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리뷰
시인이나 소설가들이 쓴 에세이를 잘 읽지 않는다. 편견일 수도 있는데 시인이나 소설가들의 에세이는 유려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뽐내는 책이 많은데 내가 에세이에서 얻고 싶어 하는 것은 글 잘 쓰는 사람들의 미학적인 문장보다는 삶과 밀착한 사유가 담긴 통찰이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에세이는 주로 직업인들이 자신의 직업에 대해 쓴 글, 혹은 서경식이나 프리모 레비, 조지오웰처럼 굉장히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이슈를 다루는 글들이다.
김초엽 작가는 지금까지 두 편의 에세이를 냈는데 둘 다 여느 소설가(혹은 시인)의 에세이와는 느낌이 달랐다. 예술가로서가 아니라 생활인으로 쓴 에세이 같은 느낌이랄까. <책과 우연들>에서는 책을 좋아하는 독자이자 (예술가로서가 아니라 글 쓰는 노동자로서) 소설가의 일상을 담았는데, 전체적으로 취미로도 일로도 책을 곁에 두는 삶을 사는 사람이 쓴 독서 에세이 느낌이었다. 이번 책 <아무튼 SF 게임>에서는 그야말로 한 '게이머'의 게임 분투기이자 게임에 대한 애정고백서다. 게임에 대한 사랑과 게임을 통과해 온 자신의 인생 여정과 게임 플레이의 재미와 고뇌를 두루 담겨 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두 편의 에세이 가운데 굳이 더 좋은 것을 고르라면 나는 <책과 우연들>이다. 그것은 순전히 게임보다는 책을 좋아하는 내 성향에 따른 것일 뿐, <아무튼 SF게임>도 무척 재밌게 읽었다. 그리고 어떤 지점에서는, 평화활동가로서 나에게 생각할 거리가 더 많은 책이기도 했다.
순발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은 나는 오락실을 좋아하지 않았다. 동네 아이들이 스트리트파이터2로 몰려갈 때도 100원짜리 하나로 1분도 못 버티는 게임을 할 만큼 주머니가 넉넉하지 않았다. 어쩌다 친구들과 오락실을 가게 되면 주로 1945 같은 비행기 슈팅 게임을 했는데 그것도 그다지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아빠가 가정용 콘솔 게임기를 사주셨다. 슈퍼콤이라는 이름이었는데, 해태전자에서 만든 게임기로 사실상 닌텐도에서 만든 패미콤과 같은 게임기였다. 그러다 중학생 때는 컴퓨터 게임을 많이 했는데 실시간으로 컨트롤을 빠르게 하지 않아도 되는 삼국지, 영걸전, 대항해시대, 프린세스메이커, 심시티 같은 게임을 좋아했다. 고등학생 때 스타크래프트가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그때는 밖에서 축구하고 농구하는 게 더 재밌어서 딱히 게임을 하지 않다가 대학에 가서 친구들과 대화에 낄 수 없어서 스타크래프트를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전쟁없는세상 활동을 하면서는 주변에 함께 즐기는 사람이 줄어들어 자연스럽게 비디오 게임과 멀어졌다. 그러다 보니 이 책에 나온 게임 중에 아는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스타듀 밸리와 디스 워 오브 마인만 플레이를 해봤고 그나마 이름이라도 들어본 것은 폴아웃, 엑스컴, GTO 정도. 만약 보드게임도 폭넓게 다뤘다면 그래도 해본 게임이 제법 있었겠지만 불행히도, 김초엽 작가는 보드게임도 많이 하는 거 같지만 안타깝게도 이 책에서는 SF 테마 보드게임을 다루진 않는다.
잘 모르는 게임 투성이지만 재밌게 읽을 수 있었는데, 그 까닭은 게임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다가갈 수 있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 보면 김초엽 작가가 얼마나 게임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고, 하지만 나는 그만큼 게임을 좋아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는 게임이라는 매체의 특성과 연결되는데, 김초엽 작가가 말하는 게임이라는 매체의 특성은 '플레이', 바로 행위성이다. 소설이나 영화가 창작자가 펼쳐놓은 가상 세계를 따라가는 것과 달리 게임은 게이머가 게임에 직접적으로 게임에 직접적으로 개입한다는 것이다. 독자와 영화관객은 작품 속 세계에 아무 영향을 끼칠 수 없지만 게이머의 행위는 게임이 구현한 가상의 세계에 영향을 끼친다. 김초엽 작가는 이때 발생하는 다양한 고민지점들-'게임 속에서 우리의 선택은 과연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선택인가, 게임에서 재편하는 폭력을 행위한다는 것은 게이머에게 어떤 의미인가, 게임이 구현한 가상세계에서 체험은 현실의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와 같은 어려운 질문에 스스로를 던지기도 한다. 이 책이 가볍기만 한 에세이에 머물지 않는 까닭은 소재가 굉장히 마이너 한 소재이고, 김초엽 작가의 글이 늘 그렇듯 마이너리티에 대한 기본적인 사유를 품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게임에 대한 이러한 묵직한 질문을 품고 있어서기도 하다. 덕분에 아무튼 시리즈 중에서도 독특함을 뽐낸다. (물론 내가 아무튼 시리즈를 다 읽어본 것은 아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게임평은 디스코 엘리시움이다. 나는 이 게임을 해본 적도, 본 적도 없어서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이 게임에 등장하는 서브 퀘스트에 대한 이야기인데, "너무나 무력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선택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종말론이 뒤덮은 사상의 폐허 같은 이 세계에서" "우스꽝스러운 이상을 뒤쫓는" 노부부에 대한 퀘스트. 평생을 스스로 믿고 있는 미확인 희귀 동물을 쫓아다니는 이 노부부는 "체념과 패배주의가 지배하는 작중의 도시에서 유일하게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작가는 평한다. 나는 이 구절을 읽을 때 어쩐지 이 노부부가 평화활동가들처럼 느껴졌다. 거대한 전쟁과 폭력이 휩쓴 세상에서, 전쟁으로 돈 버는 것 말고는 더 이상 인류의 진보나 번영 같은 희망을 느낄 수 없이 냉소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그래도 시민들의 힘으로 전쟁을 우리가 멈출 수 있다고 희망을 잃지 않은 채 끈질기게 말하는 평화운동 말이다. 디스코 엘리시움은 이것에 대해 판단하지 않고 다만 게이머들에게 선택지를 줄 뿐이라고 김초엽 작가는 말한다. 하지만 "플레이어가 이상을 좇는 이들의 편을 잠깐이라도 들어준다면 어떤 일이 일어난다. 그 일은 세계를 바꾸지 않는다. 하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해리와 플레이어의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바꾼다."며 "개인은 도저히 바꿀 수 없어 보이는, 체념과 무력감으로 가득한 세계에서도 누군가는 불가능한 이상을 좇아"가고 "그것을 목격한 이들이 있다면 이후의 세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나는 이 말에 살짝 뭉클했다. 사회운동은 원래 아주 긴 호흡이 필요하고, 사회변화는 천천히 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활동가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과연 잘 되고 있는지 자신이 없고 무력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김초엽 작가의 말처럼, 지금 당장 세계를 바꾸지 못하더라도 누군가의 마음속에 무언가를 바꾼다면 그것 또한 사회운동의 중요한 역할이 아닐까. 이 책을 활동가들이 읽는다면 아마도 이 대목에서 나와 같은 뭉클한 위로를 느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평화활동가인 나에게 가장 유용하며 고민거리를 던져준 챕터는 역시 '전쟁 게임 즐기는 평화주의자'다. 조만간(아마 다음 주에 인쇄를 하는 거 같은데) 출간될 예정인 책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에서 나는 '전쟁 게임 하면 폭력적인 사람이 되나요?'라는 제목으로 이와 비슷한 주제를 다뤘는데, 나는 여기에 대해 나름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지만 그걸 설득력 있게 펼쳐내지 못하면서 내 주장만 강하게 주장한 느낌이 원고를 다 쓴 뒤에도 떠나질 않아 언짢았다. 본격 게이머가 아닌지라 사실상 수박 겉핥기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런데 김초엽 작가는 본격 게이머인 데다가 이 챕터를 쓰기 위해 공부도 많이 해서(나는 뭘 공부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왜 그런 꼭지를 넣었냐고? 그러게.. 욕심이 앞섰다) 이야기가 아주 풍성하다. 특히 어떤 가치판단을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고, 이와 관련한 여러 논의를 소개하는데 특히 두 가지가 인상 깊었다.
첫 번째로 모건 릭이라는 사람이 말한 '악행의 중대성(graveness)'이라는 개념이다. 살인은 아주 중한 범죄지만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가 살인을 저지른다고 문제가 되진 않는다. 반면 아동 성폭행을 하는 게임이 있다면 그 게임은 사회적인 비난에 직면할 거고 많은 게이머들도 비판할 것이다.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이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바로 '악행의 중대성'이라는 개념인데 김초엽 작가는 이렇게 정리한다. "어떤 악행은 다른 악행보다 더 사회적 억압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 악행을 통해 조직적으로 이익을 얻은 사람들이 저질렀기 때문에 더 '중대하게' 여겨지는데, 이 중대성이 충분한 경우 그 행위는 가상의 악행이어도 가볍게 취급할 수 없어 금지 대상이 된다." 이 개념이 흥미로웠던 까닭은 전쟁 게임과 평화주의자의 딜레마에서, 더 확장하자면 사회운동이 도덕적 입장에만 매몰되지 않고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선택과 판단을 도모해야 하는 순간에 판단을 위한 어떤 기준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넘치는 악행들에서 우리가 더 시급하고 더 중요하게 맞서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더 시급한, 더 중요한' 것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정치적인 행위이고 정답이 있을 수 없는 복잡행 행위지만, 그 이전에 우리는 판단 자체를 회피해버리기도 하니까. 도덕이 회피의 핑계가 될 때 우리는 입으로만 악행을 욕하지 그것을 막지 못한다.
두 번째로 흥미로운 개념은 '루도내러티브 부조화(ludonarrative dissonance)'였다. '루도내러티브 부조화'가 무엇인지는 김초엽 작가의 설명을 다시 빌리자. "게임이 전쟁이나 폭력에 대한 비판 의식을 담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플레이어가 전쟁이나 폭력을 즐기게 만들기 때문에, 플레이(루도)와 주제(내러티브)가 서로 상충하는 것"이다. 김초엽 작가는 이에 대해 "루도내러티브 부조화를 직면하고 이용하는 것 역시 게임이 선택할 수 있는 한 가지 길이 아닐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게임의 본질인 재미를 추구하면서도 재미를 둘러싼 허구에 질문을 던질 수 있고, "재미와 질문 사이에서 부조화가 발생하더라도 그 부조화마저도 다음 질문의 출발점으로 삼는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냐는 것이다. 나는 질문을 이어가는 이 방식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야 말로 평화가 만드는 언어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전쟁이나 폭력이 정해진 하나의 답을 강요한다면, 평화는 전쟁의 답 대신 다른 답을 찾는 게 아니라 전쟁이 강요하는 정답과 오답이라는 이분법의 세계에 균열을 내는 질문 던지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런 생각과 묘하게 맞닿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전쟁 게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질문하는 힘, 같은 느낌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