, 사회와 인물을 엮어 이야기를 풀어낼 준비를 할 수 있었다.(9쪽)
야구를 야구만으로 보는 게 아니라 경기장 바깥의 사회와 정치, 경제가 프로야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분석한 책이라니, 책의 주제부터가 너무 재밌어 보였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김은식 작가가 책의 제목이기도 한 "우리는 왜 야구를 좋아하는지"에 대한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박사 과정까지 갔다는 것. 나는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취미와 교양의 영역에서 하는 공부지 전문적인 연구자의 공부를 생각하진 않았다. 그런데 김은식 작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야구가 왜 인기 있는지 궁금해 박사 과정까지 했다는 게 아닌가. 물론 김은식 작가에게 야구 관련 글쓰기는 직업이기도 하겠지만, 나로서는 좋아하는 것을 공부하기 위해 박사과정까지 간다는 것이 대단해 보이기도 하고, 나 또한 좋아하는 것에 대해 글을 쓰는 걸 좋아하지만 그 글을 쓰려고 대학원까지는 못 가겠다는 생각도 들곤 했다.
때로는, 아니 많은 경우 책의 부제가 제목보다 더 정확하게, 그리고 자세하게 책 내용을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의 부제는 '24개의 질문으로 풀어본 한국 야구의 시작과 미래'. 한국 야구의 시작에 해당하는 '1부 한국인은 언제부터 야구를 보았을까?'와 시대적으로 이어지는 '2부 한국인은 언제부터 야구를 좋아했을까?'는 한국 야구의 역사적 시작을 추적한다. 일제강점기와 미군정을 거쳐 외부에서 들어온 야구라는 스포츠가 1960년대 실업야구와 1970년대 고교야구를 거쳐 한국 사회에 정착한 과정을 추적한다. 이 부분은 얼마 전 읽은 야구의 나라와 겹쳐 봐도 좋을 거 같다.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온 한국 사회 학벌 위주의 정치, 경제 엘리트들이 자연스럽게 야구에 익숙해진 것이 야구가 자리 잡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인식은 두 책이 공유하는데 몇몇 지점에서는 시선이 미묘하게 엇갈리기도 한다. 예컨대 <야구의 나라>에서는 박정희가 정치적으로 야구를 이용하는 몇 번의 이벤트 말고는 야구에 관심이 없었다고 이야기하는데, 이 책에서는 집권 초기 박정희가 의식적으로 야구와 가까운 모습을 보이려 했다고 말한다.
최고회의 의장 때는 스스로 "장훈과 백인천 선수의 팬"이라고 소개하기도 했고(경향신문, 1962년 6월 12일 자), 대통령 후보로 나선 1963년에는 부인 육영수가 신문 인터뷰에서 "가끔 남몰래 야구장에 가서 야구를 구경하는 것이 유일한 취미"라고 말하기도 했다(경향신문, 1963년 8월 20일 자)(77쪽)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전두환 정권과 프로야구 탄생에 관해서는 두 책의 시선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전두환 군사독재 정부가 국민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기 위해 펼친 일명 '3S정책'으로 프로야구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시각에 김은식 작가는 반대한다. 전두환 정권의 주도로 프로야구가 시작된 것은 사실이고 그런 만큼 전두환 정권의 역할이 존재했지만, 전두환 정권이 아니었대도 프로야구가 시작하기 위한 조건은 무르익어 있었다는 것이다. 1970년대 중반에 롯데 실업팀이 창단하고, 1976년 '한국 직업 야구 추진 위원회'가 발족해 프로야구 추진 실행계획을 이미 세웠던 만큼 이미 토대가 다져져 있었다는 것이다. 즉 전두환 덕분에 프로야구가 생긴 것이 아니라, "안보 위기와 경제 위기를 강조하고 과장하며, 비상 권력의 유지를 정당화하던 유신 체제에서 '함께 즐기며 시간을 보내는' 여가 소비문화의 상징인 프로 스포츠를 용납하기는 어려웠기 때문"(181쪽) 다시 말해 박정희 때문에 생기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김은식 작가의 주장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프로스포츠 리그가 제대로 굴러가기 어려운 상황에서 대기업들이 서슬 퍼런 군사독재 정권의 강압에 못 이겨 울며 겨자 먹기로 억지로 프로야구팀을 창단했다는 의견에도 김은식 작가는 반박한다. 기업들은 프로야구가 해볼 만한 사업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정부의 막대한 지원에 힘입어 중계방송 등으로 기업의 상당한 홍보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수치적으로도 당시 TV 방송 단가가 30초당 80만 원이었는데, "3개의 채널을 독점하던 두 방송국이 TV를 통해서만 각각 연간 200시간 안팎의 야구 경기를 중계방송했다고 추산할 수 있"(205쪽)다. 특히 "당시 대기업들은 정치권력과 유착해 성장해 왔다는 대중의 부정적 인식을 무마할 계기도 필요"(205쪽)했다는, 요새 말로 기업 브랜딩에 효과적이었다는 거다. 대기업들의 엄살과 다르게 실제로도 롯데와 MBC는 정부보다 먼저 프로야구단 창단을 추진하고 있었고, 삼미 또한 적극적이었으며, 삼성, 두산, 해태도 몇 가지 조건을 내걸었을 뿐이었다고 김은식 작가는 말한다. 한화의 경우는 천안북일고를 만드는 등 야구에 관심이 많았지만 프로야구 창단 시기가 기업 총수의 사망과 승계과정과 겹쳐 처음부터 합류하지 못했다고 한다.
전두환의 역할이 분명히 존재했지만 프로야구 시작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었다고 김은식 작가는 분명하게 못 박아 말한다. 처음 읽을 때는 흥미로운 견해였는데, 책에 소개된 여러 사례들과 주장을 접하면 접할수록 김은식 작가의 견해에 동의하게 된다.
또 한 가지 흥미로웠던 지점은 해태타이거즈 왕조 몰락 이후의 프로야구 변화에 대한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해태타이거즈가 마지막으로 우승을 한 1997년을 기점으로 한국 사회가 크게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연구하거나 분석한 것은 아니지만, 쉽게 말해 개천에서 용 나던 시대가 끝나고 거대 자본의 기획력이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노래 잘하거나 곡을 잘 쓰는 음악인이 혜성처럼 등장해 대중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면, 1997년을 전후한 시대 이후에는 거대 기획사에서 자본을 투자해 기획하고 마케팅하는 아이돌이 음악 시장을 접수했다. 야구도 마찬가지로 1997년 해태타이거즈의 마지막 우승 이후로 가난한 팀이 우승하는 시대가 끝났다. 부자라고, 돈 많이 쓴다고 다 한국시리즈 우승하는 건 아니지만 예전처럼 돈 없어도 우승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난 것이다.
김은식 작가는 가난한 왕조 해태타이거즈의 몰락을 제도적인, 산업적인 측면에서 접근한다. 한국 프로야구의 시스템이 돈 많은 구단이 좋은 전력을 갖추는 것을, 다시 말해 잘하는 선수들을 거액의 몸값을 지불해 싹쓸이하는 것을 막는 방식으로 기능했는데 그것이 몇 가지 계기로 무력화되었다고 분석한다. 예컨대 IMF의 여파로 해태와 쌍방울이 부도가 나면서, 모기업 지원이 불가능한 두 구단이 리그에 참여해 경기를 이어갈 수 있도록 그전까지는 허락하지 않았던 현금 트레이드를 인정했고, 핵심 선수를 판 두 팀은 하위권을 전전하다 매각되거나 해체된 반면 두 팀의 핵심 선수를 구매한 삼성과 현대는 우승팀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1998년부터 시작된 외국인 선수 선발 또한 부자 구단이 더 좋은 선수를 데려오는 데 날개를 달아주었고, FA 제도의 시작 또한 부자 구단이 더 좋은 전력을 갖추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난한 구단 해태가 우승할 수 있었던 시대는 끝났다는 이야기다.
물론 선수들이 구단의 소유물로만 존재했던 과거 프로야구를 낭만화해서 볼 이유는 없다. 그리고 한국 프로야구에서 더 이상 해태 같은 구단이 나올 수는 없지만, 미국이나 일본과 비교했을 때 한국 프로야구는 부자 구단의 독과점이 그리 심하다고는 볼 수 없다. 이 이야기는 책과는 상관없는 이야기기도 하고, 이제 오늘의 야구 중계가 시작되었으니 황급하게 글을 마무리하고, 저녁 먹으면서 야구를 보자. 오늘은 김도영이 홈런 치고 도루도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