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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Aug 26. 2024

단거리 선수가 아니라 마라토너 같은 호흡으로

나동혁 인터뷰 

        

20년 전, 병역거부운동이 한국사회에서 막 시작될 때 병역거부를 한 사람과 대체복무제가 도입된 2024년 병역거부를 하는 사람을 인터뷰하자고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나동혁이었다. 그를 떠올린 까닭은 그가 다른 초창기 병역거부자들에 비해 비교적 전쟁없는세상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병역거부선언 이후에도 병역거부운동에 직접 참여하거나 근거리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에 병역거부운동이 해온 고민의 궤적을 잘 알고 있다. 가장 연락하기 편한 병역거부자라는 점도 컸다. 그는 20년 전 전쟁없는세상을 함께 만든 동료였고, 개인적으로는 같은 학생운동 그룹에서 활동한 학생운동의 선배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인터뷰를 시작할 때는 높임말을 썼지만 자연스럽게 어느 순간부터 둘 다 편하게 말을 했다. 지나치게 사적인 관계로 보일 것이 우려스럽기도 하지만 대화의 온도를 잘 보여주기 위해 최대한 말한 그대로 정리했다. 인터뷰는 6월 25일 우리동네나무그늘 협동조합이 운영하는 커피숍 SCC에서 진행했다. 이 인터뷰는 '변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지원으로 진행되었고, 전쟁없는세상 블로그에도 실렸으며 변화를 만드는 사람들 홈페이지에 좀 더 짧은 버전이 실렸다.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2002년 9월 12일에 병무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며 병역거부 선언을 한 나동혁이라고 합니다. 지금 가장 큰 정체성은 학원 강사 그리고 마포구 거주하는 주민입니다.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보통 저 같은 경우는 사는 곳을 넣지 않거든요. 잠만 자고 나오니까요 마포구 주민이라는 소개가 인상 깊습니다.      


저도 이제 동네에서 지역 협동조합 이사장을 하고 있는데, 그러면서 지역 주민으로 정체성이 생겼죠. ‘우리동네 나무그늘 협동조합(이하 나무그늘)’ 자체가 지역 기반의 커뮤니티 아닙니까? 그럼 당연히 이제 지역성이라는 게, 로컬리티라는 게 형성되죠. 정체성이 생겼죠.


나무그늘은 지역 기반의 진보적 커뮤니티인데 만들어진 지 벌써 12년 됐어요. 이게 그러다 보니까 계속 성격이 바뀌고 있는데 이제 옛날에는 진보정당을 기반으로 한, 좀 전통적인 그런 지역 커뮤니티죠. 예를 들면 동네 커뮤니티 만들어 소모임도 만들고 막 육아 모임도 만들고 막 해가지고 활성화된 동네 축제도 만들고 그러고 나서 이제 중요 인물이 선거에 출마를 하는 방식이었죠. 예전에는 구의원 선거에 나가서 거의 당선 직전까지 갔다고 들었어요.


최근에는 그런 목표의식은 이제 좀 사라진 것 같고, 그래서 지역성이 조금 희미해지긴 했어요. 옛날에는 염리동, 대흥동 기반이었는데 이게 (성산동으로) 이사를 오면서 더 그런 것도 있고, 또 이제 젊은 조합원들이 엄청 많이 들어오고 있는데 젊은 조합원들은 상대적으로 그런 의식이 약해요. 왜냐하면 정주할 조건이, 사회 경제적 조건이 안 되다 보니까 기본적으로 이 동네에 오래 머무를 수 있을 거다, 그런 생각을 잘 안 해요. 그러니까 이제 계속 단체의 성격이 바뀌긴 하죠.


그래서 요즘은 지역 기반의 커뮤니티다라고만 말하기는 좀 애매하긴 한데 어쨌든 뭐 그런 성격이 반쯤 있는 것 같고, 나머지 반은 요즘 다 사회적으로도 가장 쟁점이 되는 운동들, 퀴어, 비건, 노동, 이런 전반적인 문제에 대한 감수성이 좀 예민한 집단이라고 해야 되나, 뭐라고 해야 되나? 그런 사람들이죠. 그런 사람들도 이제 지역에서 좀 숨 쉴 공간이 필요하고 마음 편히 놓고 모여서 떠들고 뭘 도모하고. 이번 주에도 동네 퀴어위크를 했는데 동네에서 이런 거 하는 데 여기가 유일할걸요? 우리가 어떤 사회를 바꾸는 데 관심이 있는 거를 지역으로 가져와서 지역에서 하는 거죠.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중앙 정치 중앙운동의 이슈들을 지역에서 풀어내는 협동조합이네요?   

  

그런 것도 있고 지역의 고유한 이슈도 있어요. 지금은 소각장, 뭐 예를 들면 그런 거 늘 있죠. 옛날에는 여기 성미산 마을이 공동육아로 출발했다 그러더라고. 그래서 공동육아부터 시작해서 성미산 개발에 맞서서 싸우는 그런 활동도 많이 하셨던 것 같고. 여기 대안학교도 있잖아 그런 거는 진짜 완전히 생활 기반이야. 그러니까 어차피 사회를 바꾸는 활동이라는 게 되게 자기 삶과 밀접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는데 노동조합은 직장에서 그걸 바꾸기 위한 싸움이라면 이런 거는 우리 일상생활 주거 공간, 삶의 영역에서 그런 걸 바꾸기 위한 노력을 하는 거죠. 직장에 가면 노동조합이 있고, 동네로 돌아와서 집에 오면 동네 협동조합이 있고, 이런 식으로 이제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삶의 모든 영역을 이제 진보적으로 재구성하는 거죠.   

   

원래 이런 지역 운동에 관심이 있었던 거예요?     


원래는 아니죠. 원래는 진보정당 활동을 하고 싶었던 거고, 근데 하려고 보니까 지역성이라는 거는 거의 너무 필수고 그래서 이제 이사를 올 때 마포로 온 거예요. 나도 여기 오래 살다 보니까 그런 마인드가 이제 좀 생겼죠.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노력한 거라면 지금은 이제 자연스럽게 됐지. 여기 오래 살다 보니까, 오래 살고 관계망이 생기고, 이게 공간도 있고, 사람들하고 이제 이것저것 하다 보니까.


학원 강사를 하다가 40살에 관두고는 지역 당협위원장까지 했고 한때 출마 결심까지 했어요. 열심히 했으나 이제 그것도 잘 안 됐죠. 그때 제가 진보신당 노동당 당원이었는데 당 자체에 대해서 이제 비전이 없다고 판단을 해서 탈당을 하고 당 활동을 접었죠. 지금은 그냥 지금 이중당적입니다. 녹색당과 정의당 당원이에요. 이거 불법이라는데 저는 이중 당적을 합법적으로 허용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밝히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국의 진보정당이 연합정당 노선으로 가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번 선거(22대 총선) 때도 그래서 녹색정의당 지지했어요.    


2003년 5월 15일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 이스라엘 대사관 앞 기자회견장

 

병역거부 이야기를 해보죠. 언제 어떻게 병역거부를 했죠?     


2002년 9월 12일이 입영일이었죠. 그래서 병무청 앞에서 입영을 안 하겠다 하는 퍼포먼스 성격의 기자회견을 한 거죠. 사실 내가 평화주의자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그냥 좀 나는 사람이 그런 것 같아. 항상 어떤 문제가 생기면 ‘나는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일까?’ 항상 이렇게 질문을 던지는 스타일의 사람인 것 같아. 옛날에 그랬다잖아. 옛날에 80~90년대 운동권들은 늘 ‘내가 광주에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뭐 이런 질문을 달고 살았다며. 그런 것처럼 나의 문제로 소급해서 생각하는 습관은 늘 있었던 것 같아. 그러니까 나는 내가 저런 걸 지지하고 하고를 떠나서 나는 어디까지 행동할 수 있을까 약간 그런 걸로 고민은 했던 것 같아요.     


2002년이면 그때가 911 테러 일어나고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침공하고 이제 이라크를 곧 침공할 거라고 다들 이야기하고, 전 세계가 전쟁으로 휘몰아치는 이런 상황들이 영향이 있었던 걸까요? 

     

사실 그때로 돌아가서 그때 내 심정을 생각해 보면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요. 근데 그런 전반적인 분위기 속에서, 그러니까 반전평화운동 뭐 이런 게 일어나는 속에서, 또 우리 조직이 그걸 엄청 열심히 하는 속에서, 마침 또 이제 군대 갈 때도 가까워오니까 ‘나는 뭐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라고 좀 되게 가볍게 생각했던 것 같아. 왜냐하면 운동하면서 감옥에 한두 번 갈 수 있다고 늘 생각해서인지 군대 가는 것보다 감옥 가는 게 그냥 나한테도 떳떳하게 느껴졌고. 그러니까 ‘꼭 엄청 평화주의자가 아니라도 크게 상관없지 않나?’, 그리고 군대 가서 그 짜증 나는 애들 명령 들어가면서 살기도 싫고. 막 약간 그런 생각이 되게 강했던 것 같아요. 나는 진짜 평화주의자인가 이런 식의 질문을 그렇게 많이 던진 것 같지도 않아. 그건 오히려 결심하고 나서, 이제 하도 외부 공격을 많이 받으니까 그때 막 자꾸 자문해 보게 됐던 거지. 

     

그러면 사실 결심할 때까지는 큰 어려움이나 이런 게 없었겠네요.    

 

아예 없진 않았지만 그렇게 어렵진 않았어. 다만 오히려 그런 것보다도 나는 그 당시에 이게 어떻게 이 운동을 끌 고 나가야 되나... 학생운동 조직에서 먼저 병역거부를 준비한 친구가 있었는데 내가 갑자기 입영영장이 먼저 나오면서 병역거부도 먼저 하게 그렇게 돼 버렸잖아. 그러면서 이제 그런 생각이 진짜 많았던 것 같고. 


2002년 9월에 선언하고 그때 12월에는 구치소에 있었어. 1심에서 유죄 판결이 났고 법정 구속됐고 근데 2심에서 보석으로 나온 거거든 2003년 3월쯤에. 근데 그 몇 달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있는 거야. 나 빵에 있을 동안 대통령 선거 치르고 조직은 박살 나고, 재판이 늘어지면서 언제 다시 재개될지 모르니까 신분이 계속 불안정하고, 막 오만 것들이 겹치면서 진짜 사실 병역거부 때문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이 쓰나미처럼 한 번에 밀려오면서 약간 인간이 맛이 갔어, 그때부터 맛이 가기 시작한 것 같아. 사실 감옥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평온했어 굉장히, 오히려 2002년에 그 결심하고 감옥 갈 때 힘든 게 아니라 2003년 (보석으로) 나와 있는 그 해가 정말 최악의 한 해였죠 내 인생.      


병역거부할 때 전과자가 되는 건데, 밥 벌어먹고 살 걱정은 전혀 없었어요?    

 

그건 솔직히 학력이 주는 그게 있었던 것 같아. 그러니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무의식 중에도 그런 불안감이 없었어. 그게 내가 막 얘기하지 않아도 누구한테 얘기하지 않아도 무의식 중에 나도 깔려 있는 것 같아. 서울대 수학과를 나왔는데 뭔들 해서 못 벌어먹고살겠냐. 


그리고 그때는 진짜로 육체노동으로 먹고 살 생각도 했어. 학원 강사 같은 건 생각 못 했고 그다음에 뭐 졸업할지 말지도 맨날 오락가락하던 때니까. 그냥 뭐 그렇지. 뭐 몸 써서라도 못 먹고살겠나, 뭐 그런 생각은 그때는 막연히 했던 것 같아요.     


일반적으로 언론에 비치는 병역거부자들 모습은 굉장히 엄청나게 평화주의자고 착하고 그래서 감옥 가는 게 너무나 안쓰럽고 그런데, 그런 모습과는 좀 다르네요.   

    

근데 그때 생각해 보면 나도 그렇고 오태양도 그렇고 유호근도 그렇고 사실 다 조직운동 출신이잖아. 그래서 다 그런 성향은 좀 있었던 것 같아. 항상, 그러니까 내가 감옥에 가는 게 두렵고 이런 것보다는 이 운동으로 인해서 이제 사회적으로 어떤 변화를 가져올 거냐, 사회적으로 이걸 어필하고 설득하기 위해서 어떤 이제 전략을 짤 거냐, 그런 걸 되게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아요. 나도 그런 자장 안에 있었던 것 같고 그러니까 그게 2003년에 (조직이 갈라졌을 때) 그렇게 힘들어했겠지.  

   

병역거부는 굉장히 개인적인 양심에 기반한 행동인데 초기 병역거부자들은 지금 병역거부자들이 보기에는 되게 조직적인 인간으로 보여요.     


조직적이거나 아니면 이념적이지 어떤 의미에서. 처음부터 평화주의자였다기보다는.. 그렇잖아. 오태양도 그렇고 유호근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냥 자기 활동을 하다가 약간 전략적으로 병역거부를 판단한 느낌이 있니 않나? 그래서 기존의 운동의 어떤 언어가 계속 영향을 미치는 거지. 그런데 상호작용이지 사실은. 병역거부를 하고 나서는 나도 엄청 바뀌었으니까, 그 사람들도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     

 

더 구체적으로 밀해주세요. 어떤 면에서 어떻게 바뀌었나요?   

  

이건 그때 시간은 너무 생생해. 그러니까 (병역거부 선언을 한) 2002년은 오히려 그냥 약간 막연한 느낌인데 2003년, 2004년은 지금도 막 이렇게 생각을 하면 그때 감각이 막 느껴질 정도야. 그러니까 너무 괴로운데, 지이인~짜 혼자 생각할 시간이 많았던 것 같아. 혼자 고민하고...  진짜 ‘모든 거는 나 혼자 해결해야 되는구나.’ 그러니까 이게 나쁜 의미가 아니라 내 삶의 문제, 내 어떤 인생의 중요한 문제는 결국은 내가 중심을 잡고 나가는 수밖에 없겠구나. 


나는 운동할 때 남들이 어렵다고 하는 걸 늘 쉽게 쉽게 하니까. 그래서 되게 인정도 많이 받았어. 항상 쾌활하고 낙천적이고 되게 두려운 상황에서도 항상 애가 막 이렇게 웃으면서 활동을 하고, 사람들도 잘 끌어들이고, 이러니까. 나는 그게 정말 내 모습이라고 생각했었어. 근데 이게 엄청 진짜 바닥까지 떨어져서 혼자 계속 있어 보니까 ‘아, 이거 아니었구나. 이것은... 진정한 내 모습이 아니어서... 그것도 내 모습이지만 조직을 빼놓고는 이게 설명할 수 없는 내 모습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지. 그러면서 하여튼 그 지독하게 되게 혼자 있던 시간들이 도움이 많이 된 것 같아요. 그때에 많이 바뀌었지. 나도 사람이 바뀐다는 말 잘 안 믿지만 진짜 극한의 외로움과 고통에 빠지면 바뀔 수도 있구나..    

 

다시 2004년에 구속되었을 때는 오히려 마음 편했겠네요?  

   

늘 얘기하지만 엄청 마음 편했고, “제발 빨리 감옥 보내주세요.”(웃음) 맨날 그랬지만 그리고 하여튼 그렇게 힘든 시간 동안 주위 사람들한테 어쨌든 민폐를 많이 끼쳤잖아. 그리고 되게 부끄러운 모습도 많이 보이고. 근데 그게 나는 그런 것도 되게 힘들었던 것 같아. 그러니까 내가 되게 스스로 유능한 활동가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 힘든 모습들을 너무 노출을 많이 시키니까. 막 그런 게 되게 창피하고 그럴 때가 있었지 지워버리고 싶고. 막 외롭고 힘들고 쪽팔리기도 하고 막 그래서 감옥 가서, 그래서 내가 연락도 잘 안 하고 사람들한테 좀 막 그랬잖아. 기억하지? 보통 병역거부자들하고는 다르게 후원회도 만들지 말아라 그러고, 사람들한테 영치금 넣어달라, 면회와 달라, 뭐 이런 얘기도 거의 안 했던 것 같고.


그래서 나는 진짜 그 안에서 마음이 편했고,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진짜 그렇게 좀 조용하게 시간을 보내면서 약간 생각을 많이 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나가면 이제 새 삶을 살고 싶다. 그리고 부끄러운 모습이나 이런 것도 자연스럽게 그 시간 동안 희석되잖아. 그리고 사람들이 “아효 저 새끼 좀 찌질했지만 그래도 가서 고생하는데” 그러고 “저 정도면 뭐 나름 반성한 것 같네” 이러고 약간 그런 느낌으로 살려고 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많이 변하고 이런 게 어떤 평화주의적인 이걸 받아들여서라기보다는 개인적인 경험? 아픔? 이런 것들 덕분에 변한 거 같네요.   

  

그런데 평화주의가 주는 어떤 그런 언어들이 그걸 극복하는 데 도움을 진짜 많이 줬지. 특히 예를 들면 관계 맺는 방식이라든지, 소통하는 법. 그러니까 위계 없이 사람을 대하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절대 위계에 의해서 뭘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 라이프 스타일도 많이 바뀌었고. 그때 생긴 습관으로 인해서 어쨌든 생활 자체가 되게 달라졌어. 몸에 밴 습이 엄청 많잖아. 자전거로 출퇴근하고 지금까지도. 자동차 안 쓰는 것도 그런 영향이 클 거고, 그다음에 어쨌든 소비를 거의 안 하고 사는 것도 그렇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보는 법을 많이 연습 진짜 많이 배웠던 것 같아. 이게 그동안 너무 운동 방식이 거칠다 보니까 스스로도 이게 굉장히 자신을 갉아먹는 방식이었구나. 그런 생각을 좀 많이 했지.    


2024년 봄, 자전거 여행. 군산. 

 

출소하고 나서는 무엇을 했나요?     


2005년 10월 출소해서 다시 학교 다녔지. 나올 때는 이미 마음 정리가 다 됐지. 졸업하자. 그리고 졸업하면 돈 벌자. 4학년 거의 후반부에는 학교 다니면서 학원 강사 시작했고... 그래서 졸업하려고 했는데, 니들이 유럽 여행 가자고 그래서 또 한 학기 미뤄지고... 잘했지. 그것도 어쨌든 지금의 어떤 라이프 스타일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어떤 삶의 원형을 만들어줬어. 이제 그때부터 직장생활 하면서도 혼자 자전거 여행 다니고, 스스로 멘탈 관리를 너무 잘하는 거지. 그래서 강사 한 10년 동안 올인 하면서도 이 마음이 좀처럼 잘 동요하거나 큰 파고가 없었던 것 같아. 그때 엄청 잘 극복해서, 나름대로 잘 정립을 한 덕분에 30대 내내 평온했어.    

  

그렇게 학원에서 10년 돈 벌고 마흔에 다시 돌아온 건가요?    

 

왜냐하면 뭐 학원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그러면 뭐 이제 생활 공간에서라도 조금이라도 뭐 이런...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하자. 진보정당 하면서 이제, 지역은 사실 진보정당을 위한 수단이었지, 처음에는. 근데 지금은 이제 진보정당을 때려치고. 진보정당 때려칠 때도 많이 힘들었어. 그 예상한 시나리오가 아니잖아. 당협위원장 하다가 이제 뭐 당내 비선 조직 사태 터지고, 뭐 하고, 뭐 하고, 이제 이제 더 이상 못 해먹겠다, 이러고 나올 때가 있었는데 그때 좀 힘들었지. 


그래서 그때도 좀 힘들었는데 많이. 다행인 거는 2002년, 2003년의 경험이 있어 가지고 그때를 많이 생각했어. 그때 내가 진짜 힘들 때 어떻게 그걸 이겨냈는지를... 제일 많이 생각했던 게 어차피 이 시간은 지나가는데 옛날처럼 쪽팔린 짓 하지 말자. 그래 가지고 엄청 잘 이렇게 컨트롤했던 것 같아. 그나마 남들이 볼 때는. 혼자서는 존나 힘들어했지만 티 안 내고, 조용히 잘. 혼자 감당해야 된다. 이거를 막 되게 숙명처럼 받아들이면서. 여기저기 찌질한 짓 하고 다니지 말자.    

 

근데 약간 병역거부자들이 대부분... 감옥 경험이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든지 몰라도 ‘혼자 감당해야 된다 어떤 것들은’ 그 그 감각이 있는 것 같아     


그렇지 그건 뭐... 그렇지. 그렇잖아 우리도 주위에 힘든 친구 있으면 어느 정도 들어주다가도 똑같은 얘기 계속하면 질리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공감 능력이 좋아도 타인이 해결해 줄 수가 없잖아. 없는 게 있잖아. 근데 그거 뭐 그러다가 이제 계속 징징대면 민폐 되는 거잖아. 그걸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리고 힘들거나 말거나, 일단 돈은 계속 벌어야 되고, “라이프 고스 온”. 그냥 내 고민은 고민대로 있고 그냥 어쨌든 인생은 계속 흘러가니까. 어쨌든 바닥까지 떨어지면 안 되잖아. 기반은 계속 유지하면서 뭘 고생을 하더라도. 근데 아무튼 그런 생각은 했지. 이렇게 살면서 이렇게 뭐 이렇게 하여튼 뭐가 무너지면 연쇄적으로 이게 오는구나 충격이...


그래서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들어 그러니까 꼭 활동이 아니어도, 뭐든지 열정적으로 한다는 거는 그만큼 마음을 쓰는 거잖아. 당연히 그 열정의 대상도 끝이 있잖아. 근데 그때 약간 사람마다 되게 허무함이나 이런 게 밀려올 수 있을 것 같아. 근데 나는 늘 보면 불사지르는 류의 캐릭터 같아. ‘일단 좋아, 딱 이렇게, 저거 하자’라고 판단하면 그다음부터 뒤를 보지 않아. 병역거부도 그랬던 것 같아. 진보정당 운동도 그렇게 했던 것 같고. 그러다가 꼭 그 끝에 한 번씩 이렇게 불타잖아. 그러고 나면 꼭 재가 돼서 한동안 이제 힘들어하는 거지. 요새는 이제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야. 그러지 말고 잔잔하게 오래가자. 그리고 언제든지 필요에 따라서 이제 거리 두기도 할 수 있고. 그런 나의 어떤 방식을 옛날에는 스스로 되게 미화했는데, 되게 사람이 열정적이고 에너지틱하고 막 이런 거라고 미화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닐 수도 있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그렇게 그런 방식으로는 살지 않을 것이다. 않는 게 좋겠다. 이걸 50이 다 돼서 깨닫네.    

 

그러게. 나이 먹어서 그런 건가?     


그것도 있을 수도 있을 것 같고. 에너지가 전 같지 않으니까. 그런 것도 있을 수 있을 것 같고. 이제 더 이상 그 정도의 어떤 여파가 오면, 이제 내구성이 달아서 못 견딜 것 같아. 


    

활동을 그만해야겠다 생각했던 적은 없어?     


뭐 학원 강사 10년 동안 안 한 거지     


그때는 40살부터 진보정당 운동 하겠다는 큰 그림이 있었던 거잖아    

 

그랬지. 그런데 지금은 자연스럽게 그 경계가 좀 희석되지 않을까 싶어. 그러니까 예를 들면 내가 여기 나무 그늘 이사장을 그만둔다 했을 때 그럼 나는 뭐.. 뭐냐? 동네에서 뭐냐? 그냥 동네 사람이지 뭐. 근데 또 뭐 예를 들면 장혜영 같은 사람들 선거 나면 도와주겠지. 또 뭐 이렇게 동네에서 뭐 있으면, 의미 있는 행사 있으면 참여하고 이러겠지만. 여전히 제일 많은 시간은 학원에서 돈 버는 데 보내겠지. 여행 다니는 거 좋아하니까 여행도 많이 다니고. 뭐 굳이 그걸로 경계를 이제 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내가 직업 활동가가 아니니까 전업활동가가 아니니까. 그런 거는 이제 많이 정리될 것 같아. 저절로. ‘모 아니면 도’식으로 살 필요가 없다. 그리고 내 생활 조건이 그게 되지도 않는다.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배드민턴 소모임도 하고 있고. 연애도... 근데 돌보는 게 또 은근히 위로를 줘 나한테도 파트너한테도. 은근히 위로와 힘을 줘.   

  

지금 병역 거부하는 사람들을 개인적으로는 다 모르겠지만 이제 원하는 나이 차도 있고 이 사람들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뭘 해. 이거 너무 약간 뭐 선배가 후배에게 이런 느낌 아닙니까?(웃음) 아니 그냥 뭐 해주고 싶은 말은 그냥 나도 그때는 진짜 하루하루 그냥 그 주제가 워낙 무겁잖아, 막 감옥, 재판, 약간 사람의 일상에서 굉장히 큰 사건들이, 굉장히 밀도가 높은 큰 사건들을 겪으면서 이제 지나가는 거잖아. 그러다 보니까 아무래도 그 무게가 상당할 텐데. 조금 지나서 보면 인생 엄청 길다. 그러니 너무... 그 무게감에 너무 압도당하지 않도록... 좀.... 그치 그게 중요하지. 그 압도당한 병역거부자들도 있잖아. 그 시간에 그냥 완전히 파묻혀버린 거지 그냥.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해주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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